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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독립운동을 도운 미국, 캐나다인들

특집

독립운동을 도운 미국, 캐나다인들

: 헐버트, 알렌, 에비슨, 스코필드

— 글. 김동진(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머리말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이 미미한 현실에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독립신문 서울판>을 통해 외국인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공적을 소개하는 장을 마련한 것이야 말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단체를 책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글쓴이는 이번 글에서 미국, 캐나다인 건국훈장 수훈자 27인 중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알렌(Horace N. Allen), 캐나다인 에비슨(Oliver R. Avison),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에 대해서만 공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 4인의 업적마저도 지면 관계상 제한적으로 소개하였음을 밝힌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역사의 양심 ‘헐버트’

호머 헐버트 Homer Hulbert
1863~1949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Vermont) 주에서 태어나, 1884년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을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 중,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 5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이후 1949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며 63년을 오롯이 한민족의 문명진화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고 뤼순감옥으로 이송된 뒤 일본 경찰에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공술하며 헐버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헐버트는 50년 독립운동을 한 특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 침전에서 권총까지 품고 불침번을 서며 고종과 세자를 지켰다. 1905년 10월 을사늑약 저지를 위한 고종황제의 대미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일본의 보호조약 강제를 막아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워싱턴에서 고종으로부터 조약에 서명한 일이 없으니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 전보에 대해 헐버트는 <뉴욕타임스>와 두 차례 회견하면서 일본을 압박하여 보호조약을 무효화시켜 달라고 미국 국민에게 호소했다. 헐버트는 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황제의 특사로 활약했다. 그의 임무는 한국과 조약을 맺고 있던 미국 등 9개국의 국가원수를 방문하여 그들의 협조를 구하고, 한국인 특사들(이상설, 이준, 이위종)의 활동을 돕는 일이었다.
러시아, 유럽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한 헐버트는 7월 10일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연설하며 7월 9일 연설한 이위종 특사의 주장을 지원하였다. 헐버트는 이어서 미국 정부를 설득코자 미국으로 갔으나, 7월 20일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면서 헐버트의 특사 자격이 정지되어 더 이상 특사활동을 할 수 없었다.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회의장에 들어가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본 보호통치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후일 한국 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헐버트는 일본의 박해로 한국에 돌아갈 수 없어 미국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시에 정착하였다. 그는 이후 강연, 기고, 집회 등으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38년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뉴욕타임스> 등 언론을 통해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미국 전역을 돌며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친일정책을 편 루스벨트와 <뉴욕타임스>를 통해 일전을 벌였으며, 3·1혁명 직후인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할 것인가(What about Korea?)>라는 ‘한국 독립 호소문’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이외에도 헐버트는 한국의 주권수호와 국권회복을 위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헐버트는 해방 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 초청을 받고, 86살의 노구를 이끌고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워싱턴을 출발하기 전 AP통신 기자에게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Westminster Abbey).”라는 감동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서울 도착 1주일 만인 8월 5일 세상을 떠,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1949년 8월 11일 마포나루 한강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은 헐버트에게 ‘건국훈장(1950년 태극장, 현 독립장)’, ‘금관문화훈장(2014)’을 서훈하고,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제1회 서울아리랑상(2015)을 수여했다.

친한파 외교관 ‘알렌’

호러스 뉴턴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출생하였다. 오하이오웨슬리안대학교(Ohio Wesleyan Univ.) 신학과와 마이애미의과대학(Miami Medical School)을 졸업한 후 1883년 11월 중국에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어서 1884년 9월 15일 주한미국공사관 의료요원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서 자상을 입은 민 왕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여 고종과 민 왕후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1885년 4월 조선 조정의 도움으로 광혜원(후일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하고, 서양식 의학교육도 병행하였다. 1887년 주미조선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되어 워싱턴에서 근무하다가 2년 후 사임하였다. 1890년 7월 주조선미국공사관 관리가 되어 미국 외교관의 길을 걸었으며, 1897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 겸 총영사가 되었다. 1905년 3월 미국정부와의 불화로 주한미국공사 직에서 해임되었다. 1905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가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에 정착하여 의료사업을 영위하였다. 1908년 <한국정세(Things Korean)>를 출판하였으며, 1932년 12월 11일 톨레도에서 서거하였다.
알렌(한국명 안연安連)은 이처럼 내한 초기 의료 활동으로 조선을 돕다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한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외교관 생활 중 한국의 역사, 문화를 국제사회에 소개하고, 한국을 돕는 일에 적극 나섰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구미 외교관들과 함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 공사를 찾아가 해명을 요구하였다. 1903년 9월 루스벨트 대통령과 면담하며 미국의 친일노선은 러일전쟁을 선동하는 것이며, 만약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 미국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1904년 고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훈1등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대한민국은 1950년 3월 1일 알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을 서훈하였다.

현대의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 ‘에비슨’

올리버 R. 에비슨 Oliver R. Avison
1860~1956

에비슨(Oliver Ruth Avison)은 세브란스병원 태동의 산파로서 현대의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0년 6월 30일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6살에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1887년 토론토대학교(Ontario College of Pharmacy, Univ. of Toronto)를 졸업하고, 1893년 6월 미국 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는 제중원에서 일하면서 고종의 어의로도 활약하였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하고 원장을 맡으면서 서양의술 도입은 물론 개화기 근대 의학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의사를 배출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크게 힘썼다. 1916년 연희전문학교 전신인 조선기독대학교(Chosen Christian College) 교장을 맡음으로써 연세대학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에비슨(한국명 어비신魚丕信)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헐버트, 언더우드 등과 함께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며 고종과 세자를 지켰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면서 한국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한국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가 가능케 하였다. 1919년 3·1혁명 후 한국 상황을 해외에 알리는 데 힘썼고, 총독부와의 회합에서 한국인들에게 자유와 자치를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9년 3월 9일 회합에서 그는 ①두 민족 간의 독특한 민족적 차이점에 대한 배려 ②한국어 교육의 필요성 ③언론의 자유 ④출판의 자유 ⑤공공집회의 자유 ⑥여행의 자유 ⑦사회 정화(한국인을 상대로 한 매춘행위에 대한 일본의 강제로 한국인은 자구책이 없음) ⑧한국인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총독부 우사미宇佐美勝夫 장관에게 답변을 요구하였다. 또한, 3·1혁명 부상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였다.
1935년 12월 선교사에서 은퇴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42~3년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에서 재무를 담당하며, 헐버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1956년 8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은 에비슨에게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3·1혁명을 세계에 알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스코필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는 3·1만세항쟁 34번째 민족대표로도 불린다. 그가 한국인들의 3·1만세시위를 돕고, 해외에 알리는 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나 1907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1909년 소아마비를 앓게 되나 학업에 정진하여 1910년 토론토 온타리오(Ontario) 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하였다. 1916년 에비슨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의 초청을 받고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았다.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石虎弼)은 1919년 초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李甲成과 교류하다가 3·1만세시위가 일어나자 현장을 직접 촬영하여, 국제사회에 알렸다. 현존하는 3·1만세항쟁 사진 대부분 그가 찍었다. 그는 만세시위에서 피해를 당한 한국학생들을 구출하는데도 앞장섰다. 스코필드는 또 일본군경이 1919년 4월 5일과 15일 한국인 30여명을 학살한 수원 지역의 수촌리 및 제암리 방화, 학살 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고, 해외에 알렸다. 스코필드는 4월 18일 수원에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자전거로 제암리에 도착하여 일본 경찰 몰래 사건 현장을 촬영하고, 수촌리도 방문한 뒤 서울로 왔다.
스코필드는 <제암리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하던 영자신문 <상하이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에 보냈다. 동 신문은 1919년 5월 27일 자에서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 통신원 이름으로 이 내용을 실었다. 또한 같은 무렵 작성한 <수촌리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를 비밀리에 해외로 보내, 미국에서 발행하던 장로회 기관지(<Presbyterian Witness>)가 1919년 7월 26일 자에 이를 실었다.
스코필드는 또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濟滕實 총독을 만나 한국인들에 대한 고문 등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서대문형무소, 대구형무소 등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수감자들을 위문하고, 그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였다. 그는 1920년 선교사 사역 기간이 끝나 캐나다로 돌아가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도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해방 후 195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병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고아원 등을 돕고 또 많은 언론 기고와 회견을 통해 한국 사회가 정의, 도덕국가가 되자고 호소하였다. 1970년 4월 12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광복회가 주최한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은 스코필드에게 1960년 문화훈장을,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