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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으로

특집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으로

— 글. 장석흥(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명예교수)

1920년대 독립운동계의 화두는 민족통일전선이었다. 이념과 조직을 초월한 항일전선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게 목표였다.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가 다양한 독립운동계의 이념과 조직을 아우르지 못한 때문이었다. 통일전선운동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던 상황에서 민족혁명론이 배경을 이뤘다. 이념적으로 달랐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각 진영은 서로를 경쟁적 동반자로 인식하면서 통합을 추구하고 있었다.
1920년대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 전반을 결합시키는 시도가 두 번이 있었는데,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와 1926년의 민족유일당운동이 그것이다.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된 후 3년 뒤에 다시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은 실패한 국민대표회의의 반성에서 비롯된다.
국민대표회의는 최초의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실천적 만남의 장이었다. 국민대표회의를 위한 움직임은 1921년부터 시도되었다. 안창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고 나섰다. 임시정부를 유지한 가운데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여 민족통합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민족통합을 이루기 위해 일단 각계의 인사들로 구성된 협의체를 세울 계획이었다. 1921년 2월 13명의 연서로 발표한 ‘아동포에게 고함’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공론화시키는 신호탄이 되었다. 개조파는 1921년 5월 19일 ‘국민대표회기성회촉성회’를 조직하고 20여 명의 조직위원을 선출한 다음 국내외 각처로 이 사실을 통지했다. 베이징에서는 이를 한 단계 발전시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를 발족시켜 나갔다. 그러나 1921년 가을 미국의 워싱턴회의와 러시아의 원동인민대표대회 개최가 임박해지면서, 독립운동계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면서 국민대표회의 개최 열기가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까지 63차에 걸쳐 회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두 달여 만인 3월부터 임시정부 조직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지면서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생겨났다. 창조파는 임시정부 체제를 완전 폐기하고 새롭게 대표기관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현행 임시정부 체제를 유지하자는 임시정부 옹호파도 있었다.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세력은 이렇듯 개조파, 창조파, 임시정부 옹호파로 나뉘어졌다.
개조파는 임시정부 옹호파를 회유하는 한편 설득했다. 개조파는 임시의정원의 권한으로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개정하는 등의 긴급 제의를 제출하면서 1923년 5월 4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의결이 위헌이라는 사실이 불거지면서 또다시 국민대표회의는 분란에 휩싸였다. 결국 결의는 무효로 선포됐다. 그런 상황에서 5월 16일 창조파가 ‘신기관 건설안’을 상정하며 새로운 국호와연호의 제정을 강행하자, 개조파 57명이 집단 탈퇴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파국을 맞았다. 이로써 국민대표회의는 막을 내렸다.
개조파가 퇴장한 가운데 창조파는 독자적으로 의장단을 구성하고 1923년 6월 초 국호를 제정하여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 등의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윤해, 신숙 등 50여 명은 8월 20일 경 상하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무시한 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5일까지 국민위원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국민위원회는 코민테른의 반대로 소련 국경 밖으로 나갈것을 강제당하면서, 1924년 2월 하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중국 길림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1924년 6월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인 김규식, 신숙, 지청천 등은 한국독립당 조직 안을 공포하면서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베이징 정부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8월 원세훈과 신숙, 박건병 등의 창조파 인사들은 한국독립당 조직을 내세우지 못한 채 한교동지회를 결성했다. 한교동지회는 기존의 북경한교구락부를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이들은 베이징에서 『앞잡이』를 창간하며 민족유일당운동의 조직을 역설했다. 창조파의 이런 운동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임시정부 개조에는 헌법 개정과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이 중심이었다. 1924년 6월 16일 임시의정원은 대통령 유고결의를 확정하고, 국무총리 이동녕이 대통령의 직무를 대리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을 공박했다. 그러자 8월 17일 대통령 유고에 대한 재의요구안 심의위원회가 유고를 결정했다. 1925년 2월 20일 임시의정원은 3월 10일 구미위원부를 폐지한 뒤 3월 18일 이승만을 탄핵하고 3월 23일 박은식을 신임대통령으로 선출했다. 3월 30일 헌법개정안이 임시의정원을 통과했다.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정되면서 국무령제로 바뀐 임시정부에는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됐다. 개헌과 국무령제 채택으로 임시정부의 개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임시정부는 인물난으로 내각 구성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박은식 내각에 이어, 첫 국무령에 선출된 이상룡도 결국 서간도로 돌아가고 1926년 2월 양기탁 역시 국무령 취임을 거부하는 등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계는 청년동맹회의 성립과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4년 4월 5일 조직된 청년동맹회는 각종 연설외와 토론회 등을 주최하며 이상과 주의를 선전하였다. 청년동맹회는 〈독립당대표회의안〉 등을 통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각 부문의 운동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립당대표회의의 준비가 지체되면서 1925년 봄 개최하기로 했다가, 12월 3일 독립당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공포했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상하이에서는 안창호와 여운형 등의 개조파는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에 매진했다. 1924년 초 「대동통일취지서」를 발표하며 독립운동계의 단체, 당파를 초월할 것을 촉구했으며, 7월 임시의정원에서는 상하이 청년동맹회의 주도로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런 대동 통일요구는 중국 국민혁명에 영향을 받은바 컸다. 국민혁명이란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통합해 중국 통일을 이룬 혁명을 말한다.
1926년의 민족유일당운동은 국민대표회의 이후 분열된 개조, 창조 양파가 이견을 극복하고 독립운동 진영을 통일시킬 수 있는 방안이었다.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이라는 명분이나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했던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민족혁명적인 가치를 지녔다. 1926년 통일전선운동의 흐름은 임시정부 밖에서 정당적 형태로 전개되었다. 국민대표회의 때는 임시정부의 틀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조직을 포용하려 했다면, 임시정부와 별도로 혁명당이란 틀에서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다. 거기에 국내에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민족유일당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연대해 일으킨 6·10만세운동의 소식은 해외 독립운동계를 고무시켰다.
안창호는 1926년 7월 상하이 삼일당의 연설회에서, 전 민중이 중심이 될 통일기관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안창호는 민족 당면의 최대과제는 조국 독립이므로 일단 독립을 달성한 뒤정치 이념의 차이는 해방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쏟아 붓자고 강변했다. ‘민족혁명’이란 정치, 경제, 종교적 이념의 차이를 떠나 민족 역량을 결집해 일제의 압박에서 민족의 자유를 찾자는 것이다. 민족혁명을 위한 민족대당 주창은 1920년대 후반 독립운동계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안창호는 베이징의 원세훈 등과 만나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대표회의 시절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라졌던 두 세력이 통일했음을 보여주는 발전적 현상이었다. 여기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면서 개헌을 추진해 갔다. 개헌의 핵심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이었다. 최고 권력을 정부에 두기보다 당黨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이 대독립당조직상해촉성회에 참가했으며, 이런 움직임은 광주, 무한, 난징 등지의 중국 대륙 곳곳으로 확산되어 갔다. 만주에서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들을 한데 묶는 삼부통합운동으로, 국내에서는 신간회 결성 등을 일궈냈다. 통일전선운동의 노력은 국민대표회의를 경과하고,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수렴되어 갔다. 이념과 조직을 초월한 독립운동계의 통일전선운동은 국민대표회의 때 무산되었지만, 그 실패의 경험은 3년 뒤 민족유일당운동으로 꽃피우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빛나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