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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상하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집

상하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 글. 한재은(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강사)

한적한 어촌에서 국제도시가 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면 상하이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중국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되었고, 이후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항저우杭州로 옮겨갈 때까지 13년 동안 상하이에서 활동하였다.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하며 상하이를 찾고 있다.
현재 상하이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지리적으로 상하이는 창장長江과 동중국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해 있다. 본래 상하이는 바다와 인접한 한적한 어촌이었다. 청나라 초기인 1684년 해금 정책이 해제되고 난 후,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무역이 발달했고 중요한 항구로 자리매김했다. 그렇지만 개항 이전 상하이는 여전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평범한 현성縣城일뿐이었다.


ⓒ독립기념관

샤페이로 청사 앞의 현재 모습


이런 상하이가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바뀌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전환점이 된 계기는 아편전쟁과 이로 인해 체결하게 된 난징조약南京條約, 그리고 조계지였다. 1840년 영국과 중국은 아편 문제로 전쟁을 벌였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1842년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결과 광저우廣州, 샤먼厦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와 더불어 상하이도 열강에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상하이에는 서구 열강의 조계지가 세워졌고, 서양인들이 모여들면서 크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845년 가장 먼저 상하이 땅에 조계지를 설치했다. 영국이 조계지를 마련한 곳은 상하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황푸강黃浦江과 쑤저우강蘇州河이 만나는 곳으로, 오늘날 와이탄外灘 일대였다. 당시, 이 지역은 갈대숲이 우거진 진흙밭이었지만, 주변의 강을 통해 영국의 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지리적인 장점이 있었다.


중국 상하이 사진엽서, 프랑스 조계지(20세기 초)

영국에 이어 미국과 프랑스도 차례로 상하이에 조계지를 세웠다. 미국은 1848년 쑤저우강 이북 지역인 훙커우虹口 일대에 별도의 조계지를 마련하였다가 1863년 영국 조계지와 합쳤다. 이를 영미 조계 또는 공공公共 조계라고 불렀다. 프랑스는 1849년 영국 조계지와 중국인 거주지역인 상하이 현성 사이의 지역을 프랑스 조계지로 삼았다. 조계지를 설치한 열강들은 와이탄 일대를 개발하여 서양식 건축물을 지었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후 조계지는 몇 차례에 걸쳐 확장하고 발전하였다. 조계 안에는 전등과 공중전화, 궤도전차를 비롯한 서양의 선진적인 기술이 도입되며, 도시화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1900년을 전후하여 상하이의 도시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상하이 현성을 비롯한 중국인 거주지역, 영국과 미국의 공공 조계, 그리고 프랑스 조계로 구분된 것이다.
그렇지만 조계 내에는 외국인만 거주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계가 설치된 초반에는 중국인과 외국인이 분리하여 거주하는 ‘화양분거華洋分居’ 정책을 실행했다. 하지만 전란을 피해 조계지로 들어온 중국인들이 급증하자 화양분거 정책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중국인과 서양인이 함께 살아가는 ‘화양잡거華洋雜居’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 러시아혁명 이후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대인 난민들도 상하이에 모여들었다. 또한 훙커우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급증하며 생겨난 일본인 거주지역과 일본영사관도 있었다.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상하이에 온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개항 이후 상하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변모한 상하이에는 ‘동양의 파리’를 비롯하여 ‘십리양장十里洋場’, ‘천 가지 얼굴’, ‘마도魔都’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다. 상하이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국제도시가 된 것이다.

프랑스 조계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후 독립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장소로 떠오른 곳이 상하이였다.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조계 안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 들어 볼 수 있다. 먼저 상하이가 독립운동기지로 부각된 이유로는 신규식申圭植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신규식은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당시 그는 프랑스 조계 안의 난창로南昌路에 거처를 마련하고, 중국의 혁명 지사들과 교류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신규식이 기반을 마련한 상하이에 모여들게 된 것이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비롯하여 조소앙, 여운형, 선우혁 등도 찾아왔다. 신규식은 이들과 동제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해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하기도 했다.



ⓒ도선미

옛 프랑스 조계

또한 프랑스 조계지는 프랑스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세력이 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물론 초기 임시정부 시절에는 프랑스 조계를 벗어나 공공 조계에서 기념행사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청사는 줄곧 상대적으로 안전한 프랑스 조계지 내에 마련하여 이곳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당시 경무국장이던 김구 선생은 일제의 체포 대상자였다. 일경은 정탐을 통해 김구를 공공 조계나 중국인 지역으로 유인해 잡으려고 했지만, 이러한 의도를 알고부터 김구는 프랑스 조계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동정적이고 관대했다. 일본 영사로부터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체포 요구가 있을 때면 프랑스 조계 당국에서는 미리 알려주기도 했다. 비록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허락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진선푸로金神父路(현재 瑞金二路)에 있는 양옥에서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였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프랑스 조계를 가로지르는 샤페이로霞飛路(현재 淮海中路) 321호의 2층 양옥을 임대하여 청사를 마련하였다.

이후 몇 차례 청사를 옮겼고, 상하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한 청사는 오늘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가 있는 마랑로馬浪路(현재 馬當路) 푸칭리普慶里 4호였다. 이곳은 상하이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인 석고문石庫門 주택으로, 1926년부터 1932년 항저우로 옮겨갈 때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오늘날 상하이시 중심가는 재개발을 하며 옛 건물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빌딩들이 들어서며 모습이 변했다. 청사가 있던 이곳 주변 역시 상하이의 중심가인 신톈디新天地 부근으로, 백화점과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가 되었다. 다행히 푸칭리 4호 청사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이곳은 상하이에 온 한국인이라면 꼭 방문하는 임시정부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훙커우 의거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1월 28일에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했다. 머지않아 일본은 승전 기념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虹口公園(현재 魯迅公園)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독립기념관

윤봉길 선서장면(1932)

이때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윤봉길이 참여하며 거사를 진행했다. 기념식이 거행되던 중, 윤봉길은 일본군 수뇌부가 있던 단상을 향해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단상 위에 떨어진 폭탄은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단상에 있던 요인들 중 몇몇은 중상을 입거나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는 임시정부의 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한중 양국 국민은 만보산 사건을 비롯하여 일제의 간계로 서로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으나, 이번 의거를 통해 완화되었다. 더 나아가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가 호전되며, 침체되어 있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의거라고 할 수 있다.
의거가 발생한 이후 일본 경찰은 체포를 빌미로 프랑스 조계 일대에서 수색을 하였다. 안창호를 비롯한 몇몇 한인이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또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당시 13년 동안 거점으로 활동하던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에 있어서 상하이 시기 임시정부는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곳이 바로 상하이였고, 임시정부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랜 기간 거점을 두고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린 훙커우 의거 사건을 간직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상하이는 우리 대한민국의 중요한 역사를 찾아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며, 이곳에서 활동한 임시정부는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다.

〈참고문헌〉
김구, 『백범일지』, 나남출판사, 2011
薛理勇, 『旧上海租界史話』, 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2002
손과지, 『상해 한인 사회사(1910-1945)』, 한울아카데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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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上海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 『한국근현대사연구』 75, 2015
양지선, 「晲觀 申圭植과 중국혁명파의 연대활동에 대한 再考」, 『동양학』 95, 2024
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프랑스」, 『한국근현대사연구』 77, 2016


ⓒ국립중앙박물관

윤봉길의사 자서 약력과 유촉시(1932)


ⓒ국가기록원

복원된 상하이 청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