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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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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

— 글. 황선익(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의 활동과 독립유공자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한국 독립운동은 수많은 외국인의 호응과 지원에 힘입어 전개되었다. 중국 땅에 터를 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혁명인사들의 지지 속에서 공식 활동을 이어갔으며, 유럽과 미국 등지의 정치․언론․교육계 인사들의 호응을 받으며 외교․선전 활동을 펼쳐나갔다.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정의에 대한 호소가 국제사회에서 울려퍼질 수 있었던 데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이 꼭 ‘외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의 선교사와 언론인 등은 1900년대 들어 일본의 국권침탈이 노골화되자 이를 비판하며 한국을 지지했다. 구국운동과 결을 함께 한 외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과의 연을 이어가며 국내외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은 물론 제암리학살사건, 1920년 경신참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등에 대한 사실을 세계인에게 알리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독립운동의 대본영이 구축되자 이와 연계된 외국인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임시정부가 태동한 중국에서, 그리고 국제 외교를 이끌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외국인의 지원활동이 이어졌다. 이때 구미에서는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와 한미협회 등이, 중국에서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 등이 결성되어 조직적인 한국 독립운동 지원이 이뤄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한국의 독립’은 ‘카이로회담’에서 ‘합의’에 이르렀다.
구국운동에서 시작하여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국내외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한국독립운동의 흐름은 외국인 독립운동가의 지원 활동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외국인은 중국인 34명, 미국인 22명, 영국인 6명, 캐나다인 6명, 호주인 3명, 아일랜드인 2명, 일본인 2명, 프랑스인 1명, 총 76명이다.
대체로 미국과 영국계 독립운동가는 러일전쟁 및 을사늑약을 전후한 언론 활동 등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이뤄지면서 영미권 외국인의 독립운동 지원은 더욱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19년 미국에서 시작된 한국친우회 결성은 1920년 영국과 프랑스로 전파되었고, 이 외에도 워싱턴회의 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외국인들의 선전활동이 이어졌다. 외국인의 독립운동 지원활동은 1940년 들어서 다시 조직화되었다. 일본의 팽창주의가 태평양을 위협하고,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의 지식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며 한미협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다각적인 인맥을 동원하며 미국 국무부에 한국인의 전쟁 참여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주문했다. 태평양전쟁기 영미권 인사들의 독립운동 지원은 구미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국내에 있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활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렇듯 영미권 외국인의 독립운동만 보더라도 한국 독립운동의 지속성과 외연을 가늠케 한다.
중국인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191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다. 신해혁명이라는 계기를 통해 새 시대 개창을 교감한 지사들은 중국의 혁명과 한국의 독립을 서로 지지하며 깊은 인연을 맺어가기 시작했다. 쑨원孫文과 신규식의 만남은 중국 국민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호 인정이라는 성과로 이어져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활동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 맺어진 한중 독립운동가의 결속은 1920~30년대 임시정부의 활동과 각종 의열투쟁에서도 빛을 발했다. 중국인의 독립운동 지원은 임시정부의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났다. 1932년 상하이上海를 떠나게 된 임시정부가 존립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중국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각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한 장제스蔣介石에서부터 김구와 함께 피난생활을 함께한 주아이바오朱愛寶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은 음양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이러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은 1940년 충칭重慶시기에 더욱 고조되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끌어내는 큰 힘이 되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새겨진 외국인 독립운동가

반세기 동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외국인이 활동했지만, 아직도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예우받고 있는 사람은 80명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기록을 통해 많은 외국인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 인물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국외 독립운동과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강조했지만, 그들의 활동을 실체적으로 규명하고 예우하는데에는 무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적극적인 전시 연출을 모색했다. 그 결과 기념관 3층에 [외국인도 국경을 초월해 돕다]는 전시 공간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미국, 중국, 유럽의 외국인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설명되고 있으며, 그들의 사진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현재 기념관에 각인된 외국인 독립운동가는 중국인 174명, 미국인 144명, 영국인 6명, 캐나다 3명, 프랑스 2명, 오스트리아인 1명, 총 330명이다.
‘동심육력同心戮力 :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함께 함’으로 표현된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7년간 끈질긴 투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제사회에서의 활동, 독립 승인과 임시정부 승인 노력에 이들은 함께 했다. 이들에게 한국의 독립은 한 약소민족의 국권 회복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양심과 정의의 수호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졌다. 1919년 세계 곳곳에 전해진 제암리학살과 경신참변 소식들은 야만적인 일본제국주의를 서구 사회가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은 소외되었지만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국을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1920년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자유한국』에는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각국의 동향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여기에는 “1919년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후 미국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며, 비록 한국 문제가 ‘평화회의의 관할 영역이 아니라’며 배척됐지만, 미국 상원에서 결의안이 통과됐으며, 영국 런던에서도 한국 문제가 하원 의원들에 의해 외무성 차관실에서 제기되었음”이 알려졌다. 또한1920년 1월 파리 지리협회Société Géographie에서 펠리시앙 샬레F. Challaye 교수가 「극동에서의 위협받은 평화」를 발표하며 한국의 상황을 상세히 소개했음을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다시 프랑스로 이어져 각국에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쑨원, 천치메이陳其美, 황씽黃興 등으로 이어진 중국 혁명 인사들과 교류가 천궈푸陳果夫, 우티에청吳鐵城 등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한중호조사, 한중문화협회로 결집되었다.

외국인과 함께한 임시정부의 여러 장면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와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급박하게 상하이上海를 떠나야 했다. 이때 미국인 피치George Ashmore Fitch 부부와 중국인 추푸청初輔成 일가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피치 부부의 지략으로 상하이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자싱嘉興으로 피신한 김구 등은 저장성浙江省의 유력자인 추푸청과 그 가족들의 조력으로 피난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피치 부부와 추푸청 일가의 지원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대를 이어 한국 독립운동을 도왔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1920년 영국 런던에 도착한 황기환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영일관계에 대한 전망을 내놓았다. 같은 해 메켄지의 Korea’s Fight for Freedom,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이 발간되면서 ‘한국의 투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찰나, ‘한국사절단korean mission’ 황기환의 등장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미 러일전쟁을 겪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목도한 메켄지는 황기환과 함께 런던 한복판에서 언론․선전활동을 전개하며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인과 지식인을 끌어모았다. 이렇듯 외국인들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기마다 결집하여 한국 독립을 성사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결집의 최고조는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였으며, 이는 한국광복군과 영국군, 미국 OSS와의 연대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들의 활동은 반세기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밝히지 못한 역사가 더욱 많이 남아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은 다양했다. 국가간 이해관계를 위해, 혹은 개인적 친소관계로 인해 지원한 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이 호소하는 정의에 동감하는 이들이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세계인이 힘썼으며, 그로부터 한국의 세기적 발전이 이룩되어 왔음을 더욱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