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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온 소식

국민대표회의의 선택,
개조냐 혹은 창조냐

상하이에서 온 소식

국민대표회의의 선택,
개조냐 혹은 창조냐

“아, 국민적 대단합이 이에 완성되었다. 운동의 신국면이 이에 전개되었다. 우리 전 국민은 다 나아가 동일한 주장과 방침에서 일치 진행할 것이다.”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3년 1월 상하이에 모인 국내외 단체의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모색하고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자 하였다. 이는 퇴색되어 가던 3·1독립 정신을 재현시키고자 했던 유사 이래 첫 국민적 대회합이었다. 이 글은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시대적 배경과 60여 일 동안 회의가 지속하였지만, 결국 결렬되는 과정을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살피고자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한성·상하이·연해주 등지에 세운 여러 임시정부를 한뜻으로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재탄생하였다.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중추적 소임이 주어졌다. 이를 통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하여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다.
임시정부는 통일·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 등 다양한 방략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특히 안창호 주도로 설치한 연통제와 교통국은 국내와의 통신 연락과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선전 활동과 군자금 모집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1920년에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여 북간도·서간도의 독립군 단체를 군무부 산하로 편입하여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통제와 교통국은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1921년 후반에 소멸하였고, 봉오동 전투 이후 1920년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계속된 일제의 간도참변에 독립군 기지 역할을 하던 한인촌은 쑥대밭이 되었고 많은 한인은 학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간도 침략에 독립군 단체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한 뒤로 통합부대 편성과정에서 내분 유혈사태가 벌어져 무장투쟁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독립전쟁론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더하여 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성과에 대한 실망, 재정 부족에 따른 활동 위축과 독립운동가의 생계 곤란 가중, 내부 분열과 지역색 갈등, 사상 대립 등이 격심해지면서 임시정부는 존폐 위기에 처하였다.

이런 가운데 독립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들이 일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1921년 2월 임시의정원 측 원세훈·박은식 이하 13명의 연서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창하였다. 그 이유는 전 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일적 강고한 정부 조직을 기도하고, 군책群策과 군력群力을 종합하여 독립운동의 최량最良 방침을 수립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는 광복 대업大業의 근본적 요구이고, 실로 중대하고도 급박하기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이후 베이징에 있던 박용만·신숙·신채호 등이 발족한 북경군사통일회가 1921년 4월 베이징시 외곽 삼패자화원에 국내외의 10개 단체의 대표를 모아놓고 군사통일주비회를 열면서 국민대표회의 개최는 탄력을 받았다. 이들은 군사통일방침을 논의하고 무장투쟁을 약속하였는데, 통솔지휘권을 두고 임시정부에 일임하느냐, 새로운 군사통일기관을 조직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이때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가 드러나자,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정원 해산을 요구하면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재외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자들이 통일적 공론의 실현과 더 나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누구나가 이를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1년 3개월 만인 1920년 12월 말 상하이로 건너와 1921년 6월까지 머물던 시기였다. 이때 임시정부 옹호파였던 조완구·윤기섭 등 45명은 선언서를 발표하여, 임정의 불신임 등에 현혹되지 말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임정을 확고히 신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동녕·신규식·이시영 등 역시 국민대표회의 소집 측의 선전에 현혹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대립하였던 국무총리 이동휘와의 화의를 추진하였던 안창호마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대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로 기울었다. 안창호는 1921년 5월 임시정부를 제외한 국민대표회의 소집만이 분열한 독립운동계를 통일, 단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국민대표회에 반대했던 102명이 연서로 회의 소집을 의정원에 청원하면서 개최 문제는 더욱 힘을 얻었다.

대한민국 5년(1923년) 3월 1일자 독립신문 156호(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때, 독립운동계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에 걸쳐 개최된 미국 중심의 태평양회의와 소련이 주도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의 독립 보장에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이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국민대표회 소집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22년 4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가결되었고, 그해 5월 30일에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주된 내용은 독립운동계를 일신하여 통일적 조직으로 독립운동 방략을 수립하고 광복을 기필코 달성하기 위해 독립운동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는 국민대표회의 일자를 1922년 9월 1일로 못 박고 이를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자금 부족, 각 지역 기성회 결성과 대표선출 지연, 상하이 정국의 불안정과 준비 부족 등으로 연기를 거듭하였다. 특히 1922년 10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어 국민대표회의를 반대하였고, 임시정부와 의정원 사이에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는가 하면, 상하이의 교민단 내부에서도 찬반으로 갈렸다. 이에 해를 넘겨 겨우 1923년 1월 3일 70여 개 단체의 대표 1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그해 1월 17일 전문 5장 28조, 부칙으로 된 규정을 의결, 통과시켰다. 이어 1월 23일 ‘국민대표회의 대표 자격심사규정’을 마련하여 대표 자격을 심사하였다. 단체 자격은 1922년 5월 10일 이전, 즉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의 선언문이 발표되기 이전에 결성된 단체로 제한하였다. 대표의 신분은 독립운동의 정신과 사업에 배치된 일이 없는 자로 규정했다. 이후 이들은 모이당慕爾堂; 현 목은당에서 선열들에 대한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각지의 대표자들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1923년 2월 2일 본회의에 들어가 의장 김동삼이 개회를 선언하였다. 이후 군사·재무·외교·생계·교육·노동 등 6개과 위원을 선출하였고, 1923년 2월 21일 장시간 토론 끝에 작성한 ‘선언문’과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관련 내용과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는 의의 개최에 앞선 순국선열의 추도회 개최와 더불어 국민대표 위원 전체가 선서와 선언서를 발표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시국에 맞춰 각오를 다진 것이다.

선서문

우리들은 전 국민의 대표로서 위급하고 곤란한 시국에 임하여 철저한 독립정신 하에서 국민의 대동일치를 힘써 도모하고 독립을완성하기 위하여 희생적으로 노력하며 본 국민대표회의의 공정한 결정에 절대복종하기를 좌에 선서.

기원 4256(1923)년 2월 21일
국민대표회의 대표 서명

선언서

본 국민대표회의는 2천만 민중의 총의를 지키는 국민적 대회합으로 최고의 권위에 의해 국민의 완전한 통일을 견고케 하며 광복 대업의 근본방침을 수립하고 이로써 우리 민족의 자유를 만회 하고 독립을 완성하기를 기도하며 이에 선언하노라.삼일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통일은 이미 표명되었나 니, 자유 독립의 선언과 국권 광복의 의기義旗는 우리의 민족적 통일된 의사를 발표하였으며, 정의 인도人道의 주장과 민족자결의 표어는 나아가 국제적 공정한 여론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혈전 고투 오늘에 이르기까지 밖으로 강도 일본의 흉폭한 검극劍戟; 칼과 창이 물러나지 않았으며 안으로 독립운동 전체의 국면의 실제상 통일이 완성되지 못하여, 삼천리 강토는 여전히 일제의 말발굽 아래 유린당하며 2천만 동포는 아직도 질곡 속의 도탄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우리는 어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오직 대업의 앞날을 위하여 국민 전체의 대 단속을 제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강도 일본의 흉폭한 검극劍戟을 격퇴하기 위하여 독립운동 모든 국명의 실제상 통일을 절규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정연한 진행 과정이 우리를 계시하고, 민족적 건전한 생명이 우리가 더욱 힘을 내도록 용기를 북돋우며, 대세가 우리를 몹시 놀라고 두렵게 하며, 시국이 우리를 재촉하여 본 대표회의가 전 국민의 공통된 요구와 갈망에 기인하여 이제 개최되었다.이는 즉 철저한 독립정신의 결정이며 전 민족 공존공영의 일대 기회이며, 현 시국에 관한 일체의 문제 해결도 이에 있다. 본 대표들은 국민이 위탁한 사명을 받아 국민적 대단결을 힘써 도모하며 독립 앞날의 대방책을 확립하여 통일적 기관하에서 대업이 이뤄지기를 기약하려 한다.
아, 국민적 대 단합이 이에 완성되었다. 운동의 신국면이 이에 전개되었다. 우리 전 국민은 다 나아가 동일한 주장과 방침에서 일치 진행할 것이다.

기원 4256년(1923) 2월 21일
국민대표회의대표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시국 문제를 둘러싸고 개조파·창조파·옹호파 등으로 분열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특히 개조파가 제출한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헌법·제도 및 기타 일체를 실제 운영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것을 결의함’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창조파는 독립운동은 격렬한 수단과 실질적 방침으로 급진적으로 해야 한다며, 최고무상最高無上의 국민대표회의의 권위 하에 최고기관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배하고 대의大義를 위하여 분투하고 독립을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한 치 양보 없는 대립 구도 속에서 국민대표회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결국 1923년 6월 개조파가 회의에 불참한 가운데 창조파가 단독으로 의장단을 개선하는가 하면 국호로 ‘한韓’으로 정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 통과시켰다. 이에 개조파는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내무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의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원은 창조파의 독단적인 회의 진행을 모반 행위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창조파 일부는 잠적하였고 일부는 연해주로 넘어가 버렸다. 혈연과 지연, 이념을 넘어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고자 했던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새로운 통일기관의 결성을 지지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