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국민대표회의 개회경비는 어떻게 쓰였나
— 글. 조철행(국가보훈처 학예연구관)
1919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 등이 취임함으로써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대표하여 임정에 참여했다. 한인사회당은 1919년 7-9월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 수립을 위해 박진순, 박애, 이한영을 모스크바에 파견하는 한편 임정을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개편하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이다.
임정은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한 뒤 한 달 남짓인 1919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 비밀특사로 알려진 뽀따뽀쁘가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대소교섭에 착수했다. 뽀따뽀쁘는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원조하겠다고 표명하면서 안창호, 이동휘, 한형권, 문창범,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과도 대담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 22일 임정 국무회의에서는 안공근, 여운형, 한형권을 모스크바 외교원으로 결정했다. 안공근은 안창호세력,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한형권은 한인사회당을 각각 대표했다. 그러나 상하이 독립운동세력들의 대립과 조율로 1920년 5월 말 임정 외교원으로 한형권만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한형권은 1920년 7월 5일 소비에트 러시아 외교인민위원부 앞으로 임정 대표로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협정 체결을 위한 아래 4개 조항을 제시했다.
1. 소비에트 공화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일제와 투쟁하고 있는 2천만 조선민중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정부로 인정해 줄 것
2. 소비에트 공화국으로부터 2백만 타얀(멕시코 달러)의 차관을체결할 것
3. 극동에서의 정치적 상황이 러시아와 일본 간의 공개적인 전쟁으로 귀결될 경우 일본 제국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공동의 대처계획을 마련할 것
4. 이제 막 형성 중인 한국혁명군의 지휘관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관 학교를 이르쿠츠크시에 개설할 것
이 제안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응은 아직 공식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아직 자금지원 목적과 주체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소비에트 러시아는 한형권에게 1921년 9월 베를린에서 20십만 루블을 지급했다. 그 자금이 국민대표회의 개최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형권이 베를린에서 수령한 20만 루블은 환전 및 당좌예금 손실 등을 반영해 환전해 172,729멕시코달러였다. 여기에 1920년 9월 23일 소비에트 러시아 외교인민위원부는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에게 40만 루블을 지급했는데 그 중 6만 루블은 한형권에게 분배되었다. 6만 루블은 사무실비, 통신비 등으로 사용되고 잔액은 4,425루블이었다. 이 잔액은 환전하면 3,455멕시코달러였다. 두 자금을 더하면 총수입은 176,184멕시코달러이다. 이 금액에 대한 한형권이 작성한 지출보고서는 아래와 같다.
한형권의 지출보고서 내역
(단위 : 멕시코달러)
연월일 | 지출내역 | 금액 | 소계(%) | |
---|---|---|---|---|
1 | 1921.9.17 ~11.21 |
베를린에서 상하이까지 출장 | 8,334 | 8,334(4.73) |
2 | (1922)12.2 | 상하이 인성학교(조선민족학교) 기부 | 135 | 635(0.36) |
1922.2-3 | 상하이 인성학교 2개월분 기부 | 500 | ||
3 | (1921)11.21 ~1923.6.10 |
사무실비 | 186 | 한형권 사무실 9,950(5.64) |
상근자 봉급 | 4,480 | |||
난방, 전기, 임차 | 1,306 | |||
사환 | 280 | |||
경비 | 200 | |||
우편통신 | 548 | |||
출장비 | 2,950 | |||
4 | 1921.11.21 ~1923.6.10 |
한형권 개인 경비 | 8,340 | 8,340(4.78) |
5 | (1922)12 ~1923.1-2 |
인쇄활자 구입 | 1,010 | 국민대표회
소집 관련
선전선동
문건출판
11,899(6.75) |
월세, 난방, 전기 | 255 | |||
사환 | 90 | |||
식자공: 3명×60불×3달=540 교정·편집: 2명×100불×3달=600 |
1,140 | |||
신문용지 : 40호×166불(1만부 인쇄지) |
6,640 | |||
인쇄 : 40호×16불(매 호당) | 640 | |||
조선·이주지로 문서발송 | 2,124 | |||
6 | (1921)12 ~1922.3.1 |
통신비 | 265 | 국민대표회 소집 관련 지출
11,765(6.67) |
상하이로 주비회위원 소집 교통비 : 12명×150불 |
1,800 | |||
관계기구조직과 그 보조금 : 9개 지점×900불+4개 지점×400불 |
9,700 | |||
7 | 1922.3.1 ~(1923)1.2 |
대표 교통비: 100명×100불 | 10,000 | 오르그뷰로
(주비회)에서
제출한
예산의 지출
59,945(34.02) |
출장비(대회대표 초대) : 13명×500불 |
6,500 | |||
상하이에 도착한 대표들 수당 : 100명×6개월(5-10월)×30불 |
18,000 | |||
대회장소임대비 : 2개월(9-11월)×600불 |
1,200 | |||
대표 경호 지원: 100명×12불 | 1,200 | |||
외교비용 | 2,000 | |||
관계기구조직과 그 보조금 : 9×640불+4×320불 |
7,040 | |||
예비비 | 8,960 | |||
주비회 사무실 임대 : 8개월×50=400 |
5,045 | |||
주집회 사환: 8개월×15=120 | ||||
주비회 사무실비: 145 | ||||
주비회위원·직원 17명×30불×8월 =4,080 |
||||
주비회 통신비: 300 | ||||
8 | 1922.1 ~1923.2 |
테러단과 교시와 연합 사업 | 800 | 테러단 지원
55,400(31.44) |
출장비 | 6,000 | |||
중간지점 보조금: 6개(5개 지점과 1개 기지)×100×13개월 | 7,800 | |||
폭발물: 800개(폭탄 1개)×25불 | 20,000 | |||
전문가 고용: 200불×13개월 | 2,600 | |||
테러단원 보조금: 220명×60불 | 13,200 | |||
폭발물 운송 | 5,000 | |||
환전 손실 | 9,477 | 9,477(5.37) | ||
총지출 | 175,745 | 9,477(5.37) | ||
잔액 | 439 | (0.24) | ||
총액 | 176,184 | 176,184(100) |
①, ③, ④ 항목 15%은 한형권이 직접 사용한 비용이다. 출장비, 상근자봉급, 한형권 개인 비용 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⑤~⑦ 항목 47%는 국민대표회의에 관련되어 사용된 비용이다. 그 중 ⑤, ⑥ 항목은 1921.12~1923.3.1 사이에 직접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지급되었다. 1922년 전반 국민대표회 개최가 지연된 원인들이 해소되고 한형권이 가져온 ‘모스크바 자금’이 주비회경비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주비회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주비회는 위원 12명을 선임하여 새롭게 개편되었다. 12명의 주비회위원 소집 교통비로 한사람 당 150불이 잡혀있다. 이것은 주비회가 새롭게 개편되어 1922년 3월 21일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⑦ 항목은 국민대표회의 대표의 교통비, 수당 등으로 지출되고 있다.
⑧ 항목의 테러단은 의열단, 신의단, 십인단 등에 지출된 것인데 31% 정도의 자금이 지원되고 있다. 이는 주비회가 의열투쟁 입장인 반면에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군사최고기관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독립전쟁론과 비교된다.
지출보고서로 보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민대표회의를 통해전체 한국독립운동의 지도기관을 조직하려는 목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인사회당이 추진한 임정 조직을 위원제로 개편하려는 입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