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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순국선열기념일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순국선열기념일

— 글. 김성은(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국회기록보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 기사록」(1939)


순국선열 추도기념 통고문(1943. 11. 1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3·1절,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성립 기념일(양력 4월 11일), 망국기념일(국치일, 양력 8월 29일), 개천절(개천기원절, 단군탄신일, 음력 10월 3일), 순국선열기념일(양력 11월 17일)을 연례행사로 거행하였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지청천, 차리석 등 6명의 의원들은 ‘순국선열공동기념일殉國先烈共同記念日’을 제안하였다. 1년 중 하루를 정해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무명의 선열들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기리자는 취지였다. 의정원 회의에서는 원안대로 통과시키기로 의결했다. 순국선열기념일을 11월 17일로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여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혹은 망한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날을 기념일로 정한다.”(「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 기사록」)

“순국한 분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으니 나라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다만, 경술년 8월 29일의 병합 발표는 이미 껍데기만 남은 국가의 종말을 고하였을 뿐이다. 사실상 을사년 11월 17일의 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기에 이날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삼는 바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1940년 2월 1일 자)


ⓒ독립기념관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순국선열식 거행 보고(1941. 11. 18.)

1940년 11월 17일 제1회 순국선열기념일(애국선열기념일)을 맞이하여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시重慶市에 거주하던 한국독립당 당원들과 가족 30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했다.(『제시의 일기』) 1941년 미국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에서 순국선열기념식을 거행했다는 보고서가 남아있다.(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순국선열기념일을 법정기념일로 기리기 시작한 영향이다. 194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내무부장 조완구 명의(도장)로 11월 17일은 순국선열 추도 기념일이므로 모든 개인과 단체가 경건하고 침통하게 기념할 것을 알리는 순국선열 추도기념 통고문을 발송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순국선열기념식이 민간단체 주관으로, 1962년부터 1969년까지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1970년부터 다시 민간단체 주최로 개최되었다.
1997년 5월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순국선열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재지정되면서 국가보훈부에서 주최하게 되었다. ‘순국선열의 날’과 ‘순국선열’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별표] 1 각종 기념일(제2조 제1항 관련)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위훈을 기리는 행사를 한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적용 대상자)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독립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은 이 법에 따른 예우를 받는다.
1. 순국선열: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建國勳章・건국포장建國褒章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
2. 애국지사: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0년대 영화 <암살>(2015년), <밀정>(2016년)이 연이어 개봉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2024년에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있다. 여기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두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인순李仁橓(1893~1919)과 이의순李義橓(1895~1945)은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강정혜 여사의 첫째 딸과 둘째 딸이다. 원적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이고, 본관은 하빈(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이동휘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2년 가족들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했고, 이후 러시아露領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신한촌新韓村에 정착했다.
이인순은 북간도 연길 국자가局子街 조선여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동휘를 따라 남편 정창빈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정착했다. 연해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이동휘(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경제적으로 돕고자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 활동을 하던 중 1919년 11월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27세에 요절했다. 같은 해 아들 정광우마저 5세의 어린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남편 정창빈은 이듬해 1920년 1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의순(1895~1945)은 1911년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에서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 활동을 통해 명동촌 명동학교明東學校에 여학교를 병설시키는 데 기여했고 명동여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18년 가을 아버지 이동휘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에 정착했다. 신한촌에서는 삼일여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이동휘를 따라 상하이로 이주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했다. 같은 날 상하이에서 김순애金淳愛·이화숙李華淑·이의순을 비롯해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19년 7월 ‘대한적십자사1’ 재건에 동참했다. 대한적십자회는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의 구호를 목적’으로 재건된 구호단체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조직이었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는 김순애, 이화숙, 이의선 3인이 대한적십자회 임원진으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0년 1월 대한적십자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구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했다. 수업 기간은 3개월, 수업 시간은 매주 18시간이었다. 실습은 중국 홍십자병원 의사 김창세의 소개로 상하이 시내 각 병원에 의뢰해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의순은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잠시 돌아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는 이의순·채계복蔡桂福·이혜주李惠珠 등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부인독립회’로 개칭했다. 이의순은 1919년 10월 회원 수 50명의 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 5월 러시아 연해주 대한적십자회 간호부양성소에서 간호교육을 이수했다. 이는 상하이에서 재건된 대한적십자회 부설 간호원양성소의 구호교육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에서는 세계 각지의 한국 여성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을 크게 전개하고자 했지만, 재정이 부족해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1922년 회원들은 가무극연주회를 개최하고 1원의 입장권을 발매하여 그 수입으로 활동비를 충당했다. 이의순은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가 개최한 가무극연주회 행사의 개회사를 담당했다. 이 무렵 이의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대한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 후 3여 년이 지나도 별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의 독립운동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져 우울과 괴로움이 쌓여갔다. 1922년 3월 20일 상하이 학생회에서는 이들을 위안하고 청년의 운동도 장려하기 위해 상하이 중국인 공공체육장에서 춘기 육상대운동회를 개최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꽂아놓은 태극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경기가 진행되었고, 국내외 다수 인사가 참관했다. 청년들의 운동경기 사이사이에 어린 학생과 부인의 경주도 있어서 재미를 더했다. 운동경기는 우승을 향해 필사의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목표 의식을 일깨우고 활발한 기상을 북돋우는 계기로 작용했다. 각종 운동경기가 끝난 다음에는 시상했는데, 대한애국부인회의 김순애와 이의순이 각 우승자에게 상품과 상장을 수여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각지의 한국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이의순은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파견되어 ‘개조론’(임시정부 체제를 유지하되 개선하자)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해산하면서 임시정부는 침체되어 갔고 대한애국부인회 활동도 둔화되었다.
1930년 8월 상하이에서 ‘상하이한인여성동맹’의 주비위원籌備委員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 1932년 상하이사변으로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정체되어 있던 대한애국부인회도 활동을 재개하였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중국인 농부와 한국인 농부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인 배척이 격화되었다. 임시정부는 국내 한국인의 중국인 배척 현상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일부 한국인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고 보았다. 7월 10일 대한애국부인회를 포함하여 상하이 한인단체 대표 30여 명이 모여 대책을 토의한 결과 ‘상하이한인각단체연합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 약간 명을 선임하기로 했다.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회장 이의순이 파견되었고, 이의순은 이 회의에서 상하이한인각단체연합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31년 7월 23일 반일연합회 주최로 중국 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한국에서의 중국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의순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5년 5월 8일 별세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 대한적십자는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 칙령 제47호에 따라 조직되었다가 1909년 일제의 강압으로 통폐합되었음(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