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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온 소식

대한민국 최초의 국경일, 임시정부의 삼일절

상하이에서 온 소식

대한민국 최초의 국경일, 임시정부의 삼일절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3·1 독립투쟁은 잊을 수 없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 글. 김경남(국립부경대학교 학술연구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1920. 3. 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이 문장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두루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 헌법의 ‘전문’ 일부이다. 1948년 7월 12일 처음 제정될 당시에는 4·19 혁명 이전이었으므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正義 인도人道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3·1 독립투쟁은 잊을 수 없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일제의 강제병합과 노예적 동화정책, 데라우치 시대의 헌병·경찰을 동원한 무단통치는 국가 멸망과 민족 수치를 넘어 우리 동포 전체의 생존을 위협했고, 그에 맞서 평화적·비폭력적 독립 투쟁으로써 ‘3·1 만세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비폭력적 만세 투쟁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그 결과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보다 하루 앞선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하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헌정 제정, 초대 국무총리 선출 등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게 되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전통의 창조(The Invention of Tradition)』라는 책에서 ‘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전통은 특정 가치와 행위의 규준을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전통이 형성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전통은 특히 19세기 유럽에서 빈번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배계층이 단결된 소속감을 표상하고, 그들과 정부에 부여된 권력을 정당화하며, 공동 가치와 신념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대규모의 의례儀禮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기념일’이나 ‘국경일’은 대표적인 의례이자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홉스봄은 자연발생적인 기념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한국 민족에게 3·1 독립투쟁의 기억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선언되어 있듯이, 그 자체로서 만들어진 기억이 아니다.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유혈 탄압, 그에 따른 희생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만들어 냈고, ‘임시’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의정원과 정부의 체제를 갖춘 임시정부에서는 독립 투쟁 1년을 맞이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추모하고 옥중에서 투쟁하는 동포들을 위해 그날을 최초의 국경일로 정하였다.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3월 4일 ‘상하이의 삼일절’에서는 첫 번째 삼일절 행사와 관련하여 “이른 아침 시내 동포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고, 국무원 및 의정원의 축하식과 대극장 내의 성대 장엄한 민단 주최의 대축하식과 그 후 자동차 시위 운동, 열성과 열루熱淚로 지킨 첫 번 국경일에 동포의 결심을 더욱 굳어지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1면과 4면에 나뉘어 거의 한 면을 차지할 정도로 상세하게 보도된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행사에서는 이동휘 국무총리의 ‘식사式辭’, 손정도 의정원장의 ‘축사祝辭’, 학생 일동의 ‘독립군가’ 제창, ‘상기식(上旗式: 태극기를 다는 의식)’, ‘애국가 제창’, 현순玄楯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화숙李華淑의 ‘독창’과 기념 촬영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국무총리의 ‘축사’, 이동녕 내무총장의 ‘기념사’, 안창호 노동국 총판의 ‘기념사’, 내빈 중국인 이인걸李人傑 등의 ‘축사’가 이어지고, ‘만세 삼창’과 ‘하기식下旗式’으로 끝맺었다. 그 가운데 애국가 제창 장면에서, 기자는 당시의 비장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프랑스 쉬프Suippes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연 한인1세대들(1920. 3. 1.) (나기호, 『비바람 몰아쳐도』)

태극의 일부가 번쩍 보일 때 군중의 애국가 소리는 목이 메이고 칠백 명 대한 자녀의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지다. 애국가가 끝나고 태극기가 깃대 정상에 오를 때 군중에서 크게 울음소리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서 흐느끼는 소리가 장내에 가득 차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한 광경을 이루다. 일동은 피눈물에 목이 메여 국기를 향해 가장 존경하는 뜻으로 경례를 한 후, 여운형 씨는 “우리 민족이 노예된 지가 벌써 십 년이외다. 우리보다 먼저 옥에 가고, 생명을 바치신 여러 지사들과 이천만 남녀가 대한의 독립을 선언한 지도 이미 일주년이 되었소. 내가 나라를 떠난 이래 7년간 혹 7월 4일(미국 독립기념일)이나 10월 10일(중국 혁명기념일)을 맞아 남의 즐거운 경축에 참석할 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우리도 지금은 십 년 간 못 보던 저 국기를 다시 달고, 십 년 간 못 부르던 저 애국가를 다시 부르게 되었습니다. 동포여, 여러분은 저 기, 올라간 저 국기를 다시 땅 위에 떨어뜨리려 하십니까.(이때 군중의 울음소리는 가장 커지다) 한 번 높이 단 이 기를 영원히 빛나게 합시다.”
【원문】 太極의 一部가 번적 보일 제 會衆의 愛國歌聲은 哽咽하고 七百名 大韓의 子女의 雙頰에는 熱淚가 滂沱하다. 愛國歌가 ᄭᅳᆺ나고 太極旗가 旗竿의 頂上에 오를 ᄯᅢ 會衆 中에서 放聲하는 哭聲이 니러나고 ᄯᅡ라서 歔欷하는 소리가 場內에 차 形言할 수 업는 悲壯한 光景을 일우다. 一同은 血淚에 咽하면서 國旗를 向하야 最敬禮를 行한 後, 呂運亨 氏는 “우리 民族이 奴隸된 지가 벌서 十年이외다. 우리보다 몬져 獄에 가고, 生命을 밧치신 여러 志士들과 二千萬의 男女가 大韓의 獨立을 宣言한 지도 임의 一週年이 되엿소. 나는 去國 以來 七年間 或 七月 四日(美國獨立紀念日)이나 十月 十日(中國 革命紀念日)을 當하야 남의 즐거운 慶祝에 參席할 ᄯᅢ에 얼마나 눈물을 흘넛슬가오. 우리도 只今은 十年間 못 보던 저 國旗를 다시 달고, 十年間 못 부르던 저 愛國歌를 다시 부르게 되엇슴니다. 同胞여, 여러분은 져 긔 올나간 져 國旗를 다시 ᄯᅡ 우에 ᄯᅥ루려 하심닛가.(이 ᄯᅢ에 會衆의 울음소리는 가장 커지다) 한 번 놉히 단 이 旗를 永遠히 빗나게 합시다.”

이날 보도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식사와 축사, 기념사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비장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우리는 남의 혁명과 달라 처음에는 과거 일 년 간 오직 평화주의로만 진행하였지만, 금일에는 맹연猛然히 방침을 변경할 필요가 있나니, 이제부터 우리는 이천만이 최후의 일인까지 대한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싸워야 하겠고, 그리 아니하는 자는 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겠소.”라고 선언한다. 노동국 총판이었던 도산 안창호는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上帝가 허락하신 날이요, 일이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요, 이천만이 한 것이며,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요, 순결한 남녀의 피로 작정한 날”이라고 하였다.
삼일절을 국경일로 기념한 것은 임시정부가 처음이지만, 그날의 의미는 비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부활의 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삼일절’은 신문사의 사설이라기보다 독립선언서만큼이나 장엄한 선언문이다. “기미 삼월 일일. 대한의 독립을 선언한 날. 그날 오후 두 시. 옥탑공원에서 처음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 때. 이날은 부활의 날. 이때는 부활의 때. 반만년 역사가, 대한의 나라 이름이, 세계의 기억 중에 대한이라는 민족의 존재가, 오랜 통곡의 눈물 속에 잠겼던 태극기와 함께, 대한 민족의 자유가, 이 모든 우리의 귀한 것이, 생명처럼 귀한 것이 이날에 부활하였도다.”라는 표현에서 삼일절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두 연으로 된 시는 이 선언문의 내용을 잘 응축하여 보여준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3·1운동 1주년 기념식

ⓒ독립기념관

삼일절三一節

삼월 초하룻날 우리나라 다시 산 날
한양성 만세 소리 삼천리에 울리던 날
강산아, 입을 열어라. 독립 만세.

삼월 초하룻날 의인義人의 피 흐르던 날
이 피가 흘러들어 금과 옥이 되옵거든
삼천리 자유의 강산을 꾸미고저.

‘우리나라 다시 산 날’. 즉 삼월 일일은 부활의 날이며, 삼천리 모든 동포가 함께 외친 만세의 날이다. 의인들이 피를 흘리고, 그 피가 민족의 금과 옥을 이루어 자유의 강산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이 날짜에 보도된 삼일절 관련 자료로 송아지의 ‘즐김노래’, 김여金輿의 ‘삼월 일일’과 같은 시, 의암 손병희 선생의 격려문, ‘독립군가’ 등 어느 것 하나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삼일절」, 『독립신문』 제49호(1920. 3. 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임시정부의 삼일절 기념은 해마다 이루어졌다. 『독립신문』 1921년 3월 1일 ‘국경 축하회國慶祝賀會’에서는 상하이 재류 동포在留同胞들이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보도하였고, 의정원장 손정도의 ‘희생하자, 분발하자’라는 격려문을 싣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에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 다수 인사의 기념사가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암은, “우리 대한 민족의 삼월 일일 독립운동이 사천 년 역사적 정신을 부활케 하고, 세계 만국의 이목을 경동警動케 하여, 자결주의로 독립 자격이 있다는 것을 발표하게 된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곧 수백만 대 단체의 결집으로 전국 각처에 만세 소리가 동월, 동일, 동시 일제히 절규한 효력이라고 할지니, 우리가 이 운동을 계속 진행하자면 마땅히 최초 방법을 더욱 확장하여 적으면 수백만, 많으면 이천만 전체가 결집되어 일치 활동으로 독립기를 높이 펼쳐 들어야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니,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라고 선언한다. 즉 삼일 정신은 ‘동월, 동일, 동시’의 만세 소리가 상징하듯이, 우리 민족의 단결과 통일, 단합과 발전을 의미하며, 그것은 대한의 독립을 열망하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최대 원칙이기도 하였다. 삼일절. 그것은 임시정부의 비장한 국경일이자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마음에 새겨야 할 통일된 국민 의식의 본바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