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온 소식
『독립신문』 제180호(1925. 1. 1.) 신년축사: 신문 개혁, 정부 개조, 법제 개혁을 요구
— 글. 손염홍(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
「신년축사」, 『독립신문』 제180호(1925. 1. 1.)
2024년을 보내고 2025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정확히 100년 전 『독립신문』(제180호)에 실린 신년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난 한 해를 어떻게 돌아보고 새해에 어떤 희망을 가졌는지 알아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925년 1월 1일 『독립신문』에 실린 신년 축사는 1924년에 일어난 변화를 신문 개혁, 정부 개조, 법제 개혁의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하고 1925년에도 계속되기를 희망하였다.
1924년의 개혁은 민심에 따른 것이다.
신년축사는 1924년 임시정부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 및 개혁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한민국 6년을 보내고 7년을 맞는 시간에 우리 사회의 종종 새로운 면모를 발견케 됨은 실로 시기에 몰려 자연적 변화로 된 것이오. 어느 방면이 마음을 먹고 한 운동으로 된 것은 아니다. 우리 독립신문으로 말하면 어쩔 수 없이 개혁이 될 형편으로 개혁이 실현된 것이오. 정부의 신개조와 법제의 신개정도 다수 인심의 경향과 요구로써 자연 개혁의 방법을 취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민심은 1923년 1월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제기된 임정 개조에 대한 요구다. 국민대표회의가 진행 중이던 1923년 4월 「대국쇄신실행안」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상정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항. 법제를 때와 민의에 맞게 개정할 것.
2항. 임시의정원의 감독 아래 정부가 민중기관의 뜻을 살펴 적절한 계획을 세워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적극적으로 진행하도록 할 것.
3항. 이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
임시정부가 민의 기관인 국민대표회의의 요구를 수용하여 법제를 개정하고 임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기로 한 것이다. 임시정부 운영 혼란의 핵심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등한시한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았다. 임시 대통령의 임기가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이 물러나게 만드는 방법으로 탄핵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조덕진 등 12명의 의원이 연서하여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내놓았다. 임시 대통령 탄핵 문제는 임시헌법 개정논의로까지 번졌다. 20여 명의 의원들이 ‘임시헌법개정안’을 상정하여 임시 대통령의 권력을 국무원과 의정원으로 분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일치된 의견을 만들지 못한 채 결렬되면서 이승만 탄핵안은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승만에 대한 탄핵 논의는 잠시 주춤했다가, 1924년 4월부터 다시 불이 붙었다. 이승만 임시 대통령 아래 국무총리를 맡던 노백린이 사임한 뒤 이동녕이 국무총리를 맡아 내각을 새로 구성하였다. 이어서 6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유고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9월 1일 자로 ‘대통령 유고’ 결정과 새로운 내각이 공포되었다. 이는 임시 대통령의 직권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개입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고 상태’의 임시 대통령 대리를 이동녕이 맡다가 12월 11일 박은식이 임시 대통령 대리로 선임되고, 내각도 새롭게 구성되었다.
정부 개조에 대해 이승만 및 임시정부 옹호파가 강한 반발을 보였다. 이승만이 ‘유고안’에 반대하는 내용이 『독립신문』 제179호(1924. 12. 13.)에 실렸다. 신년 축사에서 임정 개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논평은 다음과 같다.
정부와 법제로써 말하여도 개혁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유지할 능력이 없게 된 것은 비록 개혁을 반대하는 자라도 사실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응당 자기 내심으로는 양해할 수 있으리라. 우리 신문의 개혁과 정부의 개조와 법제의 개정이 없게 되면 다수 인심에 위반되어 존재의 행운을 희망하지 못할 것은 극히 명료한 사실이 아닌가. 그 반대자로 말하면 자기 직위에 연연함戀棧의 사심私意에서 나올 뿐이요 결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앞길前途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려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로다.
박은식이 임시 대통령 대리에 취임한 지 열흘 만인 12월 28일, 내각 전원과 의정원 의장 최창식과 법제위원장 윤자영이 참석한 회의가 열리고, 그 자리에서 임시헌법 개정과 임시 대통령 탄핵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1925년 2월에 열리는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방향을 잡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독립신문』 제160호(1923. 5. 2.)
독립신문이 왜 개혁을 단행했을까?
보라 우리 독립신문이 어떤 논조로 인하여 각 방면의 공격이 쏟아져昂騰 구독 거부非讀 동맹의 선언까지 발표한 적 있으니 이것을 개혁하지 않고 능히 신문의 가치를 보존하여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가 약화되고 독립운동계 전체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도 그 영향을 받아 발행이 원활하지 못했다. 주간으로 간행하다가 월간으로 바꿨는데도 1924년에 들어 1개월에 1회 발행 자체가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1924년 10월 4일 자 177호에 ‘남만참변’ 기사를 보도하면서 통의부 비판 사설과 참의부의 통의부 ‘성토문’을 싣는 바람에 독립운동단체의 큰 반발을 샀다. ‘남만참변’은 1924년 9월 21일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 주만 참의부 참의장 채찬蔡燦(일명 백광운白狂雲)이 습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이다. 독립신문의 기사를 본 통의부 측에서 격분해 11월 7개 단체와 연합, 반임정 선언 및 독립신문 구독 금지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립신문 사장을 맡고 있던 김승학은 11월 15일 사임하였다.
1924년 11월 29일 자로 발간된 『독립신문』 제178호에는 독립신문사 직원 변동에 관한 「특고」가 실려 있다. 김승학金希山, 박영朴英, 김문세金文世가 사임하고, 새로 사장에 독립신문 주필인 박은식이, 경리부장에 최천호崔光郁가 선임되었다. 편집 빈광국賓光國, 통신 강창제姜昌濟, 출판 고준택高峻澤은 유임되었다. 김승학은 1921년 7월부터 독립신문사 2대 사장을 맡았는데, 3년 만에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특고」, 『독립신문』 제178호(1924. 11. 29.)
179호(1924. 12. 13.)에 실린 ‘독보쇄신獨報刷新의 소감’이라는 글에서 앞선 ‘남만참변’에 관한 독립신문의 기사가 편파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비판하며 앞으로 공정한 언론기관으로써 발돋움할 수 있도록 바란다고 다짐하였다. 이처럼 박은식은 독립신문 사장으로 취임해 독립신문의 발행을 정상화하면서 사태 수습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은식은 12월 11일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에 취임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박은식의 뒤를 이어 최천호와 최창익이 독립신문사 운영을 맡았는데, 경영난으로 1925년 11월 11일 제198호로 폐간되었다.
『독립신문』 제179호(1924. 12. 13.)
새해에도 정부와 법제 개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리 신문도 이미 개혁되고 정부도 개조되고 법제도 장차 개정될 터인즉 다만 앞길의 진행이 순탄하여 대단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향을 피우며 축원焚香禱祝할 뿐이로다.
신년 축사에서 새해를 기원한 대로 임시정부의 개조와 법제의 개혁은 1925년에도 계속되었다. 1925년 3월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 상정되면서 탄핵 논의는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3월 21일 이승만이 면직되었고 제2대 임시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선출되었다. 박은식이 취임하면서 바로 내각을 구성했는데, 후임 국무총리에 군무총장 노백린을 뽑고, 나머지 각료를 유임시켰다.
한편,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맡았던 외교 사무는 외교위원을 파견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재정에 대한 업무는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 교민단에게 넘기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구미위원부를 1928년까지 끌고 나가면서, 동포들에게 거두어들인 애국금과 각종 성금을 쥐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미주 지역 동포사회는 충돌과 반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제2대 임시 대통령 박은식
국무령 이상룡
이승만 탄핵 작업과 함께 법제 개혁인 개헌도 진행되었다. 박은식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해 통과시켰고, 4월 7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구성되는 국무회의가 행정과 사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개정 헌법은 1925년 4월 30일에 발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42호와 독립신문 185호에 실렸다. 신헌법에 의거해서 서로군정서 총재였던 이상룡이 국무령으로 선출되었다. 독립신문 개혁, 정부 및 법제 개혁을 이끌던 박은식은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한 뒤 11월 1일 순국하였다.
100년 전 새해 희망을 돌아보며 2025년을 기원한다.
과거 민국 6년은 우리의 운이 안 좋았던 해라 전례 없는 장마와 가뭄의 재앙은 우리가 굶주려 죽거나 흩어져 유람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적의 학정은 더욱 격화되어 우리의 충성스러운 의사들이 쇠막대기와 창검에 의해 원통한 피를 흩뿌린 것이 계속되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독립운동의 각 기관이 하나도 진보된 것이 없고 도리어 정체되고 결렬된 상태를 보게 되었으니 민국 6년의 재앙은 어서 바삐 전송하여 완전히 소멸하게 하고 7년부터는 시대에 발맞추고 풍년을 이루어 우리의 생활을 상쾌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자. 또한 왜적의 사나운 불꽃이 정의를 가려 우리가 자유의 행복과 독립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각종 기관의 사업이 모두 용맹하고 왕성하게 나아가게 하여 조금도 장애 없이 최고로 좋은 결과를 이루는 것을, 우리가 민국 7년 새해를 받드는 벽두에 제일 첫 번째 축사로 삼노라.
「임시헌법공포식」, 『독립신문』 제185호(1925.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