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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국민대표회의의 배경과 개최 과정

특집

국민대표회의의 배경과 개최 과정

— 글.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국민대표회의 소집 배경 – 수립 이후 임시정부의 상황

국민대표회의는 상하이에서 1923년 1월부터 6월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국내외 각 지역과 독립운동단체 대표 125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유일무이한 회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종국적으로 파열로 귀결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당시의 독립운동과정에서는 물론 민족사적 입장에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3˜1운동이후 국내외에서 선포˜수립된 임시정부들 가운데 노령의 대한국민의회(1919.3.17.)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11.)가 실질적인 추진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두 임시정부는 통합협상과정을 통해서 국내에서 4월 23일에 선포된 한성정부를 봉대˜승인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는 한성정부 각원명단대로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상하이 임정 측은 임시의정원(1919.8.23.~9.17.)에서 앞서 4월 11일 임정조직 당시 임시헌장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임시헌법을 만들었고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으로 바꿨다. 국민의회 측은 상하이 임정 측이 ‘승인’이 아닌 ‘개조’를 단행하여 통합을 위한 ‘협약’을 파기하였다며 통합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승인˜개조분쟁의 결과 한국독립운동세력은 임시정부 참여파(개조파) 와 비참여파(승인파)의 두 진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두 진영은 이로부터 3년여 후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건설파)와 개조파(계통파)로 다시 결집하여 세대결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일부 불참세력에도 불구하고 ‘통합임시정부’는 1919년말 군사, 외교, 내정, 교통, 교육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대정방침’을 마련하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는 등 국내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렇지만 통합임시정부 1년여의 활동기간에 지도자들간의 독립운동노선, 지역적, 종교적 배경의 차이에 따른 갈등과 분열로 인하여 명실상부한 통합에 이르지 못하여 내홍을 계속하였다.
1920년 가을 일본이 자행한 경신참변(간도참변)으로 상하이 임정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무기 고갈과 근거지 상실로 인하여 서북간도의 항일독립군들은 근거지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서북간도의 항일독립군 섬멸이라는 간도 침공의 목표 달성에 실패한 일본은 서북간도의 한인 동포들에 무자비한 학살, 방황, 파괴 등을 자행하였다. 무방비 상태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이나 대응도 취하지 않은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베이징에서는 1920년 9월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15명이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고 남북만주로 대표를 파견하여 군사통일회의 개최를 추진하였다. 이는 1920년 봄 이후 서북간도 일대에서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맞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일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군사통일촉성회는 이후 베이징을 중심으로 반임정세력이 조직적 결집이 시작되었다.
1920년 말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급거 상하이로 오게 됨으로써 1921년 초 대통령이 최초로 참석한 수차례의 국무원회의가 열렸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승만의 대미위임통치청원에 대한 해명과 근본적인 임정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안창호와 이동녕 등 기호출신 총장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같은 날 국무원 비서장 오영선, 법무차장 안병찬이 동시에 사임하게 되면서 통합임시정부는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과 확산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임으로 시작된 시국 변화에 호응하여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소집이 처음으로 제창·발기되었다. 박은식, 원세훈, 최동오, 안병찬, 유례균, 왕삼덕, 김창숙 등 15명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반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였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 목적이 “전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일적인 온고穩固한 정국을 기도하고” “군책群策과 군력群力을 복합하여 독립운동의 최량最良한 방침을 수립”하는 데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들은 국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감독하는 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이를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짓고 민의에 의해서만이 “근본적 대개혁으로써 통일의 재조再造를 계획하고 정국의 완조完組를 도모하여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타개”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군사통일촉진회의 주도로 군사통일회의(1921.4.17.~6.22.)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미위임통치 청원자(이승만)를 성토하기로 결의하고,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부인하고 1919년 4월 23일 국내 국민대회에서 조직·발표된 ‘대조선공화국임시정부의 계통’을 계승하여 새롭게 정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군사통일회의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대표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입각하여 군사통일회의는 1921년 4월 27일 자로 임시의정원에 「통첩」을 전달하였고, 5월 같은 내용이 담긴 「선언서」와 대미위임통치청원자인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이를 방치한 전대한국민회중앙총회장 안창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베이징의 유학생회 역시 같은 취지의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4월에 들어와 임시정부의 주요각원들인 유동열(참모총장겸 총사령관), 남형우(교통총장), 김규식(학무총장), 안창호(노동국총판)가 연이어 사임하게 되면서 임시정부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또한 5월 6일 무장독립군의 유력한 근거지의 하나인 서간도 액목현額穆縣에서는 서로군정서, 한족회의 주요간부들인 여준, 이탁, 김동삼, 곽문, 이진산 등이 임시정부개조의 필요성과 위임통치청원자(이승만)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모이당, 국민대표 회의 장소 추정지

©독립기념관

국민대표회 기성회, 촉성회, 주비회의 출범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계기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연설회였다. 5월 12일 상하이 재류 동포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첫 연설회에서 여운형과 안창호가 연이어 나서서 국민대표회 소집의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연설회 후 참석자의 절대 다수가 국민대표회 소집에 동의하였다.
두 번째로 개최된 연설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이 끝난 후 참석자 300여 명의 동의를 얻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을 촉진하기 위한 조직위원 20명을 선출하였다. 여기에는 여운형, 김규식, 안창호, 남형우, 윤현진, 김만겸, 원세훈 등 상하이 지역의 주요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마침내 1921년 6월 6일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총회가 열려 「국민대표회기성회 간장簡章」을 의결하고 전권위원 30명을 선출하였다. 상하이의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이어 이후 베이징, 톈진, 하와이, 난징, 미주 다뉴바 등지에서도 국민대표회 촉성회 또는 국민대표회 기성회가 차례로 조직되었다.
1921년 8월, 상하이, 베이징, 톈진, 난징의 대표들이 긴밀히 협의하여 국민대표주비회를 조직하였다. 주비회는 집무위원을 선출하여 회의를 열고 회의지점, 회의기일, 대표 자격 등에 관한 진행방침을 결정하였다. 대회를 상하이에서 11월 상순에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들은 지역대표와 단체대표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주비회는 계획대로 활동을 추진할 수 없었다. 대회 개최예정일인 11월에 워싱톤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고, 이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민족대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워싱톤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고자 했고,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참여하고 있었던 김규식, 여운형, 나용균 등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러시아로 떠났다. 이외에도 민국民國 연호와 기원紀元 연호 논쟁과 국민대표회 소집에 필요한 자금 문제 역시 대회 개최를 어렵게 하였다.
결국 임정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한형권이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20만 루블의 자금을 받아 1921년 11월 21일 상하이에 도착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주비회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워싱톤회의에 이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가 종결되면서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재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특히 1922년 3월경 모스크바 대회 참여 대표들이 상하이로 대거 귀환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 개최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한편, 4월 16일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 3일에 제출되었으나 며칠째 논란 중에 있던, 국민대표회의 조속한 개최를 찬성하자는 천세헌 등 102명이 제출한 인민청원안이 통과되었다.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 결성

한형권의 자금 덕분으로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회주비회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일체 사항을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장정을 정하고 새로이 12명의 위원으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주비위원회는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주비위원회의 이 「선언(서)」은 “시세의 추향과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다시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되게 할 양대 안건 하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사항을주비할 책임을 부담하고 성립되었다”며 그 활동 목표를 제시하였다. 주비위원회 선언서는 기원 연호와 민국 연호를 병기하였는데, 임시정부에 대한 대립된 두 입장이 타협된 것이다.
주비위원회는 대회 연기로 인한 새로운 상황을 반영하여 1921년 8월에 결정한 대표선정에 관한 사항을 수정한 내용을 『독립신문』 1922년 6월 3일 자에 발표하였다. 대표를 선거할 구역, 단체, 인원수를 재조정하고, 대표는 지방과 단체로 나누었다. 대표들은 대표회에서 공인할만한 확실한 신임장을 휴대해야 하고, 현하 시국의 정돈과 장래 방침의 수립에 관한 의안제출, 해당 지방에 대한 상황보고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후 주비위원회는 러시아, 국내, 일본, 만주 등지로 대회참가 대표들을 초치하기 위한 13명의 특파원들을 파견하였다.
당초 1922년 9월 1일에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다시 10월 15일로 연기되었다. 1922년 9월 상순 이래 각지에서 대표들이 상하이로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나 대표들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당초 예정했던 10월 15일에는 개최되지 못하였고 12월 20일로 다시 연기되었다. 개회일을 또 다시 연기한 것은 교통의 불편 때문이었다. 대회가 개최되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은 1922년 10월 말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였다. 당시 이 대회에는 128명의 대표가 참여하였고, 특히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경우 국내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대표 자격을 갖고 있어 이들의 상하이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2월 19일에는 주비회 위원들이 도착한 대표들을 대동여사大東旅舍로 초청하여 만찬을 가졌으며, 12월 22일에는 주비회 위원들과 54명의 대표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60명에 가까운 대표들이 도착하여 12월 23일부터 28일까지 수차례의 예비회의를 가졌다. 특히 12월 27일 삼일당에서 개최한 예비회의에서는 대표들이 중론을 모아 1월 3일에 정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 개회 이후에도 계속하여 도착하였다. 대표회의에 참가한 정식대표의 총수는 모두 125명으로 이들은 83개 조직, 11도 지역을 대표하였다. 참가 대표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먼저 개조파(계통파)는“임시정부의 전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개조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개조파에는 국내 각 지방 단체 대표들, 시베리아와 남북만주에서 온 대표들 거의 전부가 속해서 대회의 다수파를 형성했다. 대표들의 출신 지역으로 보면 서도파(평안, 황해), 양남파(전라, 경상)에 상해 공산당파가 가담한 형세였고, 김동삼, 안창호, 윤자영, 김철수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한다면 국민의회도 동시에 최고기관이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이는 과거의 임시정부를 다 부인하고 새로이 최고기관을 창조하자는 입장이었는데, 여기에는 “아령에서 온 국민의회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박용만파 등 17명”에 일부 상해파 소속 인사들이 속했는데, 과거 통합임시정부 출범 당시 승인˜개조분쟁에서 ‘승인’ 입장에 섰던 세력이었다. 윤해, 원세훈, 오창환, 신숙, 이청천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개조와 창조,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파는 “극단적 성향의 양 극단에서 종국적으로 두 개의 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막고자” 양 극단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