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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항일가극 ‘아리랑’과 한형석의 예술구국투쟁

임시정부의 인물들

항일가극 ‘아리랑’과 한형석의 예술구국투쟁

한형석은 비록 무기 대신 예술로 적과 싸웠지만, 그가 이룬 유무형의 자산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의 대일항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 글. 양지선(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관)

한형석은 1910년 아버지 한흥교와 어머니 이인옥의 둘째 아들로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한흥교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한형석은 6살이던 1915년 5월 가족들과 함께 부친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부친과 재회한 한형석은 곧 귀국하였다. 하지만, 1917년 다시 한흥교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면서 동성소보방호동東城小報 房胡同 18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혁명가 부친을 보고 자란 한형석의 민족의식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학교에 진학한 후 중국학생들로부터 ‘망국노’라는 조롱을 받을 때면 남몰래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와 같이 나라 찾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편, 1926년 조부 한규용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한형석의 가족들은 모두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 막 육영소학교育英小學校를 졸업하고 로하중학潞河中學에 다니던 한형석은 홀로 베이징에 남아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1929년 8월 로하중학을 졸업한 후 한형석은 베이징을 떠나 재중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상하이 로 향했다.
상하이에 온 한형석은 한흥교가 동제사同濟社 시절부터 친분을 쌓았던 조성환曺成煥을 찾아 구국투신의 뜻을 밝혔다. 조성환은 한형석에게 특기를 물었고, ‘음악’이라고 답하는 그에게 예술을 통한 구국운동을 권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백만 대군보다 민족의 단결이 앞서야 하며, 민족의 정신무장을 위해서 정신생활에 더 자연스럽고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음악과 연극 등의 예술활동이 필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형석은 조성환과의 만남을 계기로 음악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게 되었고, 이에 상하이 신화예술대학新華藝術大學 예술교육과에 입학해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3년 신화예술대학을 졸업한 한형석은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산동성 제남 당읍현山東省 濟南 當邑縣을 거쳐, 1934년 산동성립여자사범부속소학교山東省立女子師範附屬小學校(이하 여자사범부속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사범부속학교 시절 교사를 신축할 때, 한형석은 아동극장도 함께 건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한형석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중국 최초의 아동극장이 여자사범부속학교에 들어섰다.

한형석(위)과 나월환(아래)

©한종수

아동극장을 완공한 후 그는 직접 아동극을 만들어 무대에도 올렸다. 바로 《여나麗娜》이다. 공연에서 그는 연출은 물론 폴란드 노음악가의 역할을 직접 맡아 열연하며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여나》 공연 후 한형석은 예술구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예술구국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내 많은 희극예술가들은 예술로 항일전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앞다투어 연극대와 극사劇社를 조직하였다. 한형석 역시 산동지역의 예술인들과 함께 중국희극학회에 참여하였다.
한형석은 중국희극학회의 제2항일연극대장으로서 대원 40여 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옮겨가며 대일활동을 전개하다 최전선인 시안西安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도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공연을 할 수 없거나 전세가 급박해질 때면 전투병으로 전선에 나가 직접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1939년 6월, 제34 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으로 임명된 한형석은 중국군의 희생이 컸던 중조산 전투中條山 戰鬪2)에서도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중국 제34집단군 총사령 호종남胡宗南이 중국희극학회에 전시공작간부훈련 제4단(약칭 간4단)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중조산 전투에서 돌아온 한형석은 진성陳誠 군사부장으로부터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전 시공작간부훈련단 특과총대 제2대대 예술반 음악조 소교小校(소령) 교관으로 임명되어 간4단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간4예술반 1기생들과 함께 극단을 조직하고 예술을 이용한 구국활동에 집중하였다.
그런데, 한형석이 예술반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던 1939년, 간4단 내에 한인들을 위한 특별반이 조직되었다. 아나키즘 계열의 한국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약칭: 전지공작대)를 위해서였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충칭에서 조직되었으며, 대장 나월환羅月煥 이하 부대장, 정치조장, 군사조장, 선전조장, 대원 30여 명이 있었다. 이들은 ‘한중혁명韓中革命을 위해’ 시안으로의 이동을 단행했으며, 호종남과의 교섭을 통해 간4단 내에 그들을 위한 특별반이 설치된 것이다.
한형석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전지공작대 대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간4단 교관 중 한국청년이 한명 있는데 이미 중국인이 되었다”라는 소문이 났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전지공작대 대장인 나월환이 한형석을 찾아와 “당신은 한국인이면서 왜 중국인 행세를 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대답 대신 방 안에 들어가 침대 위에 걸려있던 태극기를 보여주었다. 오해를 푼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조국의 앞날을 논의하였고, 한형석은 전지공작대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지공작대는 본래 시안을 바로 떠나려 했던 계획을 바꿔 몇 개월을 더 이곳에 잔류하기로 했다. 시안 인근 일본군 점령지를 포함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20 여만 명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초모활동을 전개해 화북지역 한인들 을 항일역량으로 포섭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한형석은 연극, 음악 등 예술을 이용한 자금모집과 교육, 선전활동 등을 계획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연극에 음악을 결합한 가극을 고안해 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음악과 연극에 대한 자신의 노하우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예술구국을 선보인 것이다.

항일가극 아리랑 포스터

©한종수

한형석은 1939년 말부터 가극 <아리랑>의 극본을 준비해, 1940년 5월 처음으로 가극 <아리랑>을 무대에 올렸다. 가극 <아리랑>은 총 4막으로 구성되었다. 제1막은 <연지화戀之火>로 목동과 촌녀의 사랑을 다루었다. 제2막은 <출국경가망出國境家亡>으로 생리사별生離死別의 참통을 그렸다. 제3막은 <타회노가거打回老家去>의 호성號聲 아래에서 한국인들이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는 모습을, 마지막 제4막은 일본의 철제鐵蹄 하에 있는 한국의 모습을 그렸다. 또 극에 맞춰 총 8곡의 음악이 삽입되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으며,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은 모두 항일전쟁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후로도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또는 전쟁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한중연대를 선전하기 위해서 등 공연은 1945년 해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0년~1944년 가극 <아리랑> 공연

번호 주최 공연 일시 장소 목적
1 한국청년 전지공작대3) 1940년 5월 21일 ~ 30일(양력) 남원문南院門
실험극장實驗劇場
전방 장병 하복마련 모금
2 한국청년 전지공작대 1940년 6월(4일간) 간부훈련단幹部訓練團의 청년노동영靑年勞動營 노군공연勞軍公演
3 한국광복군 제5지대 1941년 2월 5일 ~ 2월 22일 동대가東大街
여명극원黎明劇院
이속사易俗社
시안전쟁고아 생활비 마련 모금
4 한국광복군 제2지대 1943년 3월 1일 롱해로隴海路
예당禮堂
3·1절 기념
5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 1944년 3월 1일 ~ 3월 5일 양부가梁府街
청년당靑年堂
3·1절 기념, 중국부상병 위로

이처럼 한형석은 비록 무기 대신 예술로 적과 싸웠지만, 그가 이룬 유무형의 자산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의 대일항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켜 한중연대를 성사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실질적으로 전쟁물자 등을 지원했으며, 중국의 미래 항전 역량을 양성하는 데 일조하는 등 항일전쟁 승리에도 일정부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일전쟁기에 이루어진 한형석의 음악, 연극, 가극 등은 문화예술로서만이 아닌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하나의 투쟁수단으로도 그 효용과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1) 한유한은 한형석의 이명이다. 한형석은 독립운동을 하며 본명 대신 조국을 그리워한다(韓: 형석, 韓: 조국, 悠: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한유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2) 시안, 둥관(潼關), 뤄양(洛陽)의 북부에 위치해 있는 중조산 전투(中條山 戰鬪)에서 중국군 약 8만 명이 전사하였다. 화북 함락 후 중조산은 중국군대의 황하 이북 유일한 미함락지역으로 화북, 중원, 서북의 전략 핵심지역으로 거듭났다. 일본이 황하를 건너 시안, 충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중조산을 선점해야 했기 때문이다.
3)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합편 된 후, 1943년 제5지대는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