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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의 한국광복군 부부 두 쌍

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의 한국광복군 부부 두 쌍

양가의 대를 이어 항일 투쟁에 투신한 이들 두 쌍의 한국광복군 부부가 속한 가문을 독립운동 명문가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느 가문을 독립운동 명문가라고 부르겠는가.

— 글.이은영(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2024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두 쌍의 한국광복군 부부 안춘생(1912-2011)과 조순옥(1923-1973), 박영준(1915-2000)과 신순호(1922-2009)가 선정되었다. 안춘생과 조순옥 부부는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출생해 광복군 창설부터 마지막까지 몸담은 한국광복군 부부로 평가받고 있다. 박영준과 신순호 부부는 중국의 국민정부를 대상으로 한 대중외교 가업을 한국광복군으로 승화시킨 부부로 평가받고 있다.

광복군 창설부터 마지막까지 몸담은 한국광복군 부부
안춘생과 조순옥

안춘생

안춘생은 안중근의 사촌 형인 안장근의 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일제는 안중근 일가에게 무차별적 감시와 핍박을 가했다. 이에 안춘생의 부모는 7살의 안춘생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조순옥은 조소앙 일가로, 중국에서 의열 투쟁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 요원이었던 부친 조시원의 딸로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1932년 조부모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안춘생은 1920년 경신참변 때 일본군이 한인들을 대량 학살하던 모습을 목격한 데 이어 1931년 일본군에게 탄압당하는 중국인들을 보면서 군사행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편,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해 중국 국민정부와 접촉해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했다. 안춘생은 1934년 한인특별반에 입교한 후 신분 위장의 일환으로 ‘왕형’을 비롯해 안무응, 안용춘, 몽고왕 등의 가명을 사용했다. 1936년 군관학교 10기 보병과를 졸업하고 중국 육군 제2사단에서 군복무를 시작한 안춘생은 1937년 중일전쟁 때 중국군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상하이 강만 지구 전투 중에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치료를 받았다. 안춘생에게는 중일전쟁 참전 중에 벌인 특기할 만한 일이 있다. 바로 위험한 상황에서 중국 측과 접촉하며 임시정부 요원들의 안전 도모를 위해 힘썼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감시와 급습 등을 피해 짧게는 4개월 만에도 옮겨 다니던 임시정부 요원 보호는 국권 회복을 위해 우선적으로 착수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1938년 임시정부에서는 치료를 마치고 복귀한 안춘생에게 한국국민당 당원 청년 장교의 이름으로 위로와 포상을 했다. 이는 안춘생이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과 사촌 동생 안경근이 이끌던 한국국민당 당원으로 활약했던 것을 일컬은 것이다. 복귀 후 안춘생은 임시정부의 비밀 지령에 따라 일본군 제거에 사용할 폭탄 운반 및 비밀 소통에 쓰일 무전 암호를 전달하는 일 등을 했다.

이에 앞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이 시작될 것에 대비해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39년 군사특파단을 조직해 고위험 지역인 시안西安으로 파견했다. 이때 노백린의 아들 노태준 등과 함께 파견된 안춘생은 산시성山西省 일대를 돌며 거점을 확보하고 그곳에 전심전력으로 모집한 병력을 주둔시키며 지대를 조직했다. 당시 안춘생 등이 펼친 활약은 1940년 9월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창설부터 기여가 컸던 안춘생은 한국광복군 제1지대 소속으로 참여해 산시성山西省 제2전구사령부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광복군 모집 및 동지 규합에 힘썼다. 안춘생은 특히 강제 징집 후 일본군으로 참전하다 중국군 포로가 된 한국 청년들을 석방시켜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일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한인 보호 차원의 행동이었다.
조순옥은 17살 때 부친이 한국광복군 창설에 가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간접적으로 광복군 창설에 가담한 조순옥은 광복군이 창설되자마자 총사령부에 입대해 총무처 시안 판사처에서 복무하였다. 이때 안춘생이 조순옥의 근무처로 파견을 나오면서 시작된 인연으로 두 사람은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되었다.
1942년 7월 광복군은 제1지대와 제5지대를 통합해 제2지대로 재편성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광복군 핵심 부대인 제2지대장은 이범석이었고, 안춘생은 제2지대 제1구대장이었다. 당시 제2지대는 광복군 모집 및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해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공조를 펼치는 임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때 조순옥 또한 안춘생이 구대장으로 있는 제1구대에 편입되면서 두 사람은 일제에 강제 징집당해 온 한국 청년 포섭 등에 전념했다. 그로 인해 조순옥은 광복군 여성 대표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 후 안춘생은 1945년 광복군 주영지대장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 귀국 대신 중국에 머물며 강제 징집되거나 포로가 된 한인 청년을 구출한 후 귀속시키기 위한 잠편지대 편성과 통솔에 앞장섰던 안춘생은 1946년 조순옥과 함께 귀국했다. 그 후 안춘생은 육군사관학교 초대 교장,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장 등을 비롯해 광복회 회장, 독립기념관 초대 관장 등을 역임했다.
안춘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2011년 생을 마감했으며, 조순옥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기 전인 1973년 생을 마감했다. 안춘생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조순옥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안춘생과 조순옥

©국가보훈부

대중외교 가업을 한국광복군으로 승화시킨 부부 박영준과 신순호

박영준은 만주에서 대종교 관련 민족운동에 동참한 박찬익의 아들로 용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투신하면서 박영준은 부친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신순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항일 투쟁 중이던 신건식의 딸로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나 4살 때인 1926년 모친 오건해를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박영준은 1932년 중학교 진학을 위해 혼자 부친이 있는 상하이로 갔다. 그에 앞서 박영준은 1931년 만주로 파견된 임시정부 요원의 지도를 받은 사실이 있다. 이를 통해 박영준이 단순히 진학만을 위해서 상하이로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영준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는 윤봉길 의거 직후여서 임시정부가 일제의 급습을 피해 곳곳을 옮겨 다니던 중이었다. 그에 따라 부친 또한 중국의 국민정부를 상대로 한 대중외교 활동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떠돌았다. 결국 부친을 따라 함께 떠돌던 박영준은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어렵게 학업을 마쳤다. 신순호 또한 일제를 피해 임시정부와 함께 곳곳을 전전하는 부모를 따라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힘겹게 학업을 마친 박영준은 1937년 12월 창사長沙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 투쟁에 투신한 후, 1938년 류저우柳州의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가담했다. 부친의 영향으로 항일 투쟁에 발을 들여놓은 신순호는 17살이던 1938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들어가 박영준을 만났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며 예술 활동을 통한 항일 선전 전개에 힘썼다. 1939년 박영준은 직접 조직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으로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 고취 및 문화 활동을 통한 항일 선무공작에 힘쓰는 한편 한중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박영준은 그해 11월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학했다. 신순호는 박영준보다 한발 앞선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바로 입대해 총사령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본래 신순호의 모친 오건해는 치료를 요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살핀 독립운동가들의 대모로 불렸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일본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한 박영준의 부친 박찬익이다.
한편, 1941년 제17기로 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영준은 1942년 광복군의 대대적 개편 때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치되어 군무 관련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이때 신순호는 임시정부 생계 위원회의 회계부에서 근무했다. 1943년 박영준은 충칭의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을 역임했다. 그해 12월 박영준과 신순호 두 사람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발악 중이던 일제와 맞서기 위해 박영준은 1945년 3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으로서 군사훈련에 힘썼다. 이에 더해 박영준은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 일제의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활동은 물론 광복군 모집 및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등 선무공작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광복 직후 중국에 잔류하며 강제 징집 및 포로가 된 한인 병사들을 구출한 후 잠편지대에 배속시키던 박영준은 부인 신순호와 함께 부친이 대표로 있는 주화대표단에서 재중 한인 보호 및 그들의 귀국을 돕는 활동을 펼치다 1949년 귀국했다. 그 후 박영준은 안춘생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창설 및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영준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2000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신순호는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2009년 생을 마감했다. 부부 모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

ⓒ국가보훈부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의 두 쌍의 한국광복군 부부

이 두 쌍의 광복군 부부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중 네 가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독립운동가 가문끼리 혼인했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다는 것이다. 넷째, 해방 직후 일정 기간 중국에 잔류하며 재중 한인 보호에 앞장 섰다는 것이다.
몇 대에 걸쳐 훌륭한 업적으로 이름난 집안을 명문가라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한 기간은 일반적인 명문가로서의 이름을 얻을 만큼의 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부자지간이나 형제지간에 독립운동에 기여한 가문을 독립운동 명문가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안춘생과 조순옥 부부, 박영준과 신순호 부부는 가문의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해 한국광복군에서 부부의 연까지 맺고 더욱 왕성하게 항일 투쟁을 벌인 인물들이다. 이처럼 양가의 대를 이어 항일 투쟁에 투신한 이들 두 쌍의 한국광복군 부부가 속한 가문을 독립운동 명문가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느 가문을 독립운동 명문가라고 부르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국가보훈부에서는 이들 부부를 2024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던 것이다.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사진

ⓒ경기도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