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상하이에서 온 소식

상해판 독립신문과 창간사

상하이에서 온 소식

상해판 독립신문과 창간사

상해판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로 1919년 8월 21일 창간되어 1926년 11월 26일까지 7년에 걸쳐 발간되었다. 첫 발행호에 실린 창간사를 통해 ‘독립신문’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 글. 김주현(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상해판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로 알려져 있으며, 1919년 8월 21일 창간되어 1926년 11월 26일까지 7년에 걸쳐 198호까지 발간되었다. 창간호부터 제21호까지는 『독립』이라는 제명으로 발간하다가 제22호(1919.10.25.)부터는 『독립신문』으로 제목을 바꾸어 발행했다. 창간 당시 사장 이광수, 영업부장 이영렬, 출판부장 주요한 등의 진용으로 출발했다. 발행지는 상해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동익리(同益里) 5호였으며, 격일간으로 매주 화, 목, 토 3회 발행하였다.
주요한에 따르면, 신문을 발간하자는 의논이 생기고, 돈이 변통되어 “조선문(朝鮮文) 성경에서 활자를 골라서 상무인쇄관(商務印書館)에 주어서 자모를 만들”(주요한, 「기자생활의 추억」, 『신동아』, 1934.5, 124면)었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하기 위해서 중국 가정을 한 채 세 얻고, 위층에는 활자를 배열하고” 아래층에는 이광수와 함께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춘원은 주로 논설과 문학작품들을 쓰고 나는 잡보란과 편집을 맡”는 등 “한동안 단둘이서 소형 사면의 신문을 발행하였다”고 했다.(「춘원 이광수 선생—새해에 생각나는 사람들」, 『신천지』, 1954.1, 198면.) 『독립신문』 초창기에는 이광수와 주요한이 도맡아서 신문을 발행했던 것이다.
국문 성경책의 활자를 사진동판을 떠서 ‘가’에서 ‘횅’자에 이르기까지 약 2천종의 활자를 만들었는데, 한문 문선을 중국인이 하고, 식자 역시 중국인이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국문을 한문으로 잘못 옮기는 등 실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국문 활자도 턱없이 부족하여 두 글자를 한 글자로 줄여 쓰거나 한 글자를 두 글자로 늘려 쓰기도 하고, 비슷한 글자로 대체하는가 하면, 우리말을 한자로 고쳐 쓰기도 했다. 그래서 신문에 오탈자는 물론이려니와 표기가 혼란스러운 곳이 많다. 게다가 일제의 간섭과 재정의 부족으로 인해 발간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과 애국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신문 발간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신문은 국내외에 전달되어 독립운동의 기폭제이자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주요한은 상해판 『독립신문』에서 “논설은 주로 임시사료 편찬위 주임을 겸임한 춘원과 내가 쓰고, 그 외에 조동호 옥관빈, 최근우, 백성욱 등이 기고하였”(주요한, 「상해판 독립신문과 나」, 『아세아』, 1969.8)다고 했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발행했던 것이다.이 신문의 지향과 목적은 「창간사」에 잘 드러난다. 「창간사」는 당시 신문사 사장이자 주필이었던 이광수가 쓴 것이다. 이광수는 창간사에서 독립신문의 사명을아래와 같이 제시했다.

  1. 1) 건전한 언론기관이 있어서 동일한 주의를 고취하고 동일한 문제를 제창하며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의 사이에 서서 그 의사를 소통케 함.
  2. 2) 우리의 사정과 사상은 우리의 입으로 말함.
  3. 3) 만인의 의견을 토로함으로써 신빙할 만하고, 유력한 여론을환기함으로써, 하나는 정부를 독려하며, 하나는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지도함.
  4. 4) 우리들(吾等)은 우리들의 눈으로 통하여 우리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신학술과 신사상을 섭취함.
  5. 5) 국사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더불어 신사상을 섭취함으로써 개조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써 부활한 신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함.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첫째, 사상 고취와 민심 통일, 둘째, 우리의 사정과 사상은 우리의 입으로 말하기, 셋째 여론의 환기, 넷째, 신사상 소개, 다섯째, 신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함 등이다. 궁극적으로 이 다섯 가지 사명은 하나로 귀결되는데 바로 마지막에 언급한 ‘신국민 개조’ 사상이다. 이광수는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독립신문』 창간호부터 21호(1919.10.16.)까지 16회에 걸쳐 「개조」를 발표한다. 이것은 이후 「민족개조론」(『개벽』, 1922.5)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광수의 항일적 필봉은 1921년 3월경 『독립신문』을 그만두고 귀국하면서 사라진다. 이후 『독립신문』은 이영렬, 김승학 등이 차례로 책임을 맡아 계속 발간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 신문은 민족의 독립사상과 운동을 선전 및 전파하는 기관지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였다.

創刊辭

文明人의 生活에 言論機關의 必要함을 更言할 것 잇스리요마는 擧國一致하야 光復의 大事業을 經營하는 此時를 當하야는 더욱 緊要함을 覺하도다. 全國民이 一心이 되고 一體가 되여 堅固하고 統一 잇는大團結을 作함은 財力보다도 兵力보다도우리 事業의 基礎요 生命이니 此을 得하면 成하고 不得하면 敗하리로다. 그러면 此를 得하는 方法이 何에 在하뇨. 健全한 言論機關이 有하야 同一한 主義를 鼓吹하고 同一한 問題를 提倡하며 個人과 個人團體와 團體의 間에 立하야 그 意思를 疏通케 함에 在하도다. 思想鼓吹와 民心統一이 本報의 使命의 一이오.
外國의 新聞이 千百種이 有하더라도 彼等은 각기 自家事에 汨沒하야 우리를 顧할 餘裕가 無하며 兼하야 우리의 事情과 思想을 知悉키 難한지라. 그래서 或은 우리 國土에 起하는 大事件이 外國人에게는 勿論이어니와 我國民中에꺼지도 傳하지 못하며 或은 우리의 主義와 行動을 誤解하야 莫大한 損失을 招케 하도다.

우리의 事情과 思想은 우리의 口로 說하여야 할지니 此는 本報의 使命의 二며. 이 存亡이 分하는 岐路에 立하야 一은 當面의 絶敵을 當하며 一은 世界의 輿論을 動하여야 할 吾等은 合할 수 잇는 意見을 모다 合하야 우리 國民의 最大最高한 能力을 發揮하여야 할지니 이리함에는 萬人의 意見을 吐露하야셔 信憑할 만하고 有力한 輿論을 喚起하야써 一은 政府를 督勵하며 一은 國民의 思想과 行動의 方向을 指導하여야 할지라. 輿論의 喚起가 本報의 使命의 三이요.
오래 異族의 箝制下에 在하야 世界와 交涉을 斷하엿뎐 우리 民族을 今으로붓터 獨立한 國民이 되여 世界列國民으로 더볼(불)어 角逐의 生活을 始하려 하는지라. 이리함에는 우리 國民은 相當한 準備를 必要할지니 卽 文明國民에 必要한 知德의 準備라. 吾等은 吾等의 眼을 通하야 吾等에게 適當하다고 生覺하는新學術과 新思想을 攝取하여야 할지니 新思想紹介가 本報의 使命의 四요.

우리 國民은 過去에 榮譽로온 歷史를 有하엿고 此를 通하야 傳하는 高潔하고 勇壯한國民性을 有하엿으나 一은 儒敎의 橫暴에 一은 日本族의 橫暴에 만히 消滅하고 掩蔽된지라. 有形한 國土는 차라리 失할지연(언)졍 先祖의 精神이야 엇지 잠(참)아 失할가. 健全한 國民敎育을 受치 못한 不幸한 우리는 此榮譽로온(운) 歷史를 닛고 高潔勇壯한 國民性을 活用치 못함에 至하도다. 그러나 우리의 精神에는 아직도 그 高貴한 萌芽가 存하니 一風一雨가 足히 此를 蘇生케 할지라. 國史와 國民性을鼓吹하고 幷하야 新思想을 攝取하야써 改造或은 復活한 民族으로써 復活한 新國民을 造하려고 努力함이 本報의 使命의 五라.
이러한 五大使命을 負하고 本報가 創刊되도다 能力이 大하야 그러함이 아니오 不得已하야 그러함이로다. 이의 責任으로 나섯스니 誠과 力을 다하야 奮鬪하려니와 未嘗不 匹馬單騎로 萬里征途에 登한 感이 有하도다. 원컨된(댄) 讀者 諸位와 同胞 國民은 그 援助하고 愛護하실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