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임정 생활탐색

사진으로 보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복식

임정 생활탐색

사진으로 보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복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사진을 보면 중국식 의복과 양복 등 다양한 복식을 만난다. 복식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생활과 시대적 상황을 소개한다.

— 글. 김정민(인하대학교 의류디자인학과 초빙교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머나먼 중국 땅에서 고군분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는 여러 회고록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경제적으로도 여의찮아 먹는 것은 물론이고, 옷 한 벌 해 입기가 어려운 생활이었다. 심지어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 신던 헝겊신은 바닥이 다 닳아 너덜거려서 신발 목 부분만 성한 채로 매달려 있었다고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선생이 회고할 만큼, 임시정부 요인들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꾸려 나가는,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좋은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 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주로 중국 복식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외모가 중국인과 다를 뿐 아니라,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할 경우 일본군에게 붙잡힐 위험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신변 보호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 중국 복식은 ‘장포(長袍)’라 하는 것으로 목이 높고 길이가 긴 이 옷을 가리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식 두루마기’ 또는 ‘중국식 외투’ 등으로 불렀다. 장포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중국인이 자주 입던 것으로 중국의 많은 지식인이 이를 입었으며, 1930년대 중국 문인들의 전형적인 복장이기도 했다. 이 옷은 진한 색 또는 회색이 주를 이루었는데, 회고록에 나타난 임시정부 요인들의 장포 색상도 이와 같다.
한국광복군 장준하(張俊河, 1918~1975) 선생이 처음 본 임시정부 요인들의 옷 역시 진한 색의 장포였다. 그가 일본군을 탈출해 1945년 1월에 충칭[重慶]에 도착했을 때, 그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자리한 김구 선생,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선생,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생 등 10여 명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청색 또는 흑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또 김구 선생은 이날 착용한 검은색 장포를 내내 착용하고 생활하셨던 것으로 김준엽(金俊燁, 1920~2011) 선생은 회고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두어 벌의 장포로 내내 지낸 것으로 보이며, 원래 중국 장포는 비단이나 면으로 만들었는데, 정정화 선생이 헐값에 천을 사서 장포를 만들어 입었다고 하여, 저렴한 면직물로 직접 제작하여 입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장포를 입은 임시정부 요인들(1935.11.)

중국 장포를 입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진동생(1935)

©독립기념관

이 중국 장포 외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양복(洋服)을 차려입은 모습도 사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 물밀듯 들어오던 서구 패션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도 당시 양복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 요인들도 셔츠에 넥타이, 양복 재킷과 조끼에 바지, 모자와 구두를 갖추었다. 이 양복을 상점에서 맞추어 입거나 사 입기도 하였겠으나,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는 ‘넝마전’ 또는 ‘고물상’이라고도 불린 헌 옷 가게에서 구입하기도 하였다. 김구 선생은 1930년대 초반에낡은 옷을 파는 옷 가게에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었는데, 입고 나니 본인도 엄연한신사였다고 『백범일지(白帆逸志)』에 기록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요한 행사에는 특히 양복을 많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을 맞아 상하이[上海]에 올 때도 양복을 착용하였다.
이종찬(李鍾贊) 전(前) 국정원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광복(光復)을 맞이하면서,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의 최대 관심사는 언제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하이에 오는가였다고 한다. 중국인으로 변장하느라 늘 중국 복식을 입던 우리 요인들에게 차마 계속 그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었고, 중국에서 한복을 짓는 일도 어려워 이종찬 원장의 아버지와 동지들이 논의하여 양복을 마련한 것이다. 김구 선생의 양복은 체격대로 크게, 이시영 선생과 조완구(趙琬九, 1881~1952) 선생의 양복은 그분들의 체격대로 작게 준비했으며, 밤새 이 양복들에 알맞은 흰 셔츠와 내의, 양말, 그리고 코트와 비단 머플러까지 모두 준비하였다. 이렇게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장만한 옷들을 트렁크에 넣어 충칭으로 미리 보냈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옷을 입고 상하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충칭에 이르는 여정 동안,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 복식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양복을 갖추어 입음으로써 대한민국 대표로서 예의를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1919.10.11.)

양복을 입고 상하이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인들(1945.11.5.)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참고문헌]

· 김구 저(배경식 역)(2008),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서울 : 너머북스.

· 김창혁(2014), “高宗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던 할아버지의 계획은…”, 동아일보 8월 23일.

· 위안저·후웨 저(김승일·정한아 역)(2017), 『옷으로 읽은 중국문화 100년』, 서울 : 도서출판 선.

· 정정화(1987), 『녹두꽃 : 여자독립군 정정화의 낮은 목소리』, 서울 : 미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 인터넷 사이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부시스템(https://search.i815.or.kr)국사편찬위원회 우리 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