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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회와 『한일관계사료집』의 편찬자들

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회와 『한일관계사료집』의 편찬자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19년 7월 임시사료편찬회를 조직하고, 국제연맹회에 제출하기 위해 9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다.

—글. 윤대원(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총재 : 안창호
주임 : 이광수
간사 : 김홍서

위원 : 김병조, 이원익, 장 붕, 김 한, 김두봉, 박현환, 김여제, 이영근

조역 : 김명제, 김석황, 김성봉, 권지룡, 유영국, 박석홍, 박순흠, 박염옥, 박지붕, 우승규, 신균창, 차균현, 차정신, 정명익, 이기영, 이강하, 강현석, 김항신, 정혜선, 조숙경, 이메리, 이봉순

임시사료편찬회 위원들(1919. 앞줄 왼쪽부터 세 번째 이광수·김두봉·김병조, 뒷줄 이원익·장붕·미상·안창호·김여제·김홍조·박현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19년 7월 임시사료편찬회를 조직하고, 국제연맹회에 제출하기 위해 9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독립의 역사적 정당성과 강제 병합의 불법성을 기술한 것이자 직접적으로는 강제 병합 이후 일제가 세계를 상대로 잔혹한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고 조작 날조한 선전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려고 임시정부가 편찬한 일본의 한국침략사이자 항일독립운동사이다.

임시사료편찬회를 꾸리다

1919년 6월 정부 수립과 동시에 온 힘을 쏟은 파리강화회의의 독립 청원 운동이 실패하자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 결과로 열릴 국제연맹회에 다시 기대를 걸고 독립 청원에 나섰다. 당시 국무총리대리 겸 내무총장 안창호는 7월 8일 제5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국제연맹회에 제출할 안건이 중대한 문제인 즉 전민을 대표한 의회에서 대표를 각처로 파견, 조사하여 이를 편찬하여 제출할 필요가 인정”된다고 하면서, 임시정부의 진행방침 가운데 하나로 한일관계사를 국무원에서 조사, 편찬 중이라고 했다.
7월 10일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에 이 일을 위임하기로 결정하고 다음 날 김병조·오의선·최창식·정인과·이춘숙 5인을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특별위원으로 선출했다. 국제연맹회에 제출할 독립 청원문의 참고용인 한일관계사 편찬은 이미 7월 2일부터 국무원에서 진행 중이었고, 7월 7일 한일관계사 편찬을 위한 임시사료편찬회(이하 편찬회)를 정식으로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는 한일관계사를 국제연맹회에 제출할 청원문의 참고용으로 편찬한다고 했으나 또 다른 절실한 목적이 있었다. 강제 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Annual Reports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이라는 영문판 연보를 제작하여 세계에 배포하고 있었다. 연보의 제목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개혁과 진보’(Reforms and Progress)로 미화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연보는 일제가 자신들의 불법 침략을 합리화하고 잔혹한 탄압과 경제적 침탈 그리고 독립운동을 왜곡 내지 폄훼하는 조작 날조한 과장적 선전물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 손으로 사실대로 기술한 사료집을 편찬하여 세계에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편찬회는 구성되었지만, 그 앞에는 대략 세 가지 난관이 있었다. 첫째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국제연맹회에 제출하려면 늦어도 9월 1일 이전에 발송해야 했다. 또한 사료집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자료 수집을 위해 4, 5명을 국내에 몰래 보냈으나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고, 심지어 도쿄에 있는 동포에게 참고도서의 목록과 대금을 보냈지만, 이 역시 일제에 압수당했다. 때문에 편찬회는 상하이에서 ‘우연히 손에 들어온 재료’에 의존해 편찬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은 사료집을 편찬할 인물의 부족이었다. 국내에는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많이 있으나 요행히 상하이에 온 자는 10여 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태반은 문필에 인연이 없는 자였다.
편찬회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희망과 열정으로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사료집 편찬은 1919년 8월 중순경 거의 완료했으나 시간이 없어 활판 인쇄를 하지 못하고 십여 명이 필경에 매달려 9월 23일 『한일관계사료집』 1백 질을 등사 완료했다.

임시정부의 공식 역사 편찬물, 『한일관계사료집』

『한일관계사료집』은 삼국 초부터 1919년 8월 29일까지의 한일관계를 4부(4책) 739쪽에 걸쳐서 서술했다.
제1부에서는 삼국 초부터 강제 병합까지의 한일관계사를 연대기 순으로 서술했다. 한일관계를 일본의 한국 침략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한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여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한편 일본의 침략이 이런 문화전파의 은인을 배신한 부도덕한 행위임을 강조했다.
제2부에서는 한일 양 민족 및 국민성의 차이, 우리 민족의 일본인에 대한 경멸 및 역사적 원한, 일본인에 대한 불신임, 우리 민족의 민족력, 집회·결사·언론·출판의 금지 및 종교 탄압에 대해 개별 논설 형식으로 서술했다. 예컨대 한국인이 일본인을 ‘왜놈’이라 칭한 유래를 들거나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원한을 들어 양 민족의 민족성과 국민성이 다름을 서술했다. 또한 3·1운동 후 일제가 3·1운동에 대해 “일부 불령도배의 선동으로 경성과 기타 지방에서 군중의 망동을 감행한 자가 있다”고 왜곡 축소하거나 병합 후 일본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적으로 대우한 적이 없다”고 대외적으로 거짓 선전한 사실 등을 제시하며 일본을 결코 신임할 수 없다고 했고, 나아가 산업과 문화 능력에서 결코 일본에 병합되어서는 안 되는 사유를 실증적 사례를 통해 제시했다.
제3부에서는 병합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실상을 서술했다.


ⓒ독립기념관

『한일관계사료집』 (1919)

제3부의 내용은 편찬자들이 병합 이후 직접 경험했거나 보고 들은 생생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썼고, 여기에 일제가 작성한 각종 통계 자료와 법령 원문을 인용하여 내용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높였다. 그 때문에 제3부는 병합 후 일제의 잔혹한 침략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편찬자들로서는 세계인들이 가장 주목해 주기를 바란 부분이었다.
제4부는 1919년 3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국내외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원인, 경과, 결과는 물론 3·1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일제가 대외적으로 전파한 ‘가짜뉴스’ 등을 자세히 서술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전국 도별 군 단위로 시일·시위회수·집회 인원수·사상자 수·훼손학교·교회당 등을 정리한 「독립운동일람표」를 작성하여 별첨 자료로 첨부했다. 이 일람표는 다소 오류가 있지만 3·1운동을 축소, 왜곡하려는 일제의 의도를 계량적으로 폭로한 임시정부 최초의 3·1운동에 대한 정리이자 공식 기록이다.
이 밖에도 제1부 말미에는 ‘강화도수호조약’에서 ‘병합늑약’까지 일제의 침략 과정을 보여주는 17종의 주요 조약문을, 제2·3부에서는 보안법·회사령·조선광업법 등 일제가 공포한 법령을, 제4부 말미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17종의 선언서와 각종 문서를 첨부하여 사료집에 대한 사실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했다. 임시정부가 이 책을 일반 역사서가 아닌 ‘사료집’으로 편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1919년 8월 29일까지 당대사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최초의 공식적 사료집은 이후 3·1운동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 서술의 기초 자료가 됐다.

『한일관계사료집』의 편찬자들

‘시간의 급박함’, ‘사료 모집의 어려움’, ‘인재의 결핍’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료집 편찬은 오직 편찬자 모두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비통함을 호소하려는 정성” 때문에 가능했다.
총재, 주임, 위원, 조역 등 편찬회 33인은 사료집 편찬에 각자 어떤 역할을 했을까? 편찬회 주임 이광수는 사료집의 서언에서 “이 사업을 계획하고 실행케 한데는 국무총리대리 겸 내무총장 안창호 씨요. 고대로부터 병합에 이르는 한일관계 사료를 다수 모집하는 데는 김두봉 씨며, 사료를 구하기 가장 곤란한 독립운동 사실을 모집하는 데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김병조와 이원익 양 목사라”고 했다.
안창호는 사실상 당시 임시정부를 주도하면서도 편찬회의 총재를 맡아 사료집 편찬에 앞장섰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이광수는 편찬회 주임으로서 편찬 사업을 실무적으로 도우며 총괄했을 것이다. 김병조 등 위원 8명은 주로 집필을 담당하고 나머지 조역은 자료 모집 및 정리, 필경 작업 등을 맡아 협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의 서언에 따르면 김두봉, 김병조, 이원익 3명이 사료집 편찬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경상도 기장 출신인 김두봉은 어려서 집에서 한학을 배우고 1908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강제 병합 뒤인 1913년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당시 최남선이 주재하던 조선광문회에서 소년잡지 『청춘』을 편집하는 일에 종사했다. 또한 보성중학 시절 은사인 한글 연구의 선구자인 주시경 밑에서 한글 연구에 몰두하여 광문사에서 발행한 『조선어문전』 편찬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그해 4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순한문신문 『신대한신문』의 편집일을 맡기도 했고, 신한청년당에서도 활동했다. 이후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선출됐고 7월에는 사료집 편찬위원이 됐다. 오랜 한글 연구와 국내와 상하이에서의 책, 잡지 및 신문 등의 편찬과 편집 활동의 경험이 사료집 편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인 김병조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1913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신학교에 다닐 때 이승훈 등과 친분을 맺었다. 1919년 2월 선천에서 열린 의산노회에서 3·1운동의 동지를 규합하러 서울에서 온 이승훈을 만나 3·1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 그는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평안북도 일대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원익, 김구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4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김병조는 이후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주로 임시정부 수립 초기 법제를 정비하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사료집 편찬위원으로 선출됐다.
이원익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인데 국내에서의 이력과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김병조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한 목사 출신이란 사실에서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를 주도했을 것이다. 이원익 역시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그해 7월 사료집 편찬위원에 임명됐다. 김병조와 이원익은 3·1운동을 주도한 주체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 목사이자 상하이로 망명하기까지 한 달 넘게 국내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에 3·1운동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 집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일관계사료집』은 비록 임시사료편찬회 33인의 열과 성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독립’이란 민족의 염원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범정부 차원의 성과물이었다. 또한 『한일관계사료집』은 일제의 불법적 침략과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폭로하고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임시정부, 아니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비통함을 호소하려는 정성”으로 쓴 일본의 한국침략사이자 항일독립운동사이다.


ⓒ공훈전자사료관

사료집 편찬위원 김병조


ⓒ공훈전자사료관

사료집 편찬위원 이원익

〈참고문헌〉
『독립신문』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 2005
박걸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서 편찬」,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하, 1999
김희곤, 「해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