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독립운동
미국의 독립전쟁
— 글. 김봉중(전남대학교 명예교수)
1773년 보스턴 차 사건(W.D.쿠퍼Cooper의 판화, 1789)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구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을 한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 보스턴 항에 정박 중이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 선박에 승선해서 342개의 차 상자를 차가운 대서양의 바다로 던져버렸다. 근 10년 동안 이런저런 세금 문제로 모국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이후 미국 식민지) 간의 싸늘해진 관계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고, 결국 양쪽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던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자유의 아들들’은 보스턴을 중심으로 반조세 저항운동을 전개해 오던 급진 반영 조직이었다. 모국인 영국의 입장에서는 요즘 개념으로 얘기하면 반국가 테러분자들이었다. 이들 반국가 테러분자들이 보스턴 항에서 저지른 행동에 영국 정부는 더 이상 미국 식민지의 행동을 간과할 수 없었다. 사실 1765년 인지세 파동을 시작으로 미국 식민지의 반발이 있을 때마다 영국은 반발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서 관련 세법들을 철회했다. 이후 타운센드법을 통과시켰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철회했다. 1770년에는 보스턴에 주둔하던 영국군과 식민지인들 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해서 군인들의 발포로 다섯 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보스턴 학살 사건’으로 모국과 식민지 간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그런 차에 보스턴 차 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단순한 조세 저항운동이 아니라 모국에 대한 반역 행위였다. 동인도회사는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이자 상징이었기에,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의 위상과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영국 정부는 더 이상 식민지의 반역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영국 정부의 응징은 강력했다. 강제법(Coercive Acts)을 제정해서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 자치 정부를 해산했다. 강제법은 치외법권 조항까지 포함했다. 즉, 매사추세츠에 거주하는 영국인이나 영국 군인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식민지 법정이 아니라 해상의 영국 해군 법원이나 영국 본토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식민지에 허용했던 자치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식민지인들은 이를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으로 간주했다. 오랫동안 식민지인들은 그들의 자치권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유(liberty)의 상징이었기에, 강제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 항복하는 영국군(존 트럼불John Trumbull, 1820)
영국 정부는 ‘강제법’을 통해 보스턴을 하나의 본보기로 13개의 미국 식민지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약 10년 동안 지속된 식민지인들의 반조세 운동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자치권에 토대한 자유의 가치가 이미 전체 식민지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보스턴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식민지들이 보스턴 사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강제법’이 결국 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식민지 주민들 사이의 연대와 저항 의식이 고조되었고, 각 식민지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대책을 모색하기로 했다. 1774년 9월에 제1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라는 식민지 연합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식민지 대표들은 식민지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청원서를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영국 의회의 강력한 태도를 영국 왕이 무마해 주길 원했던 것이다. 청원서의 주된 내용은 식민지에 대한 다양한 불합리한 법률을 철폐하고, 식민지 주민들의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식민지의 자치권 회복과 자유의 보장이었다.
그런데 아직 식민지 대표자들은 독립을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독립이란 단어는 꺼내기조차 꺼려했다. 다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민병대 조직과 보급품 비축과 같은 군사적 준비에 대한 논의는 있었다. 폐회 연설에서 버지니아 식민지 대표자였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는데, 이는 참석자들뿐만 아니라 식민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국 왕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가 무너질 경우 자유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비장함이 교차했다.
조지 3세의 답신은 식민지인들의 기대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식민지인들을 더욱 자극했다. 왕은 대륙회의의 청원서를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반란상태에 있음을 선포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의 외침은 더 크고 광범위하게 메아리쳤고, 곳곳에서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간의 무력 충돌 우려가 팽배하더니, 1775년 4월 19일, 보스턴의 서쪽 지역에서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독립전쟁의 첫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예상을 뒤엎고, 급조되었고 훈련이 되지 않았던 식민지 민병대가 영국군을 무찔렀다. 식민지의 사기와 독립의 열망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한 달 후 제2차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대표자들은 본격적으로 영국의 군사적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논의했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회의는 총 8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776년 6월 초, 식민지는 더 이상 영국의 통치 아래 있을 수 없다는 결단을 내렸고, 곧바로 독립선언문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존 애덤스John Adams, 로저 셔먼Roger Sherman,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으로 구성된 5인 위원회는 33세의 가장 젊은 제퍼슨에게 초안을 작성하도록 위임했다. 제퍼슨은 초안 작성을 시작한 지 약 2주 후인 6월 28일에 독립선언문 초안을 대륙회의에 제출했다. 그 초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의 권리를 소유하며, 정당한 정부는 인민의 동의에 의해 세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담은 독립선언문이 선포되었다. 이날이 지금까지 미국인들이 최대 국경일로 지키는 7월 4일이다.
미국 독립선언문(1776. 7. 4.)
영국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벌인 것은 객관적으로 무모한 시도였다. 당시 영국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강력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한 영국의 군사력은 최고의 기술과 훈련을 갖춘 정규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다. 반면, 대륙군은 주로 농민과 자영업자 등으로 구성된 민병대였고,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독립전쟁은 지금의 스포츠로 비교한다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이었다.
예상대로, 전쟁 초기에 대륙군은 영국군에 밀렸다. 1776년 여름에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대륙군은 뉴욕과 그 주변 지역을 잃었다. 연전연패로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많은 병사들이 귀향하거나 이탈하기까지 했다. 대륙군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영국군이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거나 대륙군 내부에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면, 전쟁은 쉽게 종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 총사령관의 리더십 아래 대륙군은 훈련과 조직력을 강화했다. 크고 작은 전투 경험이 쌓이면서 대륙군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강했다. 이런 차에 전쟁의 기류를 대륙군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1777년 9월과 10월에 뉴욕주 사라토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대륙군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승리는 의미가 컸다. 사라토가의 승리로 프랑스가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독립전쟁 초기부터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확고한 군사적 승리가 없는 상황에서 선뜻 참전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라토가의 승전보를 들은 것이다. 다음 해 2월에 미국-프랑스 동맹이 맺어졌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대륙군은 승기를 잡았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협동작전을 펴서 영국군을 물리쳤다. 영국이 더 이상의 전쟁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전투였다. 패배한 영국은 평화협상에 응했고, 1783년 9월 3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콩코드 전투가 시작된 이래 8년여 만에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다. 군사 및 전략적으로 워싱턴의 리더십과 프랑스와의 동맹은 중요했다. 워싱턴은 전쟁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뛰어난 전술과 리더십으로 군대의 사기를 높여서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한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대륙군의 승리는 사실상 어려웠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런 군사 및 전략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미국 식민지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용기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1986년의 미국 독립 기념일 축하 불꽃놀이(워싱턴 D.C.의 워싱턴 기념탑)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로서 미국 최대의 국경일이다. 이날은 모든 마을이나 도시마다 불꽃놀이와 퍼레이드 등으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미국인들이 독립전쟁의 승전일인 9월 3일을 기념하지 않고, 7월 4일을 국가 최대의 국경일로 기념하는 점이다. 사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승전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1776년 7월 4일, 과연 막강한 영국군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그때 그날을 최대 국경일로 기념한다. 이유는 그때 독립선언문이 선포되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전쟁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선조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그들은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위한 몇 가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독립선언문을 만천하에 선포한 그날을 국가 최대의 국경일로 지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