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
— 글. 김용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같은 공식적인 국경일 이외에 기념일도 정해 행사를 거행하였다.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기념일’, 8월 29일 ‘국치일’ 등을 기념한 것이다.
특히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은 초기에는 ‘헌법발포일’, 뒤에는 ‘임시정부성립기념일’이라고 하여 매년 기념식을 가졌다.
독립운동 시기 우리 겨레는 자주독립의 꿈과 국민주권의 이상을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민은 노예 상태에 처해 있고, 주권은 빼앗기고, 영토는 강점당한 그야말로 척박한 땅 위에 희망의 꿈나무를 심은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것을 근대국가의 조건을 따져 국민·주권·영토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므로, ‘근대 국가와 정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자기 비하도 그런 자기 비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국내는 물론 일본 도쿄, 중국 만주와 러령 연해주, 미주 등 내외 동포의 독립선언과 열화 같은 3·1운동의 결실이란 발생가치를 가진다.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 대한의 독립국임과 대한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당시 2천만 동포 가운데 적어도 2백만 동포가 목숨을 건 독립 만세운동으로 분출된 찬성 의사를 결집하여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묵시적 동조자까지 포함한다면, 그야말로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온 겨레의 전폭적인 지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체이자 국체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 성문 헌법이다. 선포문과 전문 10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헌의회’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만들어졌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11일 오전 10시까지 상하이 찐션푸로金神父路 60호에서 열린 제1회 의회에서 제정하여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 국호로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 그리고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한 각부 총장(장관) 등 각료들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더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함으로써, 고조선 이래 반만년 지속된 군주전제 국가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제 국가가 새롭게 성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왕국(제국)’에서 ‘민국’으로, 우리 인민은 봉건국가의 ‘신민臣民’에서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나아가 무권리의 ‘백성’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진실로 우리 역사의 일대 전기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이자 정부임을 천명했기에 국가 상징의 여러 일들을 행하였다. 국기와 국가를 정하여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제창한 것이다. 나아가 국경일을 제정하여 우리 민족의 중요 역사와 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하였다.
국경일 제정 논의는 통일 임시정부가 성립한 뒤 본격화되었다. 1919년 12월 1일 국무원이 주관한 정례 국무회의에서 국경일 제정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이다. 이날 국무회의는 오후 2시 30분부터 5시까지 열렸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은 이동휘(국무총리)·이동녕(내무총장)·이시영(재무총장)·안창호(노동국총판)와, 장건상(외무차장)·이규홍(학무차장)·김철(교통차장)·김립(비서장) 등 8명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1921. 1. 1.)
여기서 ‘국경일안’·‘국경일 명칭안’을 기초할 부서와 담당자가 정해졌다. 안건을 기초할 부서는 법무부 ‘법제국’이었으며, 담당자는 ‘법제국장’이었다. 법제국은 국무원의 소관부서로 “법률제도의 기초·심사·입안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국경일안·국경일 명칭안을 기초한 사람은 신익희이다. 당시 신익희가 법무차장 겸 법제국장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법무부 법제국에서 기초한 국경일안·국경일 명칭안은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논의됐다.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1920년 2월 23일부터 3월 30일까지 열렸다. 국경일 제정 문제는 3월 9일 회의에서 제1독회가, 이어서 3월 15일 회의에서 제2독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국경일로 ‘독립선언일’과 ‘건국기원절’을 제정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정한 것이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음력 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한 것이다. 이후 1939년 11월 21일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된 11월 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대 국경일이 정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같은 공식적인 국경일 이외에 기념일도 정해 행사를 거행하였다.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기념일’, 8월 29일 ‘국치일’ 등을 기념한 것이다. 특히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은 초기에는 ‘헌법발포일’, 뒤에는 ‘임시정부성립기념일’이라고 하여 매년 기념식을 가졌다.
『독립신문』 1922년 5월 6일 자 기사는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의원 김인전 등의 제의안 심사보고. (임시의정원) 원법 제58조에 의하여 4월 11일(헌법발포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의원 김인전 등 6인의 제의안에 대하여 심사보고가 유할 지旨를 의장이 선宣하니 심사위원 정태희로부터 좌左와 여如히 보고하다. 이미 기념일로 되어진 그날을 국경일로 승격할 필요가 없음. 본안은 제2회 독회에 부付할 필요 없이 곧 표결하기로 조상섭이 동의하여 가결되다. 의원의 기립으로써 가부를 표결한 결과 가7 대對 부10으로 본안(헌법발포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김인전 등 6인의 제의안)은 부결되다.”
논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김인전 등의 제의안은 1922년 3월 14일과 3월 17일 회의에서 논의됐다. 먼저 3월 14일에 제1독회가 있었다. 제1독회의 회의 기록을 보면, 이 안건을 제출한 사람은 김인전·조완구·양기하·도인권·오희원·민충식 등 6명의 의원이었다. 이 가운데 김인전이 대표로 제안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김인전 등의 제안자와 장붕·김용철·윤기섭·이유필·손정도 등 다른 의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안건은 이유필의 제안으로 ‘심사위원회’에 회부하고, 여기서 ‘이미 기념일로 된 것을 국경일로 승격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해 보고한 것이다.
이를 보면, 임시정부에서는 1922년 이전에 이미 4월 11일을 ‘헌법발포일’로 정해 매년 정부수립을 기념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 4월 11일 ‘헌법발포일’을 국경일로 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는 국경일 이외에 ‘기념일’을 따로 정해 거행하였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인 ‘헌법발포일’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 임시정부 장정시기와 1940년대 충칭重慶시기의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은 ‘헌법 발포’ 그것보다는, ‘정부 성립’ 자체를 기념하는 양상으로 바뀐다. 이는 1920년대 상하이시기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제’ 헌법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발포한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까닭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윤봉길 의거와 중일전쟁으로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던 장정시기와,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이 절박하던 충칭시기에는 ‘정부의 존재’ 그 자체가 매우 소중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헌법 발포’와 함께 ‘정부 성립’을 더욱 중요시한 결과로 보인다.
그것은 장정시기 임시정부 유지 정당인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과 충칭시기 중국신문에 보도된 ‘임시정부 성립 기념’ 기사를 봐도 쉽게 이해된다. 1937년 4월 30일 발행된 『한민』 제13호에는 「임시정부의 성립을 기념하자」, 「임시정부의 성립 경과」, 「아 임시정부 성립 기념」 등 임시정부수립기념일 기사가 잔뜩 실려 있다. “4월 11일이 임시헌장을 발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성립한 기념일. 기미년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 독립을 선언한 후 국내외 각지 각계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이 상하이에 모여 전국 인민의 요구에 의하여 그해 4월 11일에 임시로 10개조의 헌장을 제정 발포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금년 4월 11일 임시정부를 성립한 지 제19회째 되는 기념일임으로 임시정부에서는 그날에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한다.”
1938년 4월 3일 발간된 『한민』 제17호에도 「임시정부 성립 기념」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식을 예고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달 4월 11일은 민국 원년(1919) 이날에 각지 대표가 상하이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제정 발포한 후 임시정부를 성립한 날임으로 임시정부에서는 그날 모지某地에서 기념식을 거행한다 한다.”
「의원 김인전 등의 제의안 제1독회」, 『독립신문』 제124호(1922. 5. 6.)
윤봉길 의거 이후 8년간의 대장정 끝에 충칭에 정착한 뒤에도 임시정부수립기념식은 매년 거행되었다. 당시 중국신문 기사가 그런 사실을 잘 말해준다. 충칭 『대공보』 1942년 4월 11일 자는 「한국임시정부 성립 기념」이라는 제목 아래, “오늘은 한국임시정부 성립 23주년 기념일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나아가 「조선의 해방」이라는 사설에서, “오늘은 한국임시정부 성립 23주년 기념일이다. 한국혁명 영수 김구와 조소앙 두 사람은 어제 특별히 자링빈관嘉陵賓館에 중외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다과회를 베풀고, 한국인들의 바람을 숨김없이 피력하였다.”라고 기념식 거행 사실을 알리고 있다.
『신화일보』에도 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1942년 4월 12일 자에 「한국임시정부, 어제 성립 23주년 기념식 거행」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임시정부는 11일 오전 8시 성립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기념식에는 임시정부의 수장 및 충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교 등 1백여 명이 참석하였다.”라고 기념식 거행 사실을 보도한 것이다.
미주 한인동포들이 발행한 『신한민보』에도 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1943년 7월 1일 자 신문에 게재한 「외무부장 조소앙의 포고문」을 통해 임시정부수립기념일과 그 의의를 널리 알린 것이다.
“4월 11일은 임시정부 성립 기념일이다. … 정부 성립 제24주년 기념일을 당하여 전 세계 특히 미국에 거류하는 수만 동포에게 향하여 일언을 고하노라. 1919년 3월 1일에 대한민국의 독립국임과 대한민족의 자유민임을 삼천만 동포의 일치한 소리로써 선포하였다. 수백만 혁명 대중들이 일본 제국주의자의 포화와 항쟁하여 피바다에 헤엄치는 일면에 민주정치 초석 위에 의정원과 임시정부를 건립하며 헌장을 선포하여 동방에 일개 민주국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 이족異族의 정치세력이 한국에 침입한 후로 극단의 전제정치가 실행되었다. 이 전제의 독무를 일소하고 이족의 식민정치를 부인하고 근대식 민주제도를 건립한 것이 24년 전 4월 11일에 발표된 10조 헌장이 이것이다. 이 날을 기념하는 의의가 여기 있다(『신한민보』 1943년 7월 1일 자).”
특히 1945년 4월 11일 거행된 제26주년 임시정부수립기념식은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대한민국 27년(1945) 4월 11일 상오 10시에 중국 충칭시 렌화츠蓮花池 전가4호前街四號 정부대례당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8차 의회 개원식을 거행하다. 이날이 역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성립 제26주년 기념일임으로 의회 개원식과 성립 기념식을 합병 거행하다(「임시의정원 제38회 회의록」).”
각고의 노력으로 임시정부를 유지해 왔던 우파 민족진영이 좌파 민족진영과 합세하여 군사통일과 통일의회를 이룩하고, 연합정부를 구성한 뒤 함께 임시정부수립기념식을 거행한 것이 바로 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온갖 고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조국광복의 길을 열어온 좌우 민족진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뭉쳤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한 한국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주권 기관으로 우뚝 선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일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