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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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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돌아오다

우리 기념관은 개관특별전,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돌아오다>를 확대 발전시켜 2022년 11월 23일, 이를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에서 순회전시로 개최하였다. 77년 전 이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진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 27년 만에 민족의 염원인 독립된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더욱이 대통령기록관에서 이번 순회전시가 개최됨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정부 수반들을 계승하였음을 밝혔다.

1부. 역대 수반과 그 활동으로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를 위해 이번 순회전시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들과 그 활동을 소개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제를 채택하였다. 같은 해 9월 임시정부는 서울의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하면서 정부 수반을 대통령으로 바꾸었다(제1차 개헌). 1925년 제2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는 국무령제로 바뀌었는데, 2년 후 국무령제는 폐지되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바뀌게 된다(제3차 개헌). 국무위원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시기 내내 지속되며 13년간 유지되다가,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한 1940년 주석제로 바뀌게 된다(제4차 개헌). 1944년,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이 모두 임시정부에 모인 결과, 부주석제가 신설되었다(제5차 개헌).

2부. 승리하고 돌아가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수반들이 이끈 외교 군사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여 한층 활발해졌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임시정부는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참전 외교는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을 통해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맺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1943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인도 미얀마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직전인 1945년 미국 OSS(전략첩보국)과 함께 한국 진공을 위한 여러 작전을 준비하였다.

3부. 가자, 조국으로!

1부와 2부가 해방 이전 임시정부와 수반들의 활동에 주목했다면, 3부와 4부는 해방을 맞이한 임시정부의 환국과 그 이후의 활동을 다루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다음 날인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선언한 임시정부는 중국 미국과 귀국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진행하였다. 11월 5일, 중국 측의 환송회를 끝으로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미국과의 교섭 끝에 정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겠다는 서약서를 미국 측에 제출하였다.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은 마침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환국 과정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상은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붕준 선생이 당시 직접 사용하였던 트렁크와 양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 뿐 아니라 해외 여러 곳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과 서재필, 서영해 등 주요 인물은 미국과 유럽에서 환국하였고, 임시정부 요인 및 직원들의 가족들 역시 배를 타고 부산항과 인천항을 통해 돌아왔다.

1부 역대 수반과 그 활동으로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2부 승리하고 돌아가리라

3부 가자, 조국으로!

4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국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정부 환국준비 회가 발족되는 한편, 임시정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감사가도 쓰여졌다. 귀국한 김구 주석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귀국일성一聲을 밝혔고, 임시정부 요인 2진까지 도착하자 이들을 맞이하는 환국봉영회가 열렸다. 1945년 12월 19일, 옛 서울운동장에서 약 15만명이 모여 임시정부의 개선을 환영하였다. 인파는 서울 시내 곳곳을 다니는 시가행진을 통해 임시정부의 환국과 개선을 축하하였다. 동대문에서 시작된 시가행진은 종로와 광화문, 서대문과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에서 해산하였고, 곧 이어 덕수궁 석조전에서 환영연이 펼쳐졌다. 한편 충청지역에서도 개선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12월 18일에는 청주에서, 다음 날에는 충북 옥천 에서 개선 전국환영대회가 열렸고, 특히 옥천에서는 남녀노소 3천명이 모여 환영회를 개최하고, 시가행진 후 해산하였다. 더욱이 1946년 4월, 윤봉길 의거 14주년을 맞이하여 예산에서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되자 김구 주석은 윤봉길 의사의 가족들을 만났 고, 이어 5월에는 홍성과 예산, 온양, 청주, 충주 등지에서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의 연설회가 있을 만큼 충청지역에서의 임시정부 환영은 계속 이어졌다.

5부. 대한민국 정부, 임시정부를 계승하다

5부와 6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계승과 여러 기념시설의 건립으로 전시를 마무리하였다. 1948년 7월 17일 반포된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였다고 선포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하였고, 그 역사성이 대통령기록관에서의 순회전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계승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제헌헌법의 전문과 현행 헌법에서 강조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1948년 초대 내각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가 제정한 3.1절, 개천절, 순국선열의 날과 같은 여러 기념일을 계승하였고 나아가 임시정부 수립일도 기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가 제정한 여러 국가 상징물, 즉 국호와 연호, 국기와 국가를 계승하였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 관보 제1호’의 연호 표기법인데, 1948년 9월 1일 발간된 이 문서는 발간일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표기함으로써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하다

5부 대한민국 정부, 임시정부를 계승하다

6부. 임시정부를 기념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국가적 차원에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공간을 조성해왔다. 이미 광복 직후인 1946년 7월, 효창원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三義士의 묘역을 만들었고, 국립 현충원에는 애국지사 및 임시정부 요인 묘역을 조성했다.

독립기념관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과 역사관도 건립되었다. 그리고 2022년 3월 1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6부 임시정부를 기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