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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국민대표회의의 진행과정

특집

국민대표회의의 진행과정

— 글.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시회의 개최와 집행부의 구성

1923년 1월 3일 개회된 국민대표회의는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회의로 시작된 후 연이어 정식회의가 진행되었다. 임시회의는 1월 3일부터 1월 29일까지 15차례의 회의를 통하여 임원선출, 대표의 자격심사규정과 회의규정 마련, 대표 자격심사 등을 마무리했다. 1월 31일 정식의 개막식과 함께 시작된 정식회의는 6월 7일까지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의결권을 가진 125명 외에도 방청인 100여 명을 포함하여 200여 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1월 3일 마침내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1923년 1월 3일 62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주비위원장 남형우가 대회가 성립되었다는 취지를 선포하였다. 개회 후 먼저 임시의장을 선임하고 개회한 후에 대표 자격심사와 정식 임원 선정을 마친 후에 성대한 개회식을 갖고 본회의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임시의장으로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안창호는 서기로 유선장과 배천택을 지명하였다. 임시의장 안창호가 “지금 이 시간에 조선 민족의 대표회가 열립니다”라고 선포하고, 일동이 일어나 “국민대표회 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가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1월 9일 제2일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록에 기원紀元 연호가 사용된 데 대하여, 주비위원회에서 기원과 민국 두 연호를 병기한 전례를 따르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으나, 정식 일정(안건) 포함 여부는 정식으로 선출될 간부에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보다 큰 논란은 자격심사 보고에서 일어났다. 회의의 의결 대상(9명)에 포함된 안창호에 대하여 박건병과 강구우가 미주국민회대표로 위임통치청원에 관련 혐의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자격 승인이 보류되었다. 안창호가 1월 10일 임시의장 사면과 퇴석 통고서를 제출하여 안창호의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토론이 진행되었다. 결국 1월 11일 안창호의 대표자격이 인정되고 임시의장 사면서와 퇴석 통고서 역시 반려되었다.
안창호가 1월 16일에 다시 출석하여 임시의장에 복귀하였다. 1월 17일에는 전체 회의 규정안을 통과시켰다. 1월 18일에는 회의 규정에 따라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와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1월 19일에는 비서장에 배천택, 비서에 김우희, 오창환, 박완을 선출하였다.
1월 3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최로 약 90명의 대표들과 일반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순국제현의 추도회가 삼일당에서 개최되었다. 의장 김동삼의 식사에 이어 신숙의 추도문 낭독, 김순애, 정학수의 추도가 병창에 이어, 남형우, 윤해, 손정도, 박응칠 등이 추도사를 하였다.

정식회의의 개최

1월 31일 오후 2시부터 공동조계 모이당慕爾堂에서 대표 88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의 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일반 동포에게도 참관이 허락되었다.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장 남형우가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동기와 취지를 말하고 주비 후 2년 만에 개최된 사실과 향후 회의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였다. 의장 김동삼의 주재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부의장 윤해의 독립선언서 낭독, 3·1독립가 합창, 각지로부터의 축전 낭독이 있었다. 의장 김동삼의 개막사에 이어 신숙, 강석훈, 안창호, 김마리아 등의 연설이 끝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만세 삼창을 하고 폐회하였다. 저녁에는 오후 7시부터 상하이 교민단장 도인권이 발기한 대표자들을 위한 환영회가 삼일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2월 2일 회의부터 시작된 회의는 공동조계 침례당에서 개최되었다. 1월 29일에 보고된 의정기초위원의 보고를 듣고 토론 후 전부 통과시켰다. 통과된 의정은 다음과 같다.

1. 선언 및 선언, 2. 서면 보고(국민대표회 주비회 경과 사정 보고,각 지방 및 단체의 사정 보고), 3. 시국문제, 4. 독립운동대방침(군사, 재정, 외교), 5. 생계문제, 6. 교육문제, 7. 노동문제, 8. 국호 및 연호, 9. 헌법, 10. 과거문제(위임통치청원사건, 자유시사변, 40만 원 사건, 호림虎林 밀산密山 사건, 관전寬甸 통의부사건, 기타 사건), 11. 기관조직, 12. 신사건, 13. 선포

2월 3일에는 분과 배정의 위임을 맡은 위원의 보고에 의하여 8분과를 6분과 2위원회로 수정하여 통과시켰다.(6개 분과: 군사, 재정, 외교, 생계, 교육, 노동. 2개 위원회: 헌법기초위원회, 과거문제조사위원회) 이날 회의부터 분과와 위원회 위원 선출을 시작하여 2월 6일에 마쳤다.
2월 20일 선서 및 선언식 거행 절차가 결정되었고, 주비회 사무를 대표회의에서 인계˜수행하기로 하였다. 2월 21일에는 선서 및 선언식을 거행하였는데, 비서장이 선서문을 낭독하고 출석한 98명의 대표들이 서명하였다. 신병 또는 사고로 출석하지 못한 대표들을 추후 서명하기로 하였다.
2월 22일 회의에서 간부들이 제출한 예산안이 제출되었는데 대회 일정을 총 45일로 예상하고 총예산은 8천 원이었다. 이는 한형권이 8천 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데 따른 예산이었다. 주비위원회 위원장 남형우를 대신하여 신숙이 주비회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2월 23일부터 3월 3일까지 각 지방과 단체의 서면보고(낭독)가 진행되었다. 3월 5일부터 6일, 8일, 9일에 걸쳐 시국문제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개조론과 창조론의 대두

3월 9일의 시국문제 토론에서 윤자영 등 18명이 연서로 제출된 제의안을 비서장이 낭독하였다. 3개항으로 된 이 제의안은 다음과 같다.

1.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독립운동으로써 세계 피압박민족의해방운동과 동일한 전선을 만들기로 함
2.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운동을 혈전에 주중主重하야 조직적으로 진행할 일
3. 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 헌법, 제도 및기타 일체를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일


이 가운데 제2항의 경우는 대표들간에 이의가 없었으나, 제 1항의 경우 구미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제3항으로 임시정부 개조론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이른바 임시정부 계통론(법통론)의 입장이었다. 이 제안은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을 건설하려는 창조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3월 12일 회의에서는 시국문제에 대한 논의를 정지하고 제출된 의안에 대하여 토론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김우희가 제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는 윤자영 등이 제출한 개조론(제1의안)에 맞서 제출한 것으로, 제2항에 “과거 5년간에 조직된 각 기관 및 각 단체는 그 명칭의 고하와 시설의 광협廣狹을 물론하고 일절 폐지하야 본회의에서 우리 운동에 적합한 헌법으로 통일 기치 하에 일신 조직할 일”이라고 명시했다. 임시정부를 대신하여 새로운 중앙기관을 조직한다는 것, 즉 창조론을 제기한 것이다.
윤자영 등이 제출한 제1의안을 상정˜토의하였는데 1개항씩 분리˜토론하여 의결하기로 하였다. 3월 13일 유시언 등 19명의 제의안(제3의안. 철저한 독립 정신 하에 민주공화의 국시를 확인하여 국민의 의사를 집중하기를 결의함)과 박건병 등 44명의 제의안(제4의안. 혈전주의를 수립하야 폭력의 수단과 급진의 보조로서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함)이 제출되었다.
윤자영 등의 제의안(제1의안)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제2항을 “우리의 독립운동으로써 혈전을 주중主重하야 조직적 계획 하에서 급진적 보조로써 진행할 일”로 수정하여 통과시켰다. 이어 의장 김동삼이 윤자영 등의 제의안 가운데 제3항(임시정부 개조안)에 대한 토론이 있을 것임을 선포하자, 원세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엇을 개조한다고 하는 본안은 헌법 기초라는 항목을 넣은 본회의 의정에 위반이 됨”이라고 하여 의안 상정을 반대하였다. 이후 토론이 진행되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정회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최대 다수인 105명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임정개조론의 통과를 둘러싼 양파 대표들이 대거 참석한 탓이었다.
이어 3월 14일, 15일, 16일, 20일에 계속된 회의에서도 제1제의안 3항(임시정부 개조론)의 상정에 대한 반대론이 지속되었다. 이로부터 회의는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대표들(개조파)과 이를 반대하려는 대표들(창조파)로 나누어져 논쟁이 지속되었다.
의장 김동삼이 제1제의안 제3항을 상정하여 제안자에게 설명하도록 했으나 회의장이 소란해져 정회되고 말았다. 이후 며칠 동안 개회하지 못하였고 타협을 위해 3월 28일부터 4월 10일까지 10여 차례의 비공식회의를 열었으나 양측간에 임정개조안에 대한 논전이 있었을 뿐이다.
4월 11일에 재개된 회의에서 여운형 등 5명이 시국문제에 관해 제의한 바(제5의안) 그 내용은 “본국민대표회의는 내외 각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야 하나의 대독립당大獨立黨을 조직하기로 결의함”이라는 대독립당 조직안이었다. 개조, 창조 양파가 심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제3의 방안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임시정부 개조안으로 촉발된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을 잠정적으로 미루고자 대표회의 간부들이 비공식회의를 통하야 준비한 일시적 타협안을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즉, 임시정부 개조안을 둘러싼 쟁점을 미루어두고 독립운동 대방침(군사, 재정, 외교), 생계문제, 교육문제, 노동문제를 처리한 후에 국호 및 연호, 헌법, 과거문제, 기관조직, 신사건, 선포 등의 예민한 문제를 다루자는 제안이었다.
4월 15일부터 5월 10일까지 각 분과와 위원회에서의 보고와 안건들을 토론하고 통과시겼다. 5월 11일 의정 가운데 독립운동대방침 이하 각 분과 의안이 종료됨을 선포하고 시국문제를 다시 토론할 것을 선포하였다. 제안된 안은 모두 4개로 윤자영 등의 임시정부 개조안, 김우희 등의 신기관 건설안, 박건병 등의 국시 확립안, 여운형 등의 신독립당 조직안이었다. 이 가운데 신숙이 제안자를 대표하여 박건병 등의 제의안을 취소하였다.

개조파 대표들의 탈퇴와 대표회의의 파열

5월 12일 개조파 31명의 대표들이 출석하지 않고 제출한 휴회청원이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창조파의 정인교가 긴급제안으로, 시국문제는 이미 결정한 양안(윤자영 등이 제안하여 수정통과된 제1항, 제2항)으로 종결하고 기타 제안중 제안자 또는 찬성자로부터 취소한 것 이외의 모든 제안을 일절 기각하기로 하였다. 이는 사실상 윤자영 등이 제안한 임정개조안의 폐기를 의미하는 제안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김우희의 신기관 건설안은 동의자 오창환이, 여운형 등의 신독립당 조직안은 여인빈이 취소하였다. 정인교의 긴급제안은 다음 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하였다.
5월 15일 의장 김동삼, 비서장 배천택, 헌법기초위원 이진산 등의 사면청원서와 소속단체인 서간도군정서 및 한족회의 대표소환 통고서가 낭독되었다. 이후 차점자를 승임하기로 결정하고 의장에 윤해, 부의장에 신숙, 비서장에 오창환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창조파 대표들이 대표회의 간부진을 공식적으로 전면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5월 12일 회의에서 제기된 정인교의 긴급제의에 대하여 오영선, 백남준, 서보라, 선우혁, 윤자영, 조상섭, 김상한, 윤경일 등이 격렬한 반대론을 제기하여 회의가 정회되었다. 이들은 “시국문제를 더 토론치 말자 함은 이는 분규의 문제를 바로 해결치 아니하고 2개의 정부를 산출하자 함”이라며 주장했다.
이후 개조파가 회의에 불참하게 되면서 대회의 파열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개조파의 국민대표회의 탈퇴는 5월 16일 회의에서 10명의 개조파 대표들이 탈퇴를 성명하고 퇴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침내 5월 18일 신임 의장 윤해가 사회를 보게 된 회의에서 앞서 탈퇴, 성명한 10명을 포함한 41명의 대표들이 회의를 부인하는 통고문을 보내왔다. 그 취지는 “통일의 유일 방침인 개조안이 기각되고 국호, 연호를 새로 정하면 이는 일 민족에 양개 국가를 형성하야 가공可恐의 화근을 뿌리내리는 것이니 이 현상으로는 회의를 더 진행할 수 없다”였다.

창조파 단독에 의한 새로운 중앙기관(국민위원회)의 창설

5월 19일 개조파의 반발과 대회 탈퇴를 불러왔던 정인교의 긴급제의가 가결되고 의정순서에 따라 국호문제에 대한 제의를 받아 국호를 ‘한韓’으로 하자는 안이 제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총리 노백린과 창조파 윤해, 개조파와 창조파의 쌍방회의, 임정, 창조파, 개조파 간의 ‘3방회의’도 시도되었으나 타협에 도달하는데 실패했다.
6월 2일 회의에는 개조파 45명이 연서한 제2차 통고문, 그리고 부의장 안창호의 통고문이 접수되었다. 개조파의 제2차 통고문은 “소수 대표의 편파적 회의는 국민대표회의로 인정하지 않노라” 하였고, 안창호는 “비공식회의로써 양방의 원만한 타협을 구함은 가하되 일부의 대표만이 그냥 정식회의를 진행하야 국호, 연호, 헌법 등을 작정함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로써 대표회의는 최종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마침내 이날 회의에서 총 47명의 대표가 출석한 가운데 국호를 ‘한韓’으로 연호는 ‘기원’을 쓰기로 가결하였다. 6월 5일에서 헌법기초위원의 보고가 있었고 수정위원 10명을 선출하였고, 기관조직 인선 전형위원 9명을 선출하였다.
6월 6일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김구 명의로 “국민대표회가 6월 3일 연호 및 국호를 따로 정하는 것은 민국에 대한 모반”이라고 하면서 “6월 2일 이후의 일체 불법행위의 철폐를 명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각 해산을 명한다”고 했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노백린, 내무총장 김구, 외무총장 조소앙, 법무총장 홍진,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국무원 포고문을 발표하여 “정부위에 정부를 중첩하는 반역을 범한 것”이라며 창조파의 신기관 건설을 공격하였다.
결국 국민대표회의 잔류파(창조파)는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6월 7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5명 가운데 4명(내무 신숙, 외무 김규식, 군무 이청천, 재무 윤덕보), 그리고 고문 31명을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국내외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킨 채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