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건국기원절
— 글. 조덕천(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제정한 음력 10월 3일의 정식 명칭은 건국기원절이었다.
임시정부가 건국기원절을 국경일로 제정할 때 음력 10월 3일은 개천절로 널리 불렸다.
그런데도 임시정부가 건국기원절을 국경일 명칭으로 채택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나라 력사가 처음으로 비롯한 것을 긔념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겟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국경일 제정 문제를 처음 논의한 시점은 통합정부를 수립한 직후였다. 1919년 12월 1일 국무원國務院이 주관한 정례 국무회의에서 국경일 제정 문제가 처음 제기됐다. 이 회의에서는 총 6개의 안건을 주요 현안으로 논의했다. 그 가운데 국경일 제정 문제는 「국경안」・「국경일 명칭안」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번째 안건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국무회의에서는 「국경안」・「국경일 명칭안」을 기초할 부서와 담당자도 배정됐다. 해당 안건을 기초할 부서는 법제국이었으며, 담당자는 법제국장이었다. 바로 이런 사실을 통해 국경일 제정 문제가 단순한 차원에서 논의된 것이 아니라, 정식 입법 준비 절차를 거쳤음을 잘 알 수 있다.
이후 임시의정원에 회부된 「국경안」・「국경일 명칭안」은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논의됐다.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1920년 2월 23일부터 3월 30일까지 열렸다. 국경일 제정 문제는 3월 9일 회의에서 제1독회가, 이어서 3월 15일 회의에서 제2독회가 진행됐다. 제1독회에서는 크게 4가지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논의됐다. 이 가운데 국경일 제정 문제는 「국경일안」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논의 사항에서 다뤄졌다. 제2독회에서는 국경일 제정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날 열린 회의 기사를 보도한 『독립신문』에 ‘「국경일안」(제2독회)’라는 안건의 내용만 실렸기 때문이다. 「국경일안」은 제2독회에서 최종 통과됐다.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은 두 가지였다. 건국기원절과 독립선언일이 바로 그것이다. 건국기원절은 대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나라를 처음 건국한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을, 독립선언일은 대한민족이 나라의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는 어떻게 건국기원절과 독립선언일을 국경일로 제정하게 됐을까? 먼저 「국경일안」 제1독회에서 ‘정부’가 건국기원절과 독립선언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한다는 뜻을 밝혔고, 다음으로 「국경일안」 제2독회에서 문제가 됐던 건국기원절의 음양력 날짜 기준이 일단 음력으로 결정됐다. 이로써 건국기원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것이다.
「국경일안(제1독회)」, 『독립신문』 제53호(1920. 3. 13.) /「국경일안(제2독회)」, 『독립신문』 제55호(1920. 3. 18.)
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제정한 음력 10월 3일의 정식 명칭은 건국기원절이었다. 임시정부가 건국기원절을 국경일로 제정할 때 음력 10월 3일은 개천절로 널리 불렸다. 그런데도 임시정부가 건국기원절을 국경일 명칭으로 채택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나라 력사가 처음으로 비롯한 것을 긔념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겟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建國]’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특히 ‘처음으로 비롯한 것[紀元]’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운 날[建國紀元]’이 된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개천절이 아니라, “건국긔원절建國紀元節이라고 특별한 일흠을 정”했던 것이다.
「상하이에 건국기원절」, 『동아일보』(1924. 11. 9.)
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제정한 건국기원절의 날짜는 음력 10월 3일이었다. 이 날짜를 정하기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음양력 날짜 논쟁이 벌어졌다. 먼저 1920년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쟁점 사안은 양력 10월 3일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윤현진이 양력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는 정부의 입장을 밝히면서 제안한 것이다. 제1독회와 제2독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논쟁 끝에 다음의 의견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건국기원일(건국기원절의 오기-필자)은 4253년 전의 음陰 10월 3일이 양陽 하월何月 하일何日인가를 소참溯參하야 정하자”는 제안이 통과된 것이다. 이로써 일단 날짜를 음력 10월 3일로 확정하게 됐다.
다음으로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쟁점 사안은 ‘양력 10월 29일’로 개정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소앙 등 11명이 1942년 10월 30일 정식 안건으로 제출한 「건국기원절 경축일 교정안」의 핵심 내용이었다. 11월 4일 열린 제1독회에서 치열한 논쟁에 들어갔다. 논쟁이 그치지 않자, 결정을 보류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11월 6일 열린 제2독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건국기원절 경축일 교정안」을 “무기 보류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결국 건국기원절의 날짜는 1920년에 정한 음력 10월 3일에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27년 동안 머물렀다. 그 청사 소재지를 중심으로 3시기로 나뉜다. 상하이上海시기・이동시기・충칭重慶시기가 그것이다. 건국기원절 기념식이 거행된 상황은 그 시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기념식이 확실히 거행된 것으로 파악된 횟수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념식은 상하이시기에 9회, 이동시기에 2회, 충칭시기에 4회 등 총 15회에 걸쳐 거행됐다. 기념식은 임시정부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상하이시기와 충칭시기에 집중됐다. 반면, 이동시기에는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기념식을 제대로 거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건국기원절 기념식을 정부와 교민 사회로 나눠서 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직접 주최한 기념식은 대체로 오전에 거행됐다. 한편 오후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충칭 한국 교민・상하이 한국 교민과 같은 교민 사회에서 기념식을 주최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대한교민단은 1920년 임시정부의 산하 기관에 편입된 단체였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교민 사회에서 주최한 기념식도 임시정부가 거의 주최하다시피 한 사실이다. 임시정부와 그 소재지의 교민 사회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교민 사회에서 주최한 기념식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들이 주재했다.
건국기원절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몇 명이나 됐을까? 참석자 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기념식은 상하이시기의 5회뿐이다. 1919・1920・1921년 기념식에는 각각 약 400명이 참석했고, 1922・1923년 기념식에는 각각 약 200명이 참석했다. 이동시기와 충칭시기에 거행된 기념식의 참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동시기 가운데 1938년 기념식과 충칭시기에 거행된 기념식은 방증 자료를 통해서 대략적인 추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동시기에 거행된 1938년 기념식에는 약 200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칭시기에 거행된 기념식에는 평균 300명 안팎의 인원이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국기원절 기념식이 거행된 장소는 일정하지 않았다. 상하이시기의 기념식은 대체로 프랑스 조계의 삼일당三一堂에서 거행됐다. 이동시기의 1938년 기념식은 임시정부가 광저우廣州에서 류저우柳州로 피난하던 리행선利行船 배 위에서 거행됐다. 임시정부가 건국기원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거행된 1945년 기념식은 충칭과 상하이에서 동시에 열렸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상하이를 거쳐 국내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기념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1920년에 국경일로 제정한 건국기원절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거의 빠짐없이 기념했던 것이다.
1920년 11월 13일(음 10. 3.) 상하이에서 거행된 건국기원절 기념식 모습(『진단』 제7기, 1920. 11. 21.)
건국기원절의 역사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건국기원절이 대한민국 최초의 2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이다. 건국기원절이 대한민국 최초의 2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로 제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중요성 때문이었다. “오직 건국기원절, 이 기념 하나는 ᄭᅳᆺᄭᅡ지 생광生光이오, 자랑이오, 깁븜ᄲᅮᆫ이다. 이날은 곳 우리가 반만년 역사 국민으로 천하 만방인萬邦人에 비하야 먼져 진화되어 조숙한 문화를 가지고 장원長遠한 국가 생활을 하야 옴을 흥감興感하는 날이다.” 당시 건국기원절이 어떻게 인식됐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건국기원절이 국경일로 제정됐던 것이다.
둘째, 건국기원절이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일을 제정할 때 계승됐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10월 1일 4대 국경일을 제정했다. 그 가운데 양력 10월 3일을 기념하는 개천절이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건국기원절을 계승한 것이었다. 다만 명칭이 건국기원절에서 개천절로, 날짜가 음력 10월 3일에서 양력 10월 3일로 바뀌었다. 명칭과 날짜가 바뀌긴 했지만, 개천절이 건국기원절이라는 사실과 그 의미는 변함이 없었다. 이처럼 건국기원절은 개천절로 계승돼 지금까지 기념돼 오고 있다. 그 이유는 민족과 국가의 기원을 잊지 않고, 미완의 과제인 민족과 국민 통합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카이펑開封에서 열린 건국기원절 축하 운동대회에서 우수자들을 시상하는 이범석(1945. 음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