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자료
신건식과 『유연화지기념첩渝蓮花池紀念帖』
— 글. 이정윤(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
『유연화지기념첩』 (1945)
『유연화지기념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지낸 신건식申健植이 광복 직후, 오랫동안 머물렀던 중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가는 기념으로 만든 서첩書帖이다. 제목의 ‘유渝’ 자는 중국의 도시 충칭重慶을 달리 이르는 말이며, 연화지蓮花池는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었던 주소지다.
서첩에는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 조완구, 김은충에게 받은 것과 신건식 본인이 직접 적은 것을 합해 총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첫 번째로 이시영은 시림산인始林山人이라는 필명으로 유학자가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적었다. 환국을 앞두고 꿋꿋한 마음가짐을 되새기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다음으로 조완구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뜻의 ‘유극강柔克剛’ 세 자를 적었다. 이어 당시 주석 김구의 비서였던 김은충은 ‘성실하고 돈독하다’라는 뜻의 ‘성독誠篤’ 두 글자를 썼다.
다음 순서로는 신건식이 직접 적은 동제사同濟社 창립 취지문이 실려 있다. 동제사는 신건식의 둘째 형인 신규식申圭植이 1912년 조직한 단체로, 상하이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다. 동제사라는 이름은 ‘한 배를 타고 물을 건넌다’는 뜻의 고사성어 ‘동주공제同舟共濟’에서 따온 것으로 민족의 마음을 합해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제사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신규식과 신건식을 비롯해 박은식, 조소앙, 김규식, 박찬익, 조성환, 민필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신규식은 1914년 동제사 3주년을 맞아 창립 당시 썼던 취지문을 새로 적고 인장을 찍어 기념하였는데, 신건식이 이것을 『유연화지기념첩』에 옮겨 쓴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글은 신규식의 일대기인 ‘신예관 선생 약력’이다. 조완구가 지은 글을 신건식이 옮겨 쓴 것이다. 신규식은 1879년생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통한 마음에 자결하려 독약을 마셨는데, 다행히 가족들이 급히 구해 목숨은 살렸으나 후유증으로 오른쪽 시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그는 남은 한쪽 눈으로 일본을 흘겨보겠다 하여 흘겨볼 예睨자에 볼 관觀자를 쓰는 ‘예관’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1911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동생 신건식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신규식은 동제사를 창립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앞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한인 유학생들을 교육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법무총장, 외무총장을 연임하며 중국 호법정부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1922년 9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43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라를 걱정하여 “정부, 정부!”를 되뇌며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신건식이 광복을 맞아 충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며 만든 기념첩에 신규식 관련 글을 두 편이나 실은 것은 간절히 바라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형을 기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신건식은 신규식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에서 광복을 맞았다. 연화지 청사는 원래 호텔로 사용되던 건물로, 처음에는 소유주가 외국인에게 임대해 주지 않으려 했으나 신규식의 사위이자 당시 판공실장이었던 민필호가 적극적으로 설득한 덕분에 청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1945년 11월, 임시정부 사람들은 연화지 청사 중앙계단에 모여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에는 신건식을 비롯해 『유연화지기념첩』에 글을 남긴 이시영, 조완구, 김은충 네 사람이 모두 담겨 있다.
『유연화지기념첩』은 2025년 2월 2일까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특별전 〈그들이 꿈꾼 세상〉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