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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독립운동을 도운 유럽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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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도운 유럽인들

: 루이 마랭, 펠리시앙 샬레

— 글. 이장규(프랑스 파리시테대학교 박사)

한국친우회 회원모집 신문기사

©L’Ere nouvelle, 1921/02/14 (프랑스국립도서관, BNF)

1919년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던 시기 프랑스 파리는 1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윌슨의 자결주의에 고무되었던 한국의 독립운동계는 김규식 대표를 파리로 파견하였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후 파리위원부는 산하에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즉시 공보활동에 들어갔다. 김규식과 황기환이 이끌던 파리위원부는 비록 소수의 인원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우사 김규식이 작성한 ‘절차개요’라는 문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청원서를 제출한다고 해도 당장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주지하고 있었다. 당시로선 한국이 처한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프랑스 내 유력한 인사들과의 연대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김규식이 오죽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독립운동”이라고 표현했을까. 낯선 땅 파리에서 펼친 외교활동은 그야말로 고된 홍보활동 자체였다. 결국 그들의 노력은 1921년 6월 23일 초대 멤버 23명의 프랑스 지식인들로 구성된 ‘한국친우회(Association des amis de la Corée)’의 창립을 이끌어 내었다. 이 한국친우회의 창립은 펠리시앙 샬레(Félicien Robert Challaye, 1875∼1967)가 주도하였고 루이 마랭(Louis Marin, 1871∼1960)은 이 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두 사람은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초기부터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지만 모두 약소민족 특히 한국에 대한 동정이 각별했다.

서영해가 루이 마랭에게 쓴 편지

©프랑스국립도서관 (BNF)

프랑스의 유력한 정치가였던 루이 마랭은 오랫동안 공화당의 수장으로서 1905년부터 1952년까지 총 5회의 장관직을 역임하고 12차례나 뫼르트에모젤 지역의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했던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각 지역의 민속을 연구하였고 이를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왕성한 연구 경력으로 훗날 민속학·인류학 회장 등 수많은 학계의 회장을 역임했다. 1901년 극동아시아를 여행할 당시 한국에 방문했던 그는 「한국으로의 여행(Voyage en Corée)」이라는 작은 책을 발간했다. 1919년 8월 6일 파리위원부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고 미국으로 떠나야하는 김규식의 환송연을 겸하여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을 초청해 만찬모임을 개최했다. 프랑스 외신기자클럽에서 거행된 이 연회는 파리지역 국회의원 샤를 르부크(Charles Leboucq, 1868~1959)가 주재했고 프랑스 사회의 저명인사 및 지식인들 60여 명과 파리위원부의 멤버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비록 간절한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홀대를 받고 애석하게 프랑스를 떠나지만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내준 루이 마랭에게 특별한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루이 마랭 또한 일본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연설로 답을 하였다. 이후 그의 한국 여행 당시 수행했던 조르주 듀크록(George Ducrocq, 1874∼1927)이 쓴 『가련하고 온화한 한국(Pauvre et douce Corée)』이라는 책을 참석자 모두에게 선물로 배포하였다. 1945년 9월 25일 프랑스에서 25년을 머물며 임시정부 주불특파원으로 활약했던 서영해도 해방을 맞아 파리를 떠나면서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준 루이 마랭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서신을 통해 “한국의 독립과 광복을 맞이해 한국 임시정부의 프랑스 대표인 저는 회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회장님은 한국이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처해 있을 때,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을 도와주고 옹호한 프랑스의 고귀한 양심을 대표하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며 깊은 고마움을 전했다.
펠리시앙 샬레는 철학교수, 언론인, 反식민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1917년과 1919년 두 번의 한국여행을 통해 비참했던 한국의 실상을 체감했다. 특히 1919년 3월경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일본과 부산을 거쳐 산동반도를 여행하던 그는 평화적인 만세시위가 일본군경에 참혹하게 진압되는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목도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프랑스와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1920년 1월 8일 프랑스 사회지리학 강당(Salle de la Société de Géographie)에서는 파리위원부와 프랑스 인권연맹 주최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컨페런스가 성대히 개최되었다. 4백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여러 명의 연사가 발표하였다. 특히 황기환은 이 자리에서 “한국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일본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프랑스어로 힘겹게 연설한 뒤 일본과 한국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펠리시앙 샬레에게 연설을 넘겼다.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La Paix menacée en Extrême Orient. Chine et Corée)’라는 주제의 그의 연설 전문은 프랑스 인권연맹의 기관저널에 수록되었고 이 행사는 여러 일간 신문에 보도되었다. 샬레는 이 자리에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속에 있다. 한국의 오랜 문명은 일본의 선생님이었다. 거기에 살고 있는 2천만 명의 국민들은 일본이 일시적으로 자행하는 통제의 수단들을 중지하고 그들의 자치를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장시간 연설을 마친 그는 한국의 참상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을 상영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는 억압받는 민족들의 독립을 위하여 연맹의 창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1921년 6월 펠리시앙 샬레가 주도적으로 창립한 ‘한국친우회’는 그것의 실천이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기관저널 『자유한국』 제10호에서 샬레는 그들의 동지들과 억압받는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동참하는 모두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인사를 전했다. 샬레는 한국독립운동의 생생한 상황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제의 인권유린을 프랑스 사회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다수의 프랑스 언론을 통해 한국의 인권 옹호를 위한 많은 글들을 게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그는 루이 마랭, 황기환과 더불어 프랑스 지식인들과 인권연맹 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1921년 6월 23일 ‘한국친우회韓國親友會’의 창립을 실현하였다. 그는 또한 1923년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급사한 황기환 서기장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에 애석함과 진심어린 존경을 담아 그의 추도문을 작성해 인권연맹 저널에 게재하였다. 평화주의자이자 반 식민주의자로서 한국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가졌던 그는 파리위원부 그리고 그 후에는 임시정부 파리특파원이었던 서영해와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나누었다. 1927년 반제동맹회의 참가를 위해 파리를 찾았던 최린 등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인 최초 여류화가였던 나혜석을 자신의 집에 수개월간 머물게 하며 한국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다.

루이 마랭의 무덤

©이장규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은 루이 마랭과 펠리시앙 샬레,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고야 말았다. 루이 마랭은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프랑스 내무부대(Forces françaises de l’intérieur, FFI)대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944년에는 게쉬타포에 쫓겨 런던으로 건너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후 드골 장군으로부터 임시내각에 참여를 종용받았으나 이를 고사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레지옹 도뇌르와 무공 최고훈장(Légion d’honneur et la Croix de guerre-Palme vermeil)을 수여하였다. 반면 극 평화주의자였던 펠리시앙 샬레는 2차 대전 당시 親비시(Vichy) 계열의 저널에 기고했던 전력이 문제가 되었다. 전후 프랑스 공산당이 산하에 조직된 ‘전국작가위원회’가 작성한 기피 작가명단에 샬레의 이름을 올리면서 논란이 빚어진 것이다. 사실 그가 기고했던 글들은 ‘나치찬양’ 내지 ‘부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반전 평화주의자의 생각을 담은 글들과 학술적인 기고문들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부역자 처벌의 광풍이 몰아치던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혐의가 벗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간의 논란으로 인해 샬레는 고귀한 그의 명예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후 샬레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과 억압에 저항하는 국가위원회’라는 단체를 창설하고 끊임없이 반전운동을 펼쳤다. 특히 기관지였던 평화의 길(La Voie de la Paix)이라는 언론을 통해 한국의 평화에 관한 동정적인 기사를 많이 게재하였다. 1965년 11월 7일 ‘프랑스 평화주의자 연합’에서 마련한 샬레의 90세 생일축하 연회에서는 평화주의자이자 반전·반식민주의 활동으로 일생을 보낸 자신의 삶을 회고하였다. 그는 1919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인들이 보여준 낙천적이고 평화로운 기질을 회상하면서 중립국인 스위스처럼 무기가 없어도 평화로운 나라가 되길 염원하였다.
프랑스인으로서 루이 마랭과 펠리시앙 샬레는 한국 독립운동에 지대한 도움을 준 인물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연히 2015년 프랑스인 최초로 루이 마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펠리시앙 샬레는 앞서 언급된 사실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 차후 샬레에 관한 심도 있는 공훈조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서영해, 나혜석, 펠리시앙 샬레

©수원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