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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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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1945년 9월 3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 성명에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고함>과 당면정책 은 해방 직후 김구와 임시정부의 임정법통론에 의한 건국방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이다.

두 종류의 전단과 오식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충칭에 있었는데, 어떻게 같은 날짜의 <고함>이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인가? 주목할 점은 이 <고함>이 해방과 건국을 널리 알리는 “전단(삐라)”이라는 사실이다. 즉 국내에서 “9월 3일” 김구 명의의 <고함>을 제작하여 살포한 것이다.
현재 <고함>은 국내 몇 군데 소장되어 있는데,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 그림 1-1)는 마지막 서명부분이 균일한 활자 크기의 1줄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이며, 다른 하나(ⓑ, 그림 1-2)는 2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주석” 아래 큰 글씨로 “金九”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옆에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이란 단체명을 부기하였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에서 이 전단을 제작하여 뿌린 것임 을 알 수 있다.
해방직후의 신문들을 추적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을 확인할 수 있다. “중경 [임시]정부의 특별지령을 받는” “백창섭白昌燮(30세)” “김형극金瀅極(28세)” 등이 해방 후 서울 계동桂洞에 사무소를 설치한 후 임시정부 인사들의 환국 준비를 위해 활동하였다. 김구와 임시정부 1진은 11월 23일 환국하는데, 바로 이틀 전인 11월 21일 사무국이 계동의 다른 곳(주소: 147의 24)로 넓혀 이사가고 전화도 2대(광화문 3127과 4365번)를 설치하는 등 기구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였지만, 환국 이후 김구의 지시로 바로 해산되었다(『자유신문』 1945.11.15, 11.23, 11.24).
현재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타입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25.5×36cm), 독립기념관(25.5×35.8cm), 서울역사박물관(25.7×35.3cm)에 1점씩 소장되어 있다. ⓐ보다 작은 크기의 ⓑ타입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2점(18.9×26.0cm, 18.7× 27.0cm), 경교장 1점이 소장되어 있다. 전단은 여러 차례 제작되었던 듯 사소하지만 재미난 차이들이 있다. 예컨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소장본(그림 1-1, ⓐ)에는 <고함> 본문 2번째 줄에 “목도目睹”의 도睹가 도박賭博 등에 사용되는 “도賭”로, 정책 13조에는 편입編入이 “편인編人”으로 오식이 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에서 “목도目賭”는 오자 그대로 이나 “편입編入”은 바르게 수정되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의 활자체는 서로 다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의 ⓑ에 와서 “편입”은 바르게 수정되었지만, 목도目賭의 도賭는 “도暏”로 그릇 수정되었다. 이렇게 오자의 족보를 추적해보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소장본이 오자가 더 많 아, 역설적으로 전단의 원조로 추정된다.

그림1-1.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소장): “目賭” “編人”

그림1-2.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目暏” “編入” “大韓民國臨時政府 特派事務所”

그림 2-1. 「자유신문」(1945.11.8.)

11월 5일 충칭 출발 직후의 신문보도

이 전단 <고함>이 언제 얼마나 뿌려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단의 내용이 국내 언론에 보도 된 것은 11월 5일 김구와 임정요인들이 충칭을 출발하여 귀국 도정에 오르고 난 이후이다. 즉 김구와 임정 요인의 귀국이 소문이 아니라 실제 진행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여, 9월 3일자 <고함>의 내용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던 것이다. 우파의 신문인 자유신문은 11월 8일 1면 1~8단(그림 2-1)에 걸쳐, 중도를 지향하는 『신인민보』는 11월 11일 1~7단(그림 2-2)에 보도하였다. 이 단계에서 “목도” “편입”의 오식도 바로 잡았다.

<고함>과 현단계

“친애하는 국내외 동포 자매형제여”로 시작하는 <고함>은 일자일획에 조직검사가 필요한 명문이며, 김구와 임정의 정세인식을 엿볼 수 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소장본(그림 1-1)을 저본으로 내용의 구체적 묘미를 약간이나마 음미해보고자 한다.
1) “파시스트”로 시작하는 첫 번째 문단은 “일본 제국주의자가 9월 2일 항복문서[降書]에 서명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날 도쿄만의 미주리함 갑판에서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시게미츠는 1932년 4월 27일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오른쪽 다리를 부상당했고, 9월 2일 의족으로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현재 한국도 일본도 “8월 15일”을 “해방” 또는 “종전일”로 기념하지만, <고함>은 9월 2일을 특정하였다. 그리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참모총장 허잉친何應欽이 일본군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은 9월 3일 이 <고함>을 발표하였다.
2) “일국의 흥망과 일민족의 성쇠”로 시작하는 2번째 문단은조국 해방의 동력을 “허다한 우리 선열의 보배로운 뜨거운 피[寶貴한 熱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英勇한 전공戰功”이라 규정하였다. 동맹군(연합군)의 순서를 미·소가 아니라 중국을 선두로 하고 있다. 이것 역시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권의 지원 아래 독립운동을 한 김구와 임정의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세 번째 문단은 김구와 임시정부의 건국론, 즉 ‘임정법통론’에 의한 ‘현단계’가 언급되어 있어 <고함>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처한 현단계는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하는 과도적 단계이다. 다시 말하면 복국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이다.

1941년 11월 28일 발표한 임정의 <건국강령>은 삼균주의에 의한 신민주국 건설을 위해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각각 3기로 나누어서 정리했다. 복국은 임시정부가 일제와 전쟁을 선포·수행하는 1단계, 임시정부가 국내 일부 영토를 회복하여 국내 통치가 시작되는 2단계, 국토와 인민을 완전 해방하여 전체를 탈환한 3단계로 되어 있다. 1945년 9월 3일 당시는 임정이 아직 국내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복국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한” 상태로 규정하였다.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조와 임정법통론

<고함>은 임정이 귀국하여 복국을 마무하고 건국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는데, 그 구체적 건국방안을 정리한 것이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조이다. 그것은 아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본 임시정부는 최단[最速] 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 ]는 원문)

무주공산처럼 보이는 해방정국에서 정치인과 집단의 귀국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임정이 복국의 단계를 마무리하고 건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속한 귀국이 선차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천명한 것이 1조인데, <고함> 발표 81일 이후인 11월 23일에야 김구와 임정 1진이 김포비행장을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2-5조는 국제문제이다. 2조에서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피로써 싸운[血戰한]” 연합국의 순서를 중국을 선두로 “중· 미·소·영”으로 하면서 유엔 헌장[聯合國 憲章]을 존중한 것, 3조에서 위 4개국에 프랑스[法]를 더하여 “5강”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 역시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권의 지원 아래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징을 나타낸 국제인식이다.
6-9조는 국내 정치와 건국론으로 임정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요약하면 임정이 귀국하여 국내 일체 질서와 대외 일체 관계를 책임지고 유지하면서(9), 국내의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 집단, 각 지방 대표와 저명한 각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고(6),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되면 임시정부의 일체 직능 및 소유 물건을 과도정권에게 넘기며(7), 이 과도정권에 의해 전국적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정식정권을 수립하며(6), 정식 정권은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하는 삼균주의에 의하여 조직할 것(7)이라 규정했다. 이러한 수순이 바로 임정법통론에 의한 건국론이다.
10~14조는 해방 이후 시급한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당시 광범위하게 요구되는 보편적인 원칙을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2. 「신조선보」(1945.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