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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조지 쇼우

임시정부의 인물들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조지 쇼우

쇼우가 처음으로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사실은 백범일지에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쇼우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더욱 활발해졌다.

— 글. 김용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국독립운동은 세계성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가지다

한국독립운동은 이념으로 인류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는 세계성을 지녔다. 한국민족의 독립만을 갈구하지 않은 것이다.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제국주의시대에 인류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도와 정의를 부르짖는 양심의 고고한 외침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불의와 침략과 억압과 야만이라는 제국주의의 논리에 대항해, 정의와 평화와 자유와 인도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이념을 구현한 것이다.
실제로도 ‘한국 독립은 동양평화의 토대이자 세계평화의 기초’라는 세계성을 가졌다. 이는 을사늑약 직후 광무황제(고종)가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여 국제사회를 향해 한국 독립의 논리로 천명한 이래, 안중근 의거와 3·1운동을 거쳐 더욱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특히 3·1독립선언서는, “전 인류 공존동생권共存同生權의 정당한 발동”으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나아가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독립이 동양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의 선결조건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이 같이 인간의 논리와 세계평화를 구현하려는 한국독립운동은 세계인들에게 감명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세계인들의 지원이 답지하였다. 한국과 인연이 깊은 구미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양심적인 서양인들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조지 쇼우가 바로 그런 서양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지 쇼우는 누구인가

조지 쇼우(1880~1943)

조지 루이스 쇼우(George Lewis Shaw)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이다. 그는 한국과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과 더 가까웠다. 어머니는 물론 부인까지 일본인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인 아버지 사무엘 루이스 쇼우(Samuel Lewis Shaw)와 일본인 어머니 엘렌 오씨(Ellen O’sea) 사이에서 1880년 중국 복건성 복주福州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일본인 사이토 후미齋藤ふみ와 결혼하여 두 아들 사무엘(Samuel Shaw)과 루이스(Lewis Shaw)를 두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일본 관서지방인 고베神戶에 살았다.
쇼우가 어떠한 인연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조국 아일랜드는 한국처럼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당시 독립전쟁을 전개하던 중이었다. 아일랜드는 1919년 1월 21일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페인(Sinn Fein)당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으로 식민기관을 파괴하며 영국인 통치자들을 처단하는 등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영국 역시 정규군과 별동대를 동원해서 아일랜드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아일랜드와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발표되고 전국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군경을 동원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중국 안동(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이라는 해운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쇼우는 자신의 조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공감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독립운동을 어떻게 도왔는가

쇼우가 처음으로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사실은 백범일지에 나온다. 김구는 3·1운동 중이던 1919년 봄 동지 15명과 함께 상해로 망명할 때, 중국 안동에서 이륭양행의 배편을 이용해 상해로 갔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쇼우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더욱 활발해졌다.
안창호가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국내 동포와의 소통을 위해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자 쇼우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7월 이륭양행에 임시정부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는 임시정부가 국내는 물론 만주·러시아 동포와 소통하는 연락 거점이자 무기 보관 및 전달 장소가 되었다. 이륭양행이나 그 소속 계림호와 태융호 등 해운선박은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인이 운영하였기에 일본 영사관 경찰이나 신의주경찰서의 촉수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삼고 국내외에 군사기관을 설치해 무장투쟁에 적극 나서자 안동교통사무국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만주·러령 연해주는 물론 국내 군사기관에 제공할 무기와 군자금의 보관 및 전달 장소로 활용된 것이다.
그간 밝혀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쇼우의 활동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쇼우의 이륭양행은 독립운동가의 교통·보호 및 소개와 무기 운반에 활용되었다. 1919년 10월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김가진이 무사히 임시정부로 갈 수 있도록 선편을 지원했고,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의친왕 이강의 상해 망명 시도를 돕기도 했다.
쇼우는 자신이 체포되기 직전인 1920년 5월 압록강 하류에서 일제의 압록강 수비대가 수척의 군함을 동원해 임시정부의 비서국장 겸 주계국장인 고일청 등이 승선한 계림호를 포위하고 배안을 수색하겠다고 협박했음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요인들을 보호한 적이 있었다. 1921년 10월에는 천진 한혈단 단장 오인석, 3·1민족대표 김병조와 그 처자 2명, 조상섭과 그 가족 4명, 신창희와 그 가족 5명 등이 이륭양행 소속 계림호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상해를 왕복할 때, 쇼우의 이륭양행 기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1922년 4월에도 독립신문 통신원 신창희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안동에 와서 이륭양행에서 3∼4일 동안 체재하였다. 6월에는 독립운동가 임득산이 이륭양행에서 머물렀다. 7월에도 임시정부의 통신원 최석순, 광복군총영의 통신부장 김창의와 김세창 등이 상해에서 건너와 이륭양행에 4∼5일간 체류한 뒤 관전현으로 갔다. 10여일 후 그들은 다시 돌아와 이륭양행에서 3일간 묵다가 상해로 떠났다. 김창의는 1921년 1월 평안북도 철산군의 친일부호 오희원의 정부를 처단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독립신문 안동지국장으로 1920년 평안북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안동으로 돌아와 이륭양행에 머물기도 하였다.
둘째, 쇼우의 이륭양행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를 보관·전달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21년 5월 중순경 철혈광복단원 황성임은 단장 황일청과 부단장 이태영에게, “김수인과 김창선이 국내에서 군자금 2∼3천 원가량을 모집해서 상해로 갔는데 그것이 개인 혹은 민족을 위해 갖고 간 것인지 여부를 알려줄 것, 동양평화를 위해 폭탄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황일청이 만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옴스크로부터 3개를 구해서 이태영으로 하여금 안동으로 운반해줄 것” 등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황성임은 이륭양행의 중국인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상해에서 건너간 이태영을 만나 옴스크로부터 입수한 폭탄 2개를 건네주었다.
1923년 1월 의열단의 황옥·김시현 등이 추진했던 국내 거사계획(일명 ‘황옥사건’)에도 쇼우의 이륭양행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천진에서 안동으로 무기와 문서를 운반한 뒤 신의주 기생들을 이용하여 국내로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경이 황옥 등의 행적을 밀탐한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바람에, 3월 19일 서울에서 관련자 18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경찰은 “이륭양행 주인 쇼의 행동 및 동 양행 출입자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황옥·황종우·김시현 등에 대한 감시에서 그들의 계획을 적발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일제가 쇼우와 이륭양행을 감시했음에도, 그가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을 원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2월에도 장인수·김용원·김동일 등 임시정부 요원들은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해 상해와 안동 사이를 왕래하면서 폭탄 등의 무기를 운반했다.
대한통의부·정의부 등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도 이륭양행을 거점으로 삼아 무기와 탄약을 전달했다. 1924년 초 통의부가 이륭양행에 파견한 특파원 박창열·김규일이 쇼우의 중개로 모젤권총을 입수하고 있는 상황이 일제에 의해 포착되었다. 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에 진입하기 쉬운 압록강변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였다. 이들 근거지 사이의 연락을 위해 통신원 혹은 특파원을 파견했는데, 그 통신 연락의 거점 가운데 하나가 이륭양행이었다. 박창열 등은 압록강 결빙기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변장 행동과 휴대에 편리한 모젤권총을 입수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에 쇼우는 일본인 총기 밀수입자와 상해의 독일 상인으로부터 모젤권총을 매수해서 넘겨주기도 했다.

조지 루이스 쇼우에 대한 일제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 (1924.3.12.)

©국가기록원

셋째, 쇼우의 이륭양행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활용되었다. 1921년 9월 이륭양행에서 거주하던 임시정부 통신원 오인석은 1천 원짜리 독립공채 10매를 받았다. 오인석은 이륭양행 사원 김문규에게 안동의 재산가인 장희봉과 장기식에게 각각 독립공채 7천 원과 2천 원을 사달라고 통지했으므로 교섭해 달라고 의뢰하였다. 김문규는 두 사람이 상업으로 수 만원의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공채 매각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거부했지만, 오인석이 재차 의뢰하자 결국 받아들였다. 김문규는 중국 요리집에서 장희봉을 만나 공채권 7매를 제시하면서 태평양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할 비용으로 충당하려 하니 7천 원을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장희봉은 이에 대해 통지를 받았으나 현금이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문규는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즉석에서 거절하면 서로 면목이 없으니 가을 추수 후에 상봉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어 김문규는 장기식을 만나 2천 원을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당했고, 이 사실을 오인석에게 알려주었다. 비록 이 건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임시정부 통신원과 이륭양행 사원 김문규가 서로 협력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쇼우를 되새겨 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쇼우는 일제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20년 7월 11일 일경에 의해 쇼우는 체포되고 말았다.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채 안동에서 신의주로 일본인 처 사이토 후미와 두 아들을 맞이하러 갔다가 일제 측의 밀계에 걸려 ‘내란죄’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쇼우는 영국과 일본 양국 정부의 타협으로 보석금 1500원을 내고 11월 19일 3개월여 만에 석방되었다.
쇼우는 이날 오전에 출감해서 서울주재 영국부영사에서 대련주재 영국대리영사로 부임하는 커닝햄(Wilfred B. Cunningham)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후 9시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안동주재 미국영사와 중국 해관 직원을 비롯해 수많은 동·서양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항내에 정박 중인 기선들도 기적을 울려 그를 맞이하였다. 다음날인 11월 20일 저녁 안동거주 서양인들은 만찬회를 열어 쇼우의 석방을 축하해주었다. 쇼우는 이 자리에서 체포로부터 석방에 이르기까지 3개월간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런 다음 “나는 금번 한국인의 제반 운동에 대하여 무형의 감을 많이 받았다. 장래에도 더욱 정의를 위하여 원조하기를 결심하였다”고 밝혔다. 향후에도 정의를 구현하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려는 의지를 거듭 드러낸 것이다.
쇼우가 1921년 1월 26일 상해를 방문하자 임시정부도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환영연을 베풀었다. “한국독립에 큰 동정을 품은 자라는 죄목의 혐의 하에서 피포被捕한 사람, 즉 과거 왜 총독倭總督의 머리 아픈 큰 문제가 되었던, 또는 중국에 소재한 영국원동상업회가 총회까지 열어 일본의 무리無理를 항의하기로 결의되었든” 쇼우가 도착하자, 때마침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안창호 등은 그를 위해 환영연을 베풀었다고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자는 알려준다.
의열단 출신의 사회주의혁명가 김산(장지락)도 구술기록 ‘아리랑’에서 쇼우를 높게 평가하였다. “임시정부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어 그를 환영하였다. 샤오(쇼우)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지금 어디에서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한국인은 이 아일랜드인을 사랑하며, 그는 이제 우리 혁명운동의 전통이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이륭양행은 1938년 5월 복주로 옮겨가게 되었지만, 쇼우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1943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한국 독립운동에 쇼우가 크게 공감한 까닭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우러나오는 인류애의 발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계인과 소통하며 광복의 날을 열었던 가시밭길 독립운동의 길과 정신을 오늘 새겨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