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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생활탐색

임시정부의 피난과 주거생활

임정 생활탐색

임시정부의 피난과 주거생활

한인교포들은 자신들이 살던 집이 성한 건물이 아닌데다 이리저리 지붕만 막아놓고 살던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 글. 김성은(대구한의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이 확산되면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충칭을 전시수도로 정하여 충칭으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표기) 요인, 각 정당의 요원, 그 가족 등 한인교포들도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나 8여 년 동안의 피난생활 끝에 마침내 1940년 충칭에 정착했다. 임정대가족 백 여 명은 사천성 기강綦江에 1년 6개월간 머무르다 충칭(시내와 강북 포함)과 토교土橋에 정착했다. 1940년 중국 관재 독립운동세력들이 충칭에 집결한 이후 충칭시를 가로지르는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시중구(지금의 유중구)에는 임시정부와한국독립당 등 민족주의 세력이 자리 잡았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비롯한 좌익 계열 교포들은 충칭의 남안구南岸區에 자리를 잡았다. 남안은 양자강揚子江의 남안을 가리키는 말로 충칭시의 강남 쪽에 충칭시내와 바로 마주보고 있 는 곳을 지칭했다.
토교는 기강에서 충칭 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동감東坎마을(일명 토교)을 지칭했다. 동감마을의 행정구역상 이름은 파현 토문향巴縣 土文鄕인데 흔히 토교라고 불렀으며 충칭의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정은 국민당 정부의 중국진재위원회中國振災委員會(구호기관)로부터 6만 원의 원조를 받아 토교 동감폭포 위쪽의 한 구역에 15년 기한으로 5,000원을 내고 2,000여 평의 땅을 임대했다. 그리고 이곳에 기와집 3동을 건축하고, 도로변에 2층 기와집 1동을 매입해 임정가족들이 머물 곳을 마련했다. 토교는 충칭에 비하면 주택난도 덜하고 공기도 신선한 편이었다. 토교에 10여 가구(세대)가 자리를 잡고 신한촌을이루어 살면서 해방이 되어 귀국하기까지 5년 동안 한집안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한인교포들이 사는 주택은 방 2개 부엌 1개의 조그만 죽제가옥이었지만 집집마다 주위의 땅을 약간 배분받아 채소도 가꾸었다. 토교 신한촌 언덕 위에는양식 건물인 기독교청년회관이 있었고 그 건물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토교에 남아 있는 한인 거주 가옥

©독립기념관

토교 언덕에 있었던 청년회관에서 내려다보면 언덕 밑으로 강이 흐르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야산에 둘러싸인 분지에는 논밭이 가득하고 마을이 군데군데보이는 한가롭고도 아름다운 도원경 같았다고 한다. 토교의 신한촌에는 화탄계花灘溪라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인교포들은 이 물에 빨래와 수영을 했는데 물이 맑아서 그냥 마실 수도 있었을 정도로 물이 맑았다고 한다. 마을 언저리의 밭에는 야채, 꽃, 고구마, 옥수수도 심어 가꿀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한인교포들은 토교 신한촌에서 고국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김준엽(학병 출신의 광복군)과 양우조는 토교의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고향에 온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교의 한인촌은 마을 전체가 대나무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내도 흐르고, 그 주위로 사철나무가 우거져 있어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언덕에 있는 YMCA회관과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모아 한국말과 한국노래를 가르치고 있어, 그 앞을 지날 때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들곤 했다.

토교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달리 충칭의 한인교포들은 공기도 혼탁하고 폭격으로 인해 인명이 손상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등 불안하고 혼란스런 주거 환경에 직면해야 했다. 충칭임시정부는 충칭시내에서 네 번 장소를 옮겼다. 양류가楊柳街에서는 폭격으로 인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석판가로 이전했다. 석판가石版街에서는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는 바람에 의복까지 소실되었다. 화평로 오사야항和平路 吳師爺巷에서는 폭격으로 인해 가옥이 완전히 무너져 다시 중수했다. 그러다 이곳을 임정직원주택으로 사용하고, 연화지蓮花池에 있는 70여 칸 건물을 1년에 40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빌려서 임정청사로 사용했다. 이곳이 임정이 충칭을 떠날 때까지 사용했던 임정의 마지막 청사였다. 건물 임대료는 국민당 정부의 보조로 충당했다. 원래 이 연화지 연지행관蓮池行館 건물은 호텔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임정의 업무가 이루어지는 업무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단신의 임정요인들이 기숙하는 생활(침실, 식당)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민족혁명당사는 양자강 건너편 남안구의 손가화원孫家花園 내에 위치하 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탄자석 석주보촌 예가원자彈子石 石周堡村 倪家院子는 1942년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재편성된 한국광복군 제1지대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중일전쟁 중의 충칭은 일본군이 점령한 각지로부터 관리와 인민이 중앙정부 로 집중하여 모이게 되면서 평시에는 몇 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격증하여 백만 명에 달했다. 가옥이 평시에 비해 몇 백 배나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택난이 극도에 달해 여름에는 길거리에서 자는 노숙자가 태반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정은 건물과 주택을 임차하고 임정청사와 한인교포들의 거주지를 마련하여 임정 업무를 수행하고 생활을 꾸려 나갔다.
충칭은 지형상 양자강 본류와 가릉강嘉陵江이 만나는 삼각주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그 입지적 조건이 두 개의 강줄기가 갈라지는 곳에 있었던 까닭에 위치 식별이 간단해 시계가 확보되면 아주 쉬운 공격 목표가 되었다. 중국이 제공권을 일본에게 완전히 빼앗기는 바람에, 충칭은 장개석 정부가 전시수도로 정하고 옮겨온 이래 일본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충칭시는 바위산(암반) 위에 전개된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력苦力들이 바위를 깎아 새 도로나 새 집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시내 도처에는 고력들의 힘으로 파 놓은 동굴이 있어서 일본비행기의 공습이 있을 때면 사람들은 이 굴속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방공호의 수용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시내에 볼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방공호 출입증이 발급되었고, 방공호 출입증이 없는 사람은 아예 일본군의 폭격이 시작되는 매년 봄이면 시외로 소개되었다.
겨울이 되면 충칭은 공습의 위협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매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도시 전체에 짙은 안개가 끼어서, 일본군의 공습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천연의 무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충칭의 인구는 늦가을부터 점차 늘어나기 시작해 120만에서 130만까지 늘어났다가 공습이 가해지는 여름이 되면 100만 명 미만으로 억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제공권을 잃게 되는 전쟁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폭격의 위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토교에 살던 한인교포들도 겨울이 되면 충칭에 와서 살기도 했다. 아이들의 학교가 방학인데다가 충칭에 폭격도 잠잠해지기 때문에 임정 업무를 위해 충칭에 머물고 있던 가 족(남편, 아버지)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오사야항 청사 및 숙소

임시정부 청사 4호 건물 뒤편에 있던 방공호

©독립기념관

한인교포들은 중일전쟁 이후 이동과정에서뿐 아니라 충칭에 정착한 뒤에도 일본군의 폭격과 대피가 일상생활이 되었다. 충칭 시가지에 있던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고 무너져 폐허같이 되었다. 아직 좀 남아있던 집들마저도 포탄 떨어질 때 나는 폭음에 몇 번이나 들렸다 놓였다 해서인지 비가 많이 내리니까 집집마다 방 바닥에 큰 비가 내려 경황이 없었다고 한다. 폭격으로 건물이 부서지거나, 폭격과 진동으로 약해져 있던 건물이 비가 오면 무너지는 경우도 많았다. 폭격에 부서지고 남은 허물어진 건물의 경우 날씨가 나빠져 광풍이 불면 기와가 다 날아가고 천 장에서 모래비가 쏟아졌다. 한인교포들은 자신들이 살던 집이 성한 건물이 아닌데다 이리저리 지붕만 막아놓고 살던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한인교포들은 날씨가 좋을 때면 공습피해를 걱정하고 광풍이 불거나 큰 비가 오면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를 걱정하며 살았다. 1944년 미국의 센노트 장군이 의용항공대인 제14항공대, B-29 폭격기와 무스탕 전투기 편대를 이끌고 곤명昆明비행장에 도착한 이후부터 중국은 제공권을 다시 되찾게 되었다. 토교에 살던 한인교포 가족 가운데는 봄(1944년)부터 충칭 시내에 가서 남편과 함께 지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본의 충칭 폭격이 중단되어 여름에도 충칭 시내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충칭 시내에는 임정이 교포들을 위해 마련한 집이 있었다. 이 집은 임정이 임정 청사가 있던 오사야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지를 얻어 교포 가족들이 살 수 있게 열예닐곱 개 방을 만들어 놓고 한 세대에 한 방씩 사용할 수 있게 지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집이 몹시 습하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낮은 지대에 있어서 음습하고 쥐가 많아 방안에까지 돌아다녀서 거주 환경이 좋지 못했다. 비가 오면 방안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충칭임정시기 한인교포들은 임정 가족들의 집단 거주지인 토교 이외에, 충칭의 시내, 북안, 남안에 그룹별로 몇 가족씩 한 집에 모여 살았다. 명절 때는 공동 취사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명절을 기념하기도 하고, 평상시에도 몇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등 공동생활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각 가족이 각자의 방에 살면서 취사는 따로 하는 등 독립생활을 했다.
충칭임정시기 한인교포들은 충칭시내, 북안, 남안, 토교 등지에 정착하여 5년간 비교적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동시기의 지치고 불안한 시기를 지나 비록 궁색한 거주지나 살림살이라고 할지라도 정착하여 화목하게 지냈다. 독립과 귀국을 고대하며 기약 없는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가족과 교포가 서로 의지하고 정을 나누며 사는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옛터(충칭 토교)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