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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독립, 자유, 평등을 위한 연대, 〈중한문화협회 장정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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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자유, 평등을 위한 연대, 〈중한문화협회 장정 초안〉

─ 글. 손성욱(창원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한중연대 노력의 결실

1942년 ‘중한문화협회’ 창설이 중국 충칭에서 추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이 기초한 <중한문화협회 장정 초안>(이하 ‘장정 초안’)은 그 노력의 산물이었다. 문화교류를 통한 우호 증진도 좋지만, 공동의 적인 일본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문화협회라니 한가로운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정부와 임시정부의 확연한 군사력 차이, 국민당 내 권력 다툼, 국공 갈등 속에서 실효성 있는 협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의 강한 공세 속에서 문화를 매개로 한 교류는 한중 간 유대감을 강화하는 효과가 컸으며, 문화협회의 창립은 국민당의 임시정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국민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력이 처음부터 긴밀했던 것은 아니다. 쑨원孫文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시 국민당은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의 대표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정권을 잡은 이래 북부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북양군벌 타도가 우선이었다. 1927년 북벌에 성공한 국민당은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중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국내외 문제로 임시정부 지원에 대해서는 미온적이었다. 국민당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를 통해서였으며, 1937년 전면적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양자 간 협력이 긴밀해졌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의 거센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다.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전세는 점점 안 좋아졌다. 한국은 여전히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국민정부는 일본의 공세에 밀려 수도 난징을 버리고 충칭에 자리를 잡았다.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를 두고 한중 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시되고 실질적 행동이 필요했다.
임시정부의 최대 과제였던 공식 정부 승인문제가 급진전을 보였다. 협회가 만들어 지기 한 해 전 주영 중국대사였던 궈타이치郭泰祺가 김구와 조소앙을 만나 국민정부 내에서 승인 문제 논의를 제안하겠다고 밝혔고, 임시정부 역시 적극적으로 승인을 요구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중국 정계와 여론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쑨원의 아들이자 입법원장이었던 쑨커孫科는 조소앙과 함께 한국 독립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여론 조성에 적극나섰으며, 충칭에서 한중 인사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임시정부는 한중 인사의 우의를 강화하기 위해 중한문화협회의 조직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독립, 자유, 평화를 위한 단결

1942년 10월 11일, 중한문화협회 창립식이 충칭시 방송국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 측 인사 김구, 조소앙, 이청천, 김원봉과 중국 측 인사 쑨커孫科, 우톄청吳鐵城, 펑위샹馮玉祥, 쩌우루鄒魯,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비롯해 400여 명이 인사가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는 중한문화협회 초대 이사장을 맡은 쑨커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한국 점령이 그 발단이 되었고, 한국이 함락된 이후 동아시아 민족들은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중국의 항일전쟁에 대한 주목적이 단지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이룩하는 것은 물론, 특히 일본 침략세력들을 물리치고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세계 각국과 연합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함으로써 공히 민족평등의 임무를 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한·중 약국의 민족이 손을 잡고 이 협회를 창립하는 것은 한·중 양국 민족의 유대와 단결을 촉진시켜 세계의 정의와 한·중 양국 민족의 독립, 자유, 평등을 쟁취한다는 아주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중한문화협회 장정 초안 (1942.10.24.)

쑨커의 개회사에는 중한문화협회의 목적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이루며, 한중 양국 민중이 단결하여 모든 민족이 평등한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창립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장제스도 축사를 보내 “한국의 지사들이 부국운동과 반침략전쟁에 노력하는데 이를 도울 것이고, 양국은 그 문화를 지키고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여 민족부흥의 기본을 마련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밝히며 협회 창립을 지지했다.
이러한 목적은 <중한문화협회 장정 초안>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총 31조인 ‘장정 초안’의 1조는 협회의 명칭을 규정하고, 2조는 협회의 취지를 중한 민족이 소통하며 중한 문화의 선양을 위해 연구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수호한다고 밝혔다. 이 초안은 조소앙이 기초했음에도 협회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한중’이라 부르지 않고 ‘중한’이라 불렀다. 국민정부와 임시정부 간 세력이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중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모든 민족이 평등한 세계를 추구하는 데 있어 그것은 큰 의미가 없으며 연대와 단결이 중요했다.
여기서 연대와 단결에는 선제조건이 필요했다. 한국의 단결이었다. 펑위샹은 다음과 같이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그것은 오늘 나라가 나라를 압제하고, 나라가 나라를 노예로 삼는 일본을 타도하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해내고 말 일이다. 지금 당장 가장 시급한 일은 한국이 진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 친구들이 이를 보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제 사이에는 무슨 일이든 의논을 못 할 일이 없고, 참아내지 못할 일도 없다.

국공합작 중인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도 “한국 동지들은 중국을 위해 피를 흘렸지만,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협력이 불가능한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의 한국 지도자들은 일치단결을 표명했고 5년에 걸친 항전과정에서 그들은 이를 몸으로 실천하였다.”고 발언하였다.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세력 내 다양한 노선과 당파가 있었으며, 혁명과 광복을 위한 방안을 두고 마찰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1937년 전면적 중일전쟁 이후, 국민당과 국민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그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중국 측 인사들은 한중연대를 강조하는 중한문화협회 창립식 자리에서 한국 내부의 단결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국공합작 중인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문화협회의 상징성

중한문화협회는 ‘장정 초안’을 살펴보면 순수한 문화단체이다. 조직, 경비, 회원 등 관련 규정에서 국민당이나 임시정부와 연관된 어떤 내용도 없다. 경비는 회원의 회비, 기부, 찬조금 등을 통해 충당하며, 회원은 협회의 취지에 동의하고 협회의 임무를 수행하기 원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회원 2명 이상의 추천이 있으면 입회가 가능했다.
여기서 협회의 임무는 ‘장정 초안’에 규정된 한중 양 민족의 연락과 호조, 한중 양 민족문화의 선양과 연구,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저항, 동아시아 평화 등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한문화협회는 강연회와 좌담회를 열어 한국 독립문제와 동아시아 평화 문제를 다루며 선전 활동을 펼쳤고, 『중한회신中韓會訊』과 『중한문화中韓文化』 등 잡지 발간을 통해 한중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하였다. 중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연극 공연이나 도서 출판 등 다양한 문화사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중한문화협회를 온전한 민간 차원의 문화교류 단체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국민정부는 문화협회라는 이름으로 핵심 국가들과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중한문화협회 창설 당시 중미문화협회, 중소문화협회, 중영문화협회, 중인문화협회가 이미 있었다. 이들 본회는 모두 국민정부의 수도인 충칭에 위치했으며, 각각의 이사장은 행정원장 쿵샹시孔祥熙, 입법원장 쑨커, 선전부 부장 왕스제王世杰, 고시원 부원장 주가화朱家驊가驊맡았다. 국민정부의 권력 분립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감찰권, 고시권 의 5권으로 이루어줬는데, 문화협회 이사장을 권력기관의 수장이 역임했다.
이전 문화협회가 그랬듯, 중한문화협회에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요 인사가 참여했다. 이들 중 초대 명예이사와 이사에 선임된 쑨커, 주자화, 천궈푸陳果夫, 쓰투더司徒德, 왕주이汪竹一, 장지張繼 등 11명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외국인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중한문화협회가 단순한 문화 교류 단체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국민당과 국민정부가 한국과 문화협회를 만든 것은 한국을 미국, 소련, 영국, 인도 등과 같이 중요 국가로 본 것이며, 임시정부를 사실상 대등한 국가 관계의 공식 외교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중한문화협회 주최 전후한국독립문제 좌담회 토론대강(1943.5.9.)

가장 오래된 한중우호 단체

중한문화협회는 한중 양국이 공동의 적을 두고 연대하고 투쟁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순수한 문화교류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 타도라는 선명한 정치적 목적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눈앞의 목표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니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연대와 교류, 한중문화의 선양, 동아시아 평화 수호라는 원대한 지향도 담고 있다. 조소앙은 창립선언문에서 중한문화협회의 창립은 “한국과 중국의 문화를 부흥시키고, 양국 민족의 영원한 협력을 도모하기 위함”이며, “한국과 중국이 서로 힘을 합하여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정착, 촉진시키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한문화협회에 담긴 조소앙의 뜻은 여전히 유효하다. 해방 이후 수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중한문화협회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한중 회원이 중국에서 함께 모여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주요 무대가 중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가능했던 것이었고, 해방으로 인해 중한문화협회는 양측 기구로 분리되어 교류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전 협회 회원들이 한국과 중국의 주요 인사였기에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으나, 양측 협회 차원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과 타이완으로 패퇴한 국민당의 상황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65년에 이르러 한국에서는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최용덕이 회장으로 취임하며 한중문화협회가 재창립을 하였다. 당시 교류는 냉전의 영향으로 타이완으로 물러난 국민정부와 교류가 이루어졌으나, 1975년 장세스 사망 이후 교류가 거의 끊겼다. 타이완과의 교류는 복원되지 못했지만,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측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한중 우호 증진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