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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충칭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착과 외교 활동

특집

충칭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착과 외교 활동

— 글. 김국화(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줄임)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등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 수도로 정한 곳이자, 교통의 요지였다.
임정은 충칭에 정착하자마자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정부 조직을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에서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개편했다. 1942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세력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통일의회'가 구성되었다.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토대로 미국, 영국과 연합작전을 수행했고, 연합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를 전개했다. 그 결과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중국 정상회의에서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채택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민족혁명당의 김규식金奎植이 부주석, 김원봉金元鳳이 군무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임시정부는 충칭지역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한 좌우연합 정부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한인교포들의 충칭 정착

충칭이 전시수도가 되면서, 이에 따라 임정 요인, 각 정당의 요원, 가족 등도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00여 명은 1932년 상하이를 떠나 피난 생활을 하면서 1940년 충칭과 투차오土橋에 정착했다. 이후 충칭을 가로지르는 양쯔강을 사이에 두고 스중구市中區에는 임정과 한국독립당 세력이, 난안구南岸區에는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등이 자리를 잡았다.
임정은 충칭에서 네 번 거처를 옮겼다. 양류제楊柳街→스반제石版街→허핑로 우스예샹和平路 吳師爺港→롄화츠蓮花池 등으로 청사를 옮겼는데, 폭격으로 인한 가옥 붕괴, 화재 등이 이유였다. 청사는 업무공간이자, 임정 요인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이기도 했다.
한인교포들은 충칭에 정착한 뒤에도 일본군의 폭격과 대피가 일상생활이었다. 폭격으로 건물이 부서지거나, 폭격과 진동으로 약해져 있던 건물이 비가 오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한인교포들은 살던 집이 성한 건물이 아닌 데다가 이리저리 지붕만 막아놓고 살던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인교포들은 날씨가 좋을 때는 공습을 걱정하고, 광풍이 불거나 비가 오면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충칭 시내에는 임정이 한인교포를 위해 마련한 집이 있었다. 임정 청사가 있던 우스예샹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포 가족들이 살 수 있게 방을 만들어 놓고 한 가족이 한 방씩 사용할 수 있게 건물을 지었다. 집이 몹시 습하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음습하고 쥐가 많을 뿐 아니라 방안에도 쥐가 돌아다녀서 거주 환경이 좋지 못했다. 비가 오면 방안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한인교포들은 충칭 시내, 북안, 남안, 투차오 등지에 정착하여 약 5년간 비교적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이어진 긴 이동을 마치고 궁색하지만 정착하여 화목하게 지냈다. 기약 없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의지하며 독립과 귀국을 고대하던 시기였다.


1940년대 충칭 전경


롄화츠 청사에서 거행된 국기게양식(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임정은 활동을 이어갔다. 임정은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을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하고자 했고, 또 임정 승인과 전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외교활동을 펼쳤다.
임정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는 외무부였다. 외무부는 내무부·군무부·재무부·법무부와 함께 임정의 핵심 행정부로, 임정 수립 당시부터 외교를 담당했다. 외무부는 충칭 임정에 가서 비교적 정연한 조직과 체계를 갖췄다. 1940년 10월 주석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과 1944년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면서 헌법 개정이 있었고, 이를 통해 외무부의 조직과 직원에도 변동이 있었다.
1939년 10월부터 임정 외무부장은 조소앙趙素昻이었다. 조소앙은 임정 수립에 참여한 이래 임정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다. 임정 수립 직후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프랑스로 간 이후, 스위스 루체른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안을 통과시켰고, 이후 영국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을 거쳐 혁명 직후 러시아를 순방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임정이 가장 긴밀한 외교를 벌였던 나라는 중국이었다. 임정이 중국 영토 안에 근거를 두고 활동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현실적으로 임정의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광복군 활동 경비의 대부분을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정과 중국이 교섭하는 통로는 중국 국민당이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와 장제스가 면담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연락 통로가 마련된 것이었다. 임정이 충칭에 정착한 이후에도 주요 교섭 창구는 중국 국민당이었다. 임정은 중국 국민당을 통해 임정의 국제적 승인 문제, 광복군 창설에 대한 비준과 지원 문제, 임정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협조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외에 임정 청사 및 임정 요인 가족의 생활 문제 등 임정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가지고 중국 정부와 교섭했다.
중국과 함께 임정이 외교적 관계에 주력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은 12월 10일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인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국무장관에게 발송했고, 충칭의 미국 대사관과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후 한중 대표들의 기념 사진(1940. 9. 17.)

영국과는 군사적인 면에서 관계를 맺었다. 1942년 일본은 영국 식민지인 버마와 인도를 공격해 영국군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1942년 겨울 조선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인원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인 김원봉은 최성오崔聖五, 주세민周世敏을 인도에 파견했다. 이를 계기로 임정과 영국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영국군의 대일작전을 협조하고 영국군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대일투쟁을 원조한다는 원칙하에, 대원들을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활동하도록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협정 체결 후, 실행은 광복군에서 맡게 되었다. 광복군총사령부는 각 지대에서 인도에 파견할 대원을 선발했고, 한지성韓志成, 문응국文應國 등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라는 이름으로 1943년 8월 말 인도 캘커타로 파견되었다. 인도에 도착한 광복군 대원들은 1944년 초 임팔Impal 전선에 투입되었고, 1945년 7월 영국군이 랑군을 점령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패퇴시킬 때까지 약 2년간 영국군과 함께 항일전을 수행했다.
프랑스와의 교섭은 주중프랑스대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프랑스대사와 외무부장은 자주 만나면서, 이 과정에서 프랑스임시정부가 한국 임정을 승인한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임정은 이를 외교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대내외에 공포하고, 서영해徐嶺海를 주프랑스대사로 선임하기도 했다.
임정은 열강들이 모여 개최하는 국제회의를 통해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43년 11월 임정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국제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제스를 찾아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충칭 투차오 우리촌에서 3·1유치원 추계 개학 기념사진(1941. 10. 10.)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50여 개국이 모여 국제연합을 창설하고, 전후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다. 임정은 이 소식을 접하고,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다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1945년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이 있었다. 따라서 임정은 2월 28일 제37차 임시회의를 소집하여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또한 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이승만李承晩을 단장으로 하고, 단원 9명을 선임했다. 이들과 함께 외무부장 조소앙과 부주석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조소앙과 김규식의 비자가 나오지 않았고, 이승만을 비롯한 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에 갔지만 임정이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충칭 시기 임정은 열강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임정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벌였다.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은 충칭 시기 임정 활동이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

〈참고문헌〉
김성은, 「중경임시정부시기 중경한인교포사회의 생활상」, 『역사와경계』 70, 부산경남사학회, 2009
조건, 「중일전쟁기 일본군의 중국 공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苦鬪」, 『한국근현대사연구』 95, 한국근현대사학회, 2020
한시준, 「중경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