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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주 지역 독립운동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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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지역 독립운동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 글. 김도형(『순국』편집위원)

미주 지역 독립운동의 특징

장인환 사진

ⓒ독립기념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미주’라고 하면 지역적으로 북미·하와이를 비롯하여 멕시코·쿠바까지 포함한다. 미주 한인사회의 인구는 고작 1만 명에 불과하였지만, ‘한국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었다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미주의 한인들은 ‘금전으로 싸우는 독립군’이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임시정부는 성립일로부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 민족을 대표하고 또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존재해 왔다. 임시정부는 미주 동포들이 제공한 독립운동 자금을 바탕으로 이같이 오랜 기간 존속하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주 지역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의 지도적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갑신정변의 주역 서재필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외무차장 현순이 있었다. 그리고 세칭 ‘한성정부’에는 집정관총재 이승만, 외무부총장 박용만, 군무부총장 노백린, 학무부총장 김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이 있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대부분 일정 기간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그만큼 미주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무형의 정부 대한인국민회

미국은 현재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우방이며, 260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미국 땅에 살고 있다. 한국인들이 공식적으로 미국 땅에 살기 시작한 것은, 1903년 하와이 이민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할 노동자를 모집하였다. 그래서 1903년 1월부터 1905년 8월까지 7,400여 명이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갔다. 그 후에도 ‘사진신부’로 한국인 여성들이 미국 땅에 갔다. 그 외에는 대부분 학생 신분으로 미국 유학을 갔다.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최초의 ‘의열투쟁’은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가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처단한 의거였다. 장인환과 전명운 두 의사의 스티븐스에 대한 포살은, ‘공리의 적’인 스티븐스를 대상으로 벌인 ‘자유전쟁’이었다. 이 의거를 계기로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북미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1909년 2월 1일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기관인 ‘국민회’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국민회’는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까지 통합하면서, 미주 최고기관인 대한인국민회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해외 한인의 ‘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족의 선각자이며 독립운동가, 서재필

서재필 사진

ⓒ독립기념관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3일 천하로 끝나면서, 정변의 주도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다. 서재필은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재망명을 갔다. 미국에 도착한 서재필은 1887년에서 1889년까지 펜실베이니아주의 학교에서, 1890년에서 1891년까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워싱턴으로 가서 군의학학교의 도서관에서 동양의학 서적 번역가로서 일을 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야간에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 워싱턴 대학)에 다녔고, 1892년 의학사를 받았다.

서재필은 1895년 고종의 부름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근대화 운동을 하였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하자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선전하였으며, 1921년에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독립기념관

중국 상하이의 현순이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보(1919. 3. 9.)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과 미주 한인사회

3·1독립선언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현순이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현순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919년 3월 9일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와 호놀룰루의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에게 3·1운동 소식을 전보로 알렸다. 독립선언의 소식을 들은 미주 한인들은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랬고,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미주 각지의 대한인국민회는 국내 독립선언을 후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29일 상하이의 현순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전보를 보냈다. 독립선언 소식에 이어 ‘임시정부’까지 성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1910년 경술국치부터 나라 없는 망국노의 신세가 되었는데, 이제 독립선언과 임시정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3월 29일 현순이 보낸 ‘임시정부’ 전보는 착오로 생긴 실재하지 않는 정부였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대한공화국 성립이 전해진 이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지시에 따라 관하의 각 지방회에서는 ‘대한공화국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USC Libraries

안창호와 리버사이드 한인 노동자들(1912)

미주 동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옹호와 지지

미주 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과 상당히 비례하여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 미주 지역 독립운동도 역시 활기가 있었다. 반대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되면, 미주의 독립운동도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 임시정부와 미주 독립운동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미주에서 오랜 역사를 가졌고 가장 강력한 조직을 가진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하여 동지회·흥사단, 그리고 1940년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까지 대부분의 한인 단체들은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미주 지역은 독립운동 자금의 가장 중요한 제공지였다. 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은 대도시에 있는 한인 단체와 한인교회에서 모금되었다. 북미의 캘리포니아주에서는 1920년대까지 샌프란시스코, 1930년대부터는 로스앤젤레스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대한인국민회·재미한족연합위원회·동지회 등의 주요 단체가 있었다. 미국 동부에서는 뉴욕과 워싱턴이 주요 거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워싱턴은 미국 정치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와 직접 관련을 맺게 되었다.

안창호의 미국 서부지방에서 독립운동 주도

도산 안창호는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다가 교육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도산은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 최초의 국권회복운동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공립협회를 결성하였다. 1907년에는 일제의 국권 침탈을 막기 위해 국내에 들어가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 미국에 다시 돌아와서, 대한인국민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2년 1월부터 도산은 동포들이 사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1917년 8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년 동안 멕시코를 순방하게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안창호는 1919년 4월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다시 1924년 가족들이 있는 미국에 왔고, 미국 서부와 중부의 시카고, 동부의 뉴욕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6년 다시 중국으로 갔다.
도산은 1902년부터 1926년까지 약 13년 정도를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로,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7년 11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가 심해지면서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병원에서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구미위원부 직원 일동(1920)

이승만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

이승만은 국권 수호를 위해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마치고 1904년 11월 도미했다. 190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조약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이승만은 윤병구와 함께 1905년 8월 4일 뉴욕주 오이스터 베이의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에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30분간의 짧은 접견 시간 동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가지고 갔던 청원서를 직접 제출하였다. 청원서를 읽어본 후 루스벨트는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부에 제출해 달라고 하면서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한국에서 서로의 우위권을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 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5월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에서 개최되는 감리교 대표자총회를 기회로 국내를 탈출하여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3년 2월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온 이승만은, 1915년 가을 한인여학원을 설치하여 교장이 되었다. 1918년 9월에는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을 설립하는 등 하와이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1939년 4월부터 워싱턴에서 활동하였으며, 1945년 10월 16일 워싱턴에서 귀국을 하였다.
이승만은 1919년 4월 25일 워싱턴 서북구 14번가와 H 스트리트14th and H Street, NW에 소재한 컨티넨털 트러스트 빌딩Continental Trust Building 908호에 워싱턴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승만은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통해 성립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의 직권으로, 미국 워싱턴에 ‘대한민국 특파주찰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는 이를 ‘구미위원부’라고 한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8월 성립 이후부터 1922년 2월 워싱턴회의가 끝날 때까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워싱턴회의 이후 활동이 급격하게 침체하고 외교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1925년 3월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에서 면직당하면서 구미위원부에도 폐지령이 내려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기관 ‘주미외교위원부’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를 통해 대미외교 전담 기관으로 ‘주미외교위원부’를 성립시켰고, 정식 외교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도 받았다.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소는 이승만이 구미위원부 사무실로 써 오던 2층 주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대미 외교를 전담하며, 임시정부의 승인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헐Cordell Hull 국무부 장관을 상대로 직접 임시정부 승인을 교섭하였지만, 미국 국무부는 독립운동 단체에 대해 어떠한 승인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고 하였다. 이승만은 1942년 3월 24일 헐 국무부 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일개 단체로 취급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주미외교위원부는 이승만이 사는 집을 사무소로 이용하다가, 콜로라도 빌딩Colorado Building 232호에 사무실을 두었다. 그 후 1942년 10월 주미외교위원부 법률고문 스태거스John W. Staggers가 소유한 콜럼비안 빌딩Columbian Building을 사무소로 정하게 되었다. 스태거스는 주미외교위원부를 위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사무실을 임대해 주었다.
주미외교위원부가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 외교를 펼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외교사무소를 설립하였다. 앞서 1943년 12월 주미외교위원부 재조직 문제로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는 등 조직 내부에 분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가 연합위원회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재임시키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주미외교위원부와 별개로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이승만 국제연맹 신임장(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