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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임시의정원의 여성의원

임시정부의 인물들

임시의정원의 여성의원

임시의정원 역사에서 여성의원은 김마리아, 양한나, 최혜순, 방순희, 김효순, 신정완, 지경희 이렇게 7명이다. 국가독립을 위해 국민의 의무를 다한 여성의원의 이야기를 담았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시작

1919년 4월 10일 하오 10시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한 건물에서 입법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가 열렸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법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입법기관이 먼저 출범하였다.
첫 개원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한 29명의 의원 중에서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와 백남칠이 선출되었다. 회의는 밤을 새워 진행되었고, 다음 날인 11일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다. 이어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한 내무·외무·재무·법무·군무·교통 각부의 총장과 차장을 선임하였고, 헌법인 10개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임시헌장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절 평등임....”은 영구토록 변치 않을 민주주의 헌법의 기본 조항이라 하겠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는 수립되었다.
다음은 임시의정원법안을 마련하기 위한 법안 기초위원이 선정되었고 4월 25일에 13장 57개조의 임시의정원법이 통과되었다. 임시의정원법 1조는 “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의원으로 조직함” 제2조는 “의원의 자격은 대한국민으로 중등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의 남녀”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은 일찍이 1919년에 남녀평등의 참정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은 것이다.

임시의정원의 여성 의원들


첫 여성의원 김마리아의
파크대학 졸업사진 ⓒ독립기념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의 역사적 현장에 여성은 없었다. 임시의정원 역사에서 여성의원은 김마리아, 양한나, 최혜순, 방순희, 김효순, 신정완, 지경희 이렇게 7명이다. 첫 여성의원이 된 이는 김마리아이다. 1910년 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하고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한 김마리아는 황해도지역 3˜1독립운동을 준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이 되어 군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어 1919년 11월에 다시 피체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하자 일제는 병보석을 허락했고 이 틈을 타 임시정부는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켰다. 1921년 8월에 상하이에 도착하고 나서도 상당 기간 치료받으며 몸을 추슬러야 했다. 김마리아는 제10회 임시의정원(1922.2.8.~1922.6.)에서 김구와 함께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로써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직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열심히 활약했지만회의가 결렬되어버리자 김마리아는 1923년 유학길에 올라 미국 파크대학 첫 여성의원 김마리아의 파크대학 졸업사진 ⓒ독립기념관 교와 콜롬비아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미국 한인여성들에게 자신의 독립정신을 전파하며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김마리아는 여성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기에 첫 여성 의정원 의원이 되었지만 의정 활동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임시의정원의 두 번째 여성의원은 양한나(1894.3.3.~1976. 6.26.)이다. 양한나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본 요코하마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쑤저우(蘇州) 경해여자사범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제11회 임시의정원(1923.2.15.~5.19.) 보궐선거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중한호조사에 참여하여 한중간 상호이익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24년 어머니 병환으로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유치과를 마치고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임시정부가 침체에 빠지던 시기인 제23회 임시의정원회의(1931.11.6.~1931.12.) 때에 보궐선거에서 최혜순(崔惠淳, 1900.4.2.~1976.1.16.)이 전라도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전남 광주 출신으로 광주에서 소학교를 나오고 광주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한 최혜순은 부친을 대신하여 다섯 명 동생들의 교육을 도맡은 가장이었다. 그러던 중 상처를 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을 소개받고 상하이로 찾아가 결혼한 진취적인 여성이다. 임시정부 마당로(馬浪路) 청사 부근인 백래니몽 마당로 464에 산파의원인 혜성의원을 개원하고 의원 2층에서 살림집을 차렸다. 의원을 경영하면서 상해 한인애국부인회 집사장이 되어 3·1운동 기념일과 국치기념일에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작성하고 배포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중국과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한인 각단체들의 대표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상해 한인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고 상해각단체대표회의에 회계의 직무를 맡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로 남편과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랐지만 그녀는 상하이를 떠날 수 없었다. 따라서 피난길 모처에서 열린 제24회(1932.11.28.) 임시의정원회기의 의정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결국 최혜순은 제25회(1933.3.6.~3.7.) 회기에 사직원을 내고 말았다. 1934년 급성폐렴으로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도 1936년 3월 서판암(徐判岩)의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입교를 주선하는 등 국내와의 연락 알선 및 독립자금 마련 활동을 전개하며 활동했으나 1937년에 두 딸을 데리고 고국으로 귀국했다. 인천항에 내린 즉시 인천경찰서에 1개월간 구금되었다 형사의 감시하에 광주로 동행하여 두 자녀는 외가에 보냈고 최혜순은 몇 개월을 더 구금당했다가 풀려났다.

1943년 중경에서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과 방순희(맨 오른쪽)

©독립기념관

이후 임시의정원의 여성의원으로 활약한 이는 제31차 회의(1939.10.3.~12.5.) 보궐선거에서 함경도 대의원으로 당선된 방순희(1904.1.30.~1979.5.4.)이다. 해방되기까지 임시의정원을 지킨 최장기 여성의원이기도 한 방순희는 능숙한 러시아어 실력과 국제 감각을 지닌 당대에 몇 안 되는 지성을 갖춘 여성이었다. 대소련 전문가이며 선전원으로 활동하며 좌·우익의 진영논리에서 떠나 광복진선운동에 공헌하였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1911년에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에서 성장하였다. 15세 때에 서울로 유학와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백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국내로 들어와 활동할 때 친러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요시찰인으로 일제에 주목을 받았다. 혁명투사 이백초와 결혼하였으나 이백초는 1934년 7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자동차 전복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언론은 방순희를 ‘혁명투사 이백초의 미망인’이라고 소개하였다. 남편과 사별 후 방순희는 공산화된 러시아를 떠나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이곳에서 과거 동지였던 현익철과 재회, 1936년 초에 재혼하였다. 1938년 5월 7일 창사 남목청의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열린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3당 통일회의를 하던 중 회의장에 난입한 이운한의 권총에 맞아 현익철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바람에 또다시 남편을 잃는 슬픔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치장에서 열린 제31차 임시의정원회의 때에 의회로 진출한 것이다. 방순희는 1942년 강원도 출신이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고등부관과 임시정부 경위대 대장을 역임하고 임시의정원 강원도 대의원인 김관오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제32회 임시의정원회의(1941.10.1.~10.13.)에서는 왕령(王玲), 즉 신정완이 전라도 대의원으로, 김효숙은 강원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제32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파란으로 끝났다. 의장 김붕준은 정원을 채우지 못한 선거구에 좌파 인물들을 보궐선거로 충원하였는데, 좌익인사를 영입한 조치는 곧바로 저항을 받아 1941년 제33차 임시의정원회의(1941.10.15.~10.17.)에서 의장 김붕준이 비법적 선거로 선거행정과 선거법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의장직에서 면직당했다. 이 때문에 앞서 선출된 신정완과 김효숙을 포함하여 보궐된 충원된 좌파계 의원 22인 모두는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충칭 오사야항 1호에서 열린 제34차 임시의정원회의(1942. 10.18.~11.25.)는 전년의 제33차 때와는 정세가 완전히 반전되어 당파와 이념을 초월해 좌우통합을 이룬 역사적인 의회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23명의 임시의정원 재적 대의원 수는 지방 8도와 러시아령, 중국령, 미주령을 포함한 11개 선거 구역에서 23인의 의원이 새로이 보선됨으로써 대의원 수는 46인이 되어 가장 성황을 이룬 회의로 기록되었다. 이때 방순희는 1만 5천 명 여성을 대표하는 홍일점 여성의원이었다.
이듬해에 열린 제35차 임시의정원의회(1943.10.9.~1944.4. 15.)에서 신정완은 전라도 대의원으로, 지경희는 함경도 대의원으로 각각 보선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35차 회기 이래 해방이 되기까지 방순희, 신정완, 지경희 3명의 여성 대의원들이 활약하였다. 신정완(1917.3.6.~2001.4.29.)은 왕령(王玲)이라는 이명으로 활동한 해공 신익희의 딸이다. 부친 신익희는 3·1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1922년 말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는데 신정완도 부친을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성장하였다. 15세 되던 해인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임시정부가 파견한 산동성 제2전구 사령부에 공작원으로 지하공작 첩보 활동을 했으며 임무를 완수한 후 충칭으로 복귀하였다. 또 다른 여성의원 지경희(1911.~미상)는 함북 출신이라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다. 해방된 후 열린 마지막 회의인 제39차 임시의정원회의에 참석하고 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기까지 의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해방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아 본적지로 귀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운동기 국민의 의무를 다한 여성들

독립운동기 여성들은 국민의 의무로서 국가독립과 민족자유, 정치민주를 지상의 목표로 삼아 그 실현을 위해 열성을 다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임시의정원 여성의원은 1천 5백만 한국 여성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으로 의정활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각성만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1940년 6월 16일 충칭에서 창립된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여성들은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 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행동강령을 선포하고 여성들의 투쟁 목표는 ‘대한독립’과 ‘민족해방의 완성’을 위해 그 방향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남녀가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삼은 바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해방 후 마련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법에서 국민으로서 만 21세에 달한 자는 성별, 재산, 교육, 종교의 구별 없이 국회의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여성 국회의원 수의비율은 항상 10% 미만 대를 넘지 못했고 2004년 17대 국회에서비례대표의 50%를 여성의원으로 한다는 여성 할당제가 채택되면서 여성의원 비율을 높일 수 있었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300명 의원 정원에서 여성의원 수 57명으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거두었지만, 그 비율은 19%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여전히 여성에게 정치 기회의 벽이 너무 높고 두텁다. 독립운동 시기에도 여전하여 여성은 남성의 일을 돕고 지원하는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받았음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여성들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주변적이라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며 그것이 국민의 도리와 의무라고 생각했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