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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유럽 제국帝國에서 펼쳐진 식민지 해방 운동

특집

유럽 제국帝國에서 펼쳐진 식민지 해방 운동

: 프랑스 파리의 고려통신사

— 글. 윤종문(서강대학교 디지털역사연구소)

1920년 12월 14일 20세의 한 왜소한 청년이 파리에 들어왔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을 이룬 국가로 자유, 평등, 박해를 지향했다. 하지만 그 이면은 그렇지 않았다. 자유, 평등, 박해는 프랑스 시민, 넓게는 유럽인들에게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특히 한 명의 한국 청년이 프랑스 파리에 왔을 때는 전무했던 제1차 세계대전 후유증 앓이를 하고 있었으며, 영국 못지 않게 식민지 국가를 경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그 어떤 국가보다 이중성을 보이고 있었다.

부산 초량에서 프랑스로

한 청년의 이름은 서영해徐嶺海였다. 1902년 부산 초량에서 태어났다. 부산 초량은 조선시대 때부터 왜관倭館이 자리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 할 때, 일찍부터 초량을 통해서 일본의 신문물을 접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7세인 1919년에 혈기왕성하게 3·1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가 택한 곳은 상하이上海였다.
그가 상하이로 간 이유는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상하이는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갈 수 있는 창구였기 때문이었다. 서영해는 당초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상하이에 갔다. 하지만 신규식申圭植과의 만남을 통해서 유학의 장소를 미국에서 프랑스로 바꿨다. 당시 중국에서 일고 있던 근검공학勤儉工學(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다)의 기치를 내걸고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에 유학을 갔던 것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신규식은 중국인의 프랑스 유학 주선 기관이었던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를 통해서 한국 청년들을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다.
서영해는 1919년 11월 6일 정석해鄭錫海 등 21명의 청년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고, 12월 13일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한 다음날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던 파리위원부를 찾아갔다. 여기서 독립운동가 황기환黃玘煥을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파리 북부의 작은 도시 보배Beauvais에서 리세(Lycée, 프랑스는 공립학교를 리세라고 불렀으며, 사립중등학교를 꼴레즈College라고 불렀다.)에 들어갔다. 여기서 프랑스어 공부에 매진하였다.
리세에서 공부하면서도 민족의식은 남달랐다. 대표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역사 시간에 프랑스 교사가 한국을 “조선 인구는 불과 6백만이요. 민족은 매우 게을러서 조상이 전해준 박약薄弱한 문명까지도 지금은 그 형적도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서영해는 “조선의 인구는 2천만이며, 4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오히려 미개한 국가라고 일갈一喝했다. 당돌한 한국인 청년 행동에 놀란 교사는 그를 학교에서 쫓아냈지만, 다른 교사의 후의로 퇴학은 면할 수 있었다. 더욱이 교장의 도움으로 한국사를 공부하여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점을 통해서 서영해의 남다른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부산박물관

이승만과 서영해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찍은 사진(1933)


서영해는 1926년 파리 서쪽에 있는 샤르트르Chartres에 소재한 고등중학교로 옮겼다. 샤르트르 고등중학교는 당시 리세 마르소Lycée Marceau로 불렸다. 1926년 말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고사를 봤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치른 철학반 시험을 통과했으며, 여기서 1학기 동안 공부했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의 사망으로 더 이상 학비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1927년 12월 13일 롱위Longwy로 갔다. 1928년 중반이 넘어서는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 이유는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등사회연구학교École des hautes études sociales, EHES 저널리즘 학교École de Journalisme에 들어갔다. 여기서 1년간 수학하는 것으로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쳤다.

고려통신사 설립과 운영

1929년 9월 28일 자신이 머물고 있던 말브량슈Malebranche 7번지 호텔에서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만들었다. 고려통신사 설립 목적은 ‘뉴스 통신’ 사업에 두었다. 스스로 통신사의 통신원을 자처한 그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실상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알렸다.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정부와 지식인, 민중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전적 소설인 『어느 한국인의 삶』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자전적 소설은 프랑스에 유학 온 지 9년 만에 저술한 것이다. 1921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교와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강용흘의 자전적 소설 『초당』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서영해만의 독특한 민족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영해는 『어느 한국인의 삶』에서 3·1운동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서〉를 프랑스어로 실었다. 독립선언서 설명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유럽 여러 국가들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고려통신』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고려통신사와 『고려통신』을 통해서 어떤 구체적인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영해가 1940년 7월 20일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고려통신사의 목적은 “(유럽 여러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국 소개, 일화 배척, 일본의 외교 선전을 막는 것”이라고 했다. 파리를 중심으로 전 유럽을 대상으로 발칸반도에서 근동까지 돌아다니며 강연, 신문 투고 등으로 한국 독립운동과 열망을 알리는 것에 목적을 둔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는 대규모 활동이고 빈약한 자금 형편에서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부 후원을 바탕으로 프랑스 정부와 언론기관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알렸을 것이다.


ⓒ독립기념관

서영해 거주지와 고려통신사 사무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군 만행을 알린 서영해

서영해는 파리에 머물면서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널리 알리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한국의 최고 독립운동 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리는 한편, 황기환이 떠나고 없던 자리를 대신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유럽 외교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윤봉길 의거 이후 어려움에 처한 한인들의 실상을 유럽에 알렸다.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원인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리는 일본군 승전 기념식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단행했다. 서영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4월 29일이었다. 파리 석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서영해는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는 즉시 파리 언론에 “한인들을 절대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보냈다. 그의 호소문은 다음날 프랑스 언론에 실렸다. 일본군이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간다는 전보를 서영해에게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프랑스 정부와 언론에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소식을 전했다.
상하이 교민단장이었던 이유필李裕弼은 “형세가 매우 급박하니 법국法國(프랑스)에 여론을 환기하라.”는 전보를 서영해에게 보냈다. 서영해는 프랑스 사회당 에두아르 에리오Édouard Herriot 의원에게 프랑스 정부가 나서서 한인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또 『고려통신』을 통해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상을 프랑스 사회에 알렸다.
이처럼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9년간 공부를 했으며, 한국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독립운동 기관인 고려통신사를 만들었다. 그는 열악한 형편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럽 여러 국가에 알렸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원으로 활동했다.



서영해, 『어느 한국인의 삶』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