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독립의 터와 길

중국 충칭重慶의 한국광복군 사적지를 가다

독립의 터와 길

중국 충칭重慶의 한국광복군 사적지를 가다

“오늘 우리가 중국의 전시수도 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의식을 거행함은 의의가 깊고 믿음이 갑니다. … 우리의 위대한 사업을 하루 속히 이루는 것이 곧 우리의 유일한 직책입니다.”

─ 글.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부교수)

코로나 19가 창궐하기 직전인 2020년 1월 초 대학생 탐방단을 이끌고 중국 충칭에 있는 한국독립운동사적지를 답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 동안 수없이 충칭을 방문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인 연화지는 갈 때마다 새로운 감회를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또한 충칭은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거행한 곳이며, 총사령부 건물이 현재 복원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광복군 창설 장소 쟈링빈관嘉陵賓館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발표된 한국광복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성립된 이후 정식 군대를 조직한 것에 대한 감격과 중국과의 공동항전을 천명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해방과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항전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렸다.
1940년 9월 17일 아침 7시 쟈링빈관의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장의 정문에는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교차 게양되어 있었다. 성립식에 많은 인사들을 초청한 것이나 성립식 장소를 서양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쟈링빈관으로 택한 것은 광복군 창설에 대한 선전효과를 거둔다는 측면은 물론 이에 대한 각국의 협조 분위기를 조성하여 중국군사위원회 실무진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성립전례식은 임시정부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참석인원은 약 200여명이었다. 초청 인사들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총사령부 직원들이 참석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충칭위수사령관 유치劉峙와 손문의 아들 손과孫科가 직접 참석하였으며, 주은래周恩來, 동필무董必武는 측근을 대신 보냈다. 터키 대사 등이 광복군 성립에 축하의 의미를 전달하였다.
식순에 따라 먼저 김구는 광복군 창설 대회사를 통해 중국항전에서 광복군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오늘 우리가 중국의 전시수도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성립의식을 거행함은 의의가 깊고 믿음이 갑니다. 이로부터 중국 경내에서 정식 광복군을 동원할 수 있어 우방 중국의 항일대군과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을 무찌를 수 있게 되었고 이로부터 백산과 흑수까지 동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듯 하는 삼한의 건아가 화북 일대에 산재해 있는 백의대군 그리고 국내의 3천만 혁명대중의 소문을 듣고 봉기하여 왜적의 쇠사슬을 단절하고 성스러운 직분을 수행할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비상한 감격을 깨닫게 하였음은 우리가 밤낮으로 중한 연합군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수행하는데 지나지 않으나 전체 우리의 위대한 사업을 하루 속히 이루는 것이 곧 우리의 유일한 직책입니다.

김구의 개회사는 중국과의 관계가 절대적인 만큼 그리고 중국군사위원회의 지원이 절실하였기 때문에 더욱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한 문장이었다. 감격에 찬 한국광복군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탄생하였다. 성립전례식 직후 쟈링빈관 앞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은 오늘날에도 한국광복군 전시를 할 때 감초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 사진 안에는 백범 김구를 비롯해, 총사령관 지청천과 임시정부 요인들, 중국인들이 밝은 표정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재 쟈링빈관은 이미 다른 건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건물 앞에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장소를 알려주는 기념 표지석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광복군 성립 초기 총사령부, 오사야항 청사와 함께 쓰다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이 끝난 뒤 총사령부 본부 건물은 어디에 있었는가. 건물 소재가 불명확하였다. 총 8조로 이루어진 한국광복군총사령부조직 조례에도 사령부 본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초기에는 아예 본부 건물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말인지 그 부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한국광복군과 관계한 여러 인물들의 회고록이나 일기류에도 총사령부의 초기 소재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실정이다.
한국광복군은 성립 이후 시안에 총사령부를 두게 되고 충칭에는 중국군사위원회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총사령 지청천을 비롯한 극히 일부 인원만 잔류하게 된다. 그 때 사용한 총사령부 건물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간의 흔적이라는 공간의 존재로서 과연 총사령부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일까.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에 대한 고찰의 실마리는 중국군사위원회 인물들의 활동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941년 7월 19일 중국 국민당중앙조직부장이었던 주가화朱家樺가 김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현황을 가늠할 수 있다. 주가화는 한국광복군 문제에 대하여 장개석이 김구와 면담을 승인하였다고 하면서 김구와 지청천, 이범석, 박정일 등 4명을 초청하였다. 1941년 7월 19일 주가화가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 교제과에 보낸 서신은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김구, 이청천, 이범석, 박정일 등 4인은 전에 제가 첨정하여 회견의 약속을 청하였고 이에 비준을 받아 귀과에 알린 문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현재 화평로 오복가 오사야항 1호에 머물고 있습니다.

서신 내용을 보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건물 내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42년 4월 1일부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중국 군사위원회 소속 중국군 장교들이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9개준승’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9개준승’ 제5조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소재지는 군사위원회에서 정한다라고 하는 규정에 따라 충칭으로 총사령부를 이전한 한국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이 불가피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총사령부에는 중국군 장교들이 한국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직제상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참모장 이범석 대신 중국군사위원회 고급참모인 윤정보尹呈輔가 그 자리에 1942년 3월 13일자로 보임되었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윤정보는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에 대하여 중요한 언급을 했다.

나는 1941년 중국 군사위원회 소장 고급 참모였다. 1942년 군사령부 중장 고급참모로 진급하였으며, 그해 3월 위원장(장개석 필자주)의 명을 받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중국인 가운데 외국 참모장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광복군총사령는 중화민국의 임시수도인 중경에 있었다.(지점은 오사야항이며 한국임시정부 역시 이곳을 썼다. 사무실은 겨우 3칸 정도였으며, 근무병, 공인 역시 많지 않았고 비좁은 곳이었다) (밑줄 필자) 총사령은 이청천이며, 내가 참모장, 부참모장 이범석, 이하 참모, 정무, 부관, 군수 4처가 각종 업무를 담당했다.

윤정보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소재지를 충칭에서 3번째 임시정부 청사였던 오사야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윤정보는 참모장에 임명된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요청을 받고 좁은 길을 지나 오사야항에 도착하였다. 오사야항은 2012년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오사야항은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장 오랫동안 청사로 사용되던 곳이며, 김구가 백범일지 하권을 썼던 곳이다. 현재 충칭 청사(연화지)에서 뒷길로 가면 오사야항 청사까지는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진 공간에는 공사장의 경비만이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다.

복원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전경

©김주용

철거된 오사야항 청사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추용로 37호에 대한 기억들

일본 학병을 탈출해서 생사의 갈림길을 극복하고 충칭 임시정부의 품에 안긴 장준하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총사령부에 대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오후 4시부터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우리를 초대하여 환영회를 열어 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가 초대받은 광복군 총사령부는 임정 청사에서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으며, 그곳에는 중국군 고문관들이 많이 파견 나와 있었다. 우리 광복군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독립된 작전활동이 없었고 중국군의 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부분적인 항일투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보급일체는 중국군에서 지급되었으니 고문관들이 나와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장준하가 충칭에 도착했을 당시 임정청사는 연화지이며, 총사령부 건물은 추용로鄒容路 37호였다. 그는 백범을 비롯한 임정주석단의 환대를 받고 ‘기쁨 속에 몸을 떨었다’라는 감격적인 표현을 토해낼 정도였다. 그리고 연화지 청사에서 약 15분 정도 도보로 도착한 곳이 바로 총사령부였다. 다음으로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는 장준하의 회고록보다 건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오후 4시에 우리가 초대받은 광복군 총사령부로 찾아갔다. 총사령부 임정청사에서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는데 중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竹로 만든 2층 건물이었다.

김준엽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은 현재의 3층 건물하고는 차이가 많이 난다. 바로 흙을 발라 대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일반집이었다는 것이다. 김준엽이 연화지 청사를 보고 감동을 받은 것과 달리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그 모습을 언급하였다.
1942년 7월 총사령부 본부가 추용로 37호로 이전할 당시에는 최소한 40~60명의 인원이 근무해야 하는 규모의 건물이었을 것이다. 윤경빈의 구술을 통해 본 1945년 초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인상은 다음과 같다.

들어가면 푹 내려갔어. 내려가서 벙벙하니 양쪽으로 갈려서 이쪽에 참모장실이 있고, 총사령관실이 있고 그랬어요. 부관실이 있고, 난 그때 부관이었기 때문에 부관실에 근무를 했는데, 그리고 좌측에 들어가면 참모실이라고 그래가지고 고급 참모들 계시던 방이 몇 개 있었고, 또 그 안에 들어가면 경리부가 있었고, 뭐 그런 사무 보는 방이 몇 개 있었어요.

1945년 초에도 이미 많이 낡은 상태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은 약 60여 명 이상의 인원이 상주했으며, 초기 사령부 건물로 사용할 당시에는 2층과 3층이 없었고 지하 1층과 반지하 형태의 1층 구조였다. 충칭의 지형상 언덕이 많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반지하와 1층이 동일선상에 있을 수 있다. 추용로 37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에서 한국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파견된 군인들과 함께 공동항일전선을 구축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심장부로서의 기능을 당당하게 수행하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대회사를 하는 김구 주석 (1940.9.17.)

©독립기념관

복원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한중 양국 문화교류의 미래의 장

1942년 7월경 시안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충칭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용대 본진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제1지대로 편성되었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는 충칭 남안구南岸區 탄자석彈子石 대불단大佛段 예가원자倪家院子에 두었지만 오늘날에 는 그 터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오늘날 대불단 역시 충칭의 개발논리에 밀려 옛 건물들이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형국에서 임시정부 청사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도 비좁다고 하는 인식을 임시정부 요인들이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총사령부 단독 건물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 다. 바로 한국광복군에서 조선의용대를 편입시킨 시점에 신생로新生路 45호(현 추용로 37)에 새로운 한국총사령부 건물을 마련한 것이다. 1943년 9월 18일 충칭시 청년로와 추용로 사이를 개 수하면서 신생로를 추용로로 개명하면서 지번도 바뀌게 된 것이 다.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유중구 일대의 도로를 개보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신생로가 추용로로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 따라서 신생로 45호는 추용로 37호로 지번이 바뀌었지만 건물은 현재 복원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이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흔히 ‘미원’ 건물로 많이 알려졌던 이 건물을 보존 또는 복원하기 위해 한중 양국이 10년 가까운 시간을 협의하였다.

2017년 12월 한국대통령이 처음으로 충칭을 찾았다. 연화지 청사를 방문하고 무엇보다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복원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중국에서도 이에 화답하듯 추용로 37호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행사에 맞추어 준공하였다. 2001년 독립기념관에서 정밀 실측을 시행하였고 그 이후에도 한국과 중국의 많은 노력들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건물로 부활한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던 양국이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복원한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실천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문화를 강조했던 백범이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던 한국 광복군 창설을 주도한지 햇수로 8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곳이 혐오와 갈등을 넘어선 양국의 문화 교류와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장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1940.9.17.)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