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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독립운동을 도운 중국인들

특집

독립운동을 도운 중국인들

: 쑨원, 장제스

— 글. 배경한(前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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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는대로 한국독립운동은 중국, 러시아, 유럽,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많은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까닭에 다양한 국제적 교류 가운데 많은 국제적 지원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는 세계사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늘 강조되어 왔다. 최근 독립기념관 내에 “연합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전시관을 새로 마련한다는 소식은 그런 점에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2023년 10월 현재까지 우리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을 받은 외국인은 모두 98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단연 중국인이 가장 많아서 41명에 달하는데 국적으로는 중국인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인라고 해야 할 중국 조선족 7명을 제외한다고 해도 34명이 중국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중국은 가장 많은 한인들이 망명 거주했던 지역이고 그런 까닭에 해외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곧 20세기 전반기에, 중국 또한 열강들의 침략 아래 국가적 주권을 크게 훼손당하여 식민지에 가까운 상황, 곧 차식민지次植民地, 혹은 아식민지亞植民地의 상황에 있었던 때문에 한국과는 기본적으로 동지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만큼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중국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4명 중국인 서훈자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그 대다수가 국민당 계열의 정치가, 군인, 외교가들이다. 이러한 서훈 상황은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들을 고려할 때 전체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진영에 속했던 인물들에 대한 서훈은 대부분 막혀 있어서, 서훈의 기준이 되어야 할 독립운동 자체에 대한 공헌만을 놓고 보자면 앞으로 재고되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임시정부나 한국광복군을 포함한 주요 독립운동의 경우 중국 측 지원의 상당 부분이 국민당 측으로부터 제공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 국민당 계열의 중국인 서훈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 두 사람을 드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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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1912)

쑨원은 중국의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의 최고 지도자로서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을 만드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쑨원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혁명 세력과의 관계는 1905년 도쿄東京에서 만들어진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 유학했던 조소앙을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과,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타이지타오戴季陶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유학생들 간의 긴밀한 교류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쑨원과 한국인들 사이의 본격적인 교류는 신해혁명 성공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대 관내關內(만리장성 이남)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신규식 같은 경우 1911년 혁명의거(10월 10일의 무창기의武昌起義)가 성공한 직후인 12월 그 소식을 듣고 서울을 출발하여 상하이上海를 거쳐 임시혁명정부가 들어선 난징南京으로 망명해 갔다. 1912년 2월, 신규식은 상하이에서 쑨원을 직접 만나 혁명의 성공을 축하하기도 했다.
이후 신규식, 김규식, 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와 중국 측 혁명파 인사들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또 동제사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던 한중연대 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는 쑹자오런宋敎仁, 타이지타오戴季陶, 랴오충카이廖仲凱, 조우루鄒魯, 쉬치엔徐謙, 장지에張繼 등 혁명파의 중심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로 볼 때 1912년 이후 신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 망명 지사들과 쑨원 내지 혁명파 인사들 사이에 밀접한 교류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쑨원을 비롯한 중국 혁명세력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임시정부와 쑨원 내지 중국 혁명세력과의 교류 협력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1921년 9~10월에 있었던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광저우廣州 호법護法정부 방문과 쑨원과의 회담은 쑨원의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특히 쑨원과 신규식 사이의 회담에서 상하이임시정부와 호법정부가 상호간에 외교적 승인(실제로는 사실상의 승인)을 했다는 점은 쑨원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 왔다.

신규식(중국 상하이, 1920년경)

여운형

그런 한편으로 같은 시기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들과 쑨원의 밀접한 교류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당시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의 경우 쑨원과의 밀접한 교류관계를 볼 수 있으니 이는 당시 반제연대의 일환으로서 중국, 한국, 베트남, 인도의 혁명가들 사이에 추진되고 있었던 연대활동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운동가들과 중국 혁명세력 인사들과의 연대를 위한 단체의 결성도 나타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함께 1921년 상하이, 창샤長沙, 광저우廣州 등지에서 만들어졌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같은 조직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조직을 통하여 중국혁명가들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중국혁명 참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쑨원은 20세기 전반기 한중관계의 기본 맥락이라고 할 ‘한중호조’의 실천가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을 준 가장 대표적인 중국의 정치지도자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1968년 한국 정부에서는 쑨원에게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쑨원의 축사(동아일보, 1920. 4. 1.)

장제스와 쑨원(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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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제일차국공합작의 결과로 1924년 6월, 광저우廣州 근교의 황푸黃埔 섬에 만들어진 황푸군관학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민혁명군의 최고지휘관이 되면서 1920년대 중반이후 1940년대 말까지 중국 최고의 정치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측에서도 자신들이 쑨원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국민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장제스가 쑨원의 후계자라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황푸군교에는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수의 한인들이 입교하였다. 당시 상당수 한인들이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4기생의 경우에는 24명의 한인 명단이 확인되고 있다. 또 1927년 2월에 문을 연 황푸군관학교 우한武漢분교의 경우에는 1927년 말 광저우 봉기廣州起義로 문을 닫을 때까지 200여명의 한인들이 재학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들 한인 학생 가운데에는 김원봉金元鳳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열단 단원이 포함되어 있었고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장자 박시창朴始昌처럼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자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한인 청년장교들은 이후 국민혁명군에 편성되어 중국혁명(北伐)에 참가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가서는 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1932년 4월 말에 일어난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으로 옮겼다가 다시 1937년 7월 중일전면전쟁(七七事變) 발발 이후에 가서는 창샤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로 옮기고 1940년 최종적으로 국민정부가 있던 충칭에 정착하였다. 당시 장제스는 김구 등 한국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과 보호에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으니 임시정부가 여러 지역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장제스의 많은 지원이 있었다. 충칭 정착 이후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지원은 계속되었으니 사실상 독자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채 중국 내의 망명정부로 존재해야 했던 임시정부로서는 거의 유일한 존립기반이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지원이었다.

©미국립문서관리청(NARA)

장제스,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카이로, 1943)

한국광복군 창설을 둘러싼 한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 사이의 논의는 1940년 한국임시정부의 충칭 정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임시정부의 독자적 운영권 확보 노력과 중국 측의 이에 대한 견제 및 통제정책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구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제정을 통하여 광복군을 중국 측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중국 측의 이러한 정책은,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우호적 지원이라는 측면보다 중화주의적 통제라는 측면을 더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1940년 이후, 특히 1941년 말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한중 간에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문제에 있어서도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에서는 적극적인 승인 의지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통하여 전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와 통제,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의 관계를 먼저 고려해야만 했던 것이다. 특히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통하여, 미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으로서는 국제공동관리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 측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다. 요컨대 장제스 국민정부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전후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할 중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국제질서의 일부로서 중국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53년 한국정부는 중국내의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를 인정하여 장제스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