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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터와 길

한중우의의 상징, 추푸청과 그 가족들

독립의 터와 길

한중우의의 상징, 추푸청과 그 가족들

거액의 현상금이 아닌 의리와 신의로 한국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도운 추푸청과 그 가족들의 헌신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글. 김대용(국민대학교 문학박사)

추푸청 初輔成
1873~1948

상하이에서 자싱으로 탈출하다

1919년 4월 11일,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상하이上海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장 폭탄투척 의거를 단행했다.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은 의거 바로 다음 날부터 프랑스 조계로 진입해 임정 사무소의 문서들을 탈취하고 대대적인 한인 검거에 나섰다. 일제는 의거 배후 색출을 빌미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일망타진하려는데 혈안이 되었다. 위급해진 임정은 더 이상 상하이에서 활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13년간 활동했던 상하이를 떠나 긴 장정의 길로 들어섰다. 임정의 고난의 시기이자 이동의 시기, 유랑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한인애국단장으로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백범 김구는 거사 직후 엄항섭, 안공근, 김철과 함께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약 20일간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해 상하이에 거주한 한인들이 무고하게 일제 당국에 체포된 소식을 접한 김구는 이들의 구명 활동과 함께 5월 8일 의거의 진상을 밝히는 공개서한을 작성했고, 이는 중국 신문인 《신보申报》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후 일제 경찰에 은신처가 노출되자 김구는 피치 부인 제랄딘과 부부로 위장하여 피치가 직접 운전한 차를 타고 상하이를 무사히 탈출했다.
김구는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으로 향했다. 이곳의 피난처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추푸청初輔成(1873~1948)이다. 그는 자싱현 출신으로 일본 도쿄東京 토요대東洋大를 다녔으며, 1905년 쑨원孫文과 함께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창립해 혁명활동에 참여했다.

추푸청 初輔成
1873~1948

신해혁명 이후 저장성장을 역임했고, 상하이전절공회上海全浙公會 이사장을 맡아 저장성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2년에는 상하이 법과대학 총장과 항일구원회 회장으로 활동한 애국인사였다.
한국의 젊은 청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항일抗日을 한중 공동 목표라 자각한 국민당 정부는 임정 지원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섰다. 특히 한인애국단의 의거 결행을 주도한 김구와 임정 요인들을 일제의 추적과 감시로부터 보호ㆍ후원하기 위해 은신처를 마련했다. 또한 당시 국민당에 들어가 임정과의 교섭활동을 벌인 박찬익이 평소 친분이 있던 추푸청에게 도움을 요청한 노력도 작용했다.
자싱에 도착한 김구는 추푸청이 소유한 면사공장 수륜사창秀綸沙廠에 머물다가 추푸청의 수양아들 천동성陳棟生의 집인 메이완가梅灣街 76호로 옮겨 지냈다. 이때 ‘장진구張震球’ 또는 ‘장진張震’이란 광둥廣東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피신 생활을 이어갔다. 자싱에 먼저 와 있던 이동녕ㆍ김의한ㆍ박찬익ㆍ엄항섭ㆍ이시영 등과 그 가족들은 김구의 거처에서 200여 m 정도 떨어진 르후이교日暉橋 17호 건물에 기거하였다.
일제의 서슬퍼런 추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던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기꺼이 피난처가 되어준 중국인 추푸청과 그 가족들의 용기로 5,000km에 달하는 이동의 고난을 이겨내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중국에서 지속해 나가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추푸청 가족들(1933)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거액의 현상금이 아닌 김구와 임정 요인들을 선택한 추푸청과 그 가족들

일제 당국은 김구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처음에 20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던 일제는 김구 체포에 아무런 소득이 없자 다시 일본외무성 20만원, 조선총독부 20만원,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 20만원을 합해 총 60만원으로 올렸다.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내걸자 일제 경찰뿐 아니라 많은 밀정과 첩자들이 김구 체포에 사냥개처럼 달려들었다. 1930년대 초 중국 자싱과 난징 등지의 한 달 노동자 임금이 30원 정도였으니 60만 원이면 엄청난 거금이었다. 시각에 따라 의견은 다르지만 현재 가치로 비교할 때 약 100~2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은신처를 제공한 추푸청과 그 가족들도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을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푸청과 장남 추펑장褚鳳章, 양아들 천동성, 며느리 주자루이朱佳蘂蕊와 그 일가의 보호와 지원이 있었기에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 김구는 물론 임정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이 가능할 수 있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아닌 의리와 신의로 한국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도운 추푸청과 그 가족들의 헌신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싱에서 김구가 머무른 천동성의 별채는 난후南湖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2층 침실의 바닥 한쪽 구석에 비밀통로를 만들어 위험이 닥치면 언제든 배를 타고 탈출하기에 적합한 가옥으로 개조되었다. 지금의 호수 풍경은 한가롭고 평화스럽게 느껴진다. 당시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쫓기는 신세가 아니었다면 일상에서 이러한 풍경을 즐기는 삶이었을 것이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김구의 묘연한 행방을 찾아 일제는 백방으로 뛰었고, 수백의 밀정과 첩자들을 동원해 전방위적으로 수색해 왔다. 일제 경찰이 김구의 피난처를 급습하자 추푸청은 며느리 주자루이(추펑장의 부인)의 친정인 하이옌海鹽의 재청별서裁靑別墅로 김구를 피신시켰다. 재청별장은 주자루이의 조부인 주빙셔우朱丙壽가 1916년 그의 둘째 아들의 요양을 위해 만든 곳이며, 남북호南北湖 풍경구風景區에서 첫 번째로 건립된 근대식 별장이었다. 추푸청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구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돈의 집안까지 끌어들였던 것이다. 1932년 7월경 주자루이와 함께 배를 타고 하이옌으로 이동한 김구는 남북호에 도착한 뒤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걸어서 이동했다. 당시 동행한 주자루이는 출산한 지 얼마되지 않은 몸으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힘겹게 산길을 올랐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독립이 된다면 주씨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은 물론이요, 우리 동포가 모두 감사해야 할 것이다. 활동사진을 찍어두지 못했기 때문에 글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김구 피난처와 연결된 난후

김구는 주자루이와 재청별장으로 가는 일화를 백범일지白凡逸志에 회고했다. 그의 말처럼 동영상으로라도 남기고 싶은 감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장면이다. 현재 중국의 풍경명승구로 지정된 천혜의 자연 풍광이 펼쳐진 이곳에서 김구는 주자루이의 보호를 받으며 6개월간 머물렀다. 그에게도 집요하게 추적해 오는 일제의 포위망으로부터 잠시나마 위안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중국 경찰에게 신분이 노출되면서 다시 자싱으로 돌아갔다.
광둥 사람으로 행세한 김구는 중국어가 서툴러 늘 아슬아슬할 때가 많았다. 주펑장은 김구에게 중국인으로 완벽하게 위장할 방안으로 중국 여인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때 만난 인연이 37살 나이 차가 있는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였다. 가짜부부였지만 김구는 주아이바오와 배를 타고 남호로 나가 잠깐이지만 긴장을 내려놓고 한가한 순간을 즐겼다고 한다.
상하이에서의 체포 위기를 어렵게 벗어난 김구는 추푸청과 그 가족들의 배려로 자싱에서 숨어 지내며 존폐 위기에 있던 임정을 다시 강화해 나갈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이자 수호자들이었다. 이를 인정한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추푸청에게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아름다운 한중우의의 상징으로 남아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정식 수교 이후 다방면에서 양국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엄밀히 따지자면 중국 본토를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 정부를 말한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후에도 수많은 한인들이 중국 본토에 남아 있었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중국인들도 그대로였다. 지금 그 후세들도 중국 본토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의 압박과 거액의 금전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위기에 처해있던 임정을 지원하려는 일념으로 피신처를 찾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철저하게 보호한 추푸청과 그 가족들의 성의는 양국의 관계보다 더 두터운 신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소중한 인연은 당시의 화제로만 회자되지 않고, 훗날 추푸청 후손과 김구 후손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1996년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은 하이옌을 방문하여 선의의 손길로 도와준 중국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음수사원飮水思 한중우의韓中友誼’라는 글을 남겼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의 우의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한중 관계의 지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현재 김구 피난처인 재청별장에 비석으로 새겨져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아름다운 한중우의의 상징으로 깊게 각인되고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전세계를 무대로 전개되었고, 지리적ㆍ전략적 이점에 따라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 중국이었다. 이렇듯 중국에는 483개소의 독립운동 사적지가 확인되고 있다(『2022년 국가보훈부 보훈연감』 통계 자료). 임정이 항저우에 3년 반을 머무르는 동안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와 체포로 흩어져 몸을 숨겨야 했다. 이들이 거쳐간 장소들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자싱과 하이옌의 김구 피난처와 임정 요인들의 숙소는 우리나라 문화재에 해당하는 보호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지난 11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탐방단은 2차례에 걸쳐 상하이부터 자싱ㆍ하이옌ㆍ항저우를 거쳐 치장과 충칭의 임시정부 루트를 처음으로 탐방하여 사적지 보존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이곳의 사적지에서 중국인들의 후원과 협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듯 한중우의를 되새기며, 후세에게 한중 항일운동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보전하려는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하이옌 재청별서 내 김신의 글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