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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자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정과 통합을 기도했던 대한민국 6년력과 8년력

임시정부의 자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정과 통합을 기도했던 대한민국 6년력과 8년력

우리나라 역서의 시작은 5세기경이다. 동아시아에서 역서의 반포는 황제의 고유한 권리였고, 제후국에는 시혜였다.

─ 글. 김시덕(을지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6년력

대한민국 8년력

우리나라 역서曆書의 시작은 5세기경이다. 동아시아에서 역서의 반포는 황제의 고유한 권리였고, 제후국에는 시혜였다. 이는 왕(황제)이 백성들에게 천체의 운행을 보고, 농사의 시절을 알려주는 것이 권한이자 의무였기 때문이다. 당시 달력은 한마디로 왕권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이 달력을 만들거나 배포하면 엄벌에 처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달력을 만들어 대한국인에게 배포한 것은 달력의 고전적 권력이자 독립운동의 시간 축을 통일하려는 국가의 통치 행위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달력은 1920년 ‘대한민력’과 1922년 ‘대한민국 4년 역서’이다. 그 이후에는 독립신문사에서 1923년 ‘대한민국 5년력’, 1924년 ‘대한민국 6년 갑자 음양 합력 표(이하 ’6년력‘)’, 1926년 ‘대한민국 8년력(이하 ’8년력‘)’을 발간하였는데, 신년 부록 증정품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1년도 훌쩍 넘은 1920년 12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자 상하이로 왔다. 그러나, 갈등으로 1921년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를 비롯해 신채호, 안창호, 김규식 등이 임정을 떠난다. 또한 소련 공산당파, 중국 배일 정당파, 만주의 무장 투쟁파, 외교파 등이 서로 엇갈려 갈등이 심했다. 경신참변, 자유시 참변, 일제의 밀정 파견 등으로 중국의 독립운동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또한 임정의 연통제, 교통국 기능 상실 등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표로 파견된 후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아 혼란은 더욱 컸다.
이를 타개하고자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의장 일송 김동삼)를 개최하였으나 이 역시 분열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또한 만주의 무장투쟁 전선에서도 대한통의부가 의군부, 참의부로 갈라지고, 다시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분열되어 혼란은 그칠 줄 몰랐다. 내외의 사정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서 직접 영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금이 없으면 독립운동의 성과를 내지 못하므로, 미주에서 자금을 모은다는 이유로 상하이행을 거절한다. 견디다 못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하고 면직시킨다.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헌하고 7월 7일에 사임한다.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으나 내각 조직에 실패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926년 12월 10일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바꾸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이 수석으로 취임하면서 비로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 체제가 안정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6년력과 8년력은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발행된 달력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닌 독립신문사에서 독자들에게 신년 부록으로 증정하려고 발행한 것이어서 달력이 가지는 국가 통치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다. 물론 독립신문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였기에 유권해석할 수도 있지만, 독립신문사는 합자회사 형태였다.

대한민국 6년력

대한민국 6년력은 1924년 1월 1일 자 『독립신문』 중문판 37호 부록이다. 독립신문사는(당시 사장 김승학, 주필 박은식) 1922년 7월 15일 자매지로 중문판을 창간하였다. 중국인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 공동의 적 일본에 함께 대항하자는 선전용이었다. 따라서 부록 달력 역시 한문으로 발행하여 중국인에게 배포할 목적이 분명해 보인다.
6년력은 청색으로 인쇄되었고, 상단 가운데 태극기와 ‘공하신년恭賀新年’이라는 글자만 적색으로 인쇄하였다. 모든 글자는 세로 중심이고, 일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한문 중심의 서식이다. 신문의 구성은 상단에 아치형으로 ‘대한민국 6년 갑자 음양 합력 표大韓民國六年甲子 陰陽合歷表’라는 다소 중국스러운 명칭을 붙였다. 1924년이 음력으로 ‘갑자년’이었기 때문이다.
공하신년 좌측에는 우서로 ‘正月爲陰曆首’, 즉 정월은 음력을 시작으로 한다. 그 아래에는 ‘△ 三伏表’, △는 삼복표라는 의미로 삼복을 절기처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에는 ‘一月爲陽曆首’, 1월은 양력의 시작이라고 표기하고, 그 아래에 ‘○ 日曜表’라 하여 날짜 아래에 ○한 것은 일요일을 표시함을 알 수 있다.
굵고 옅은 이중선 바깥 왼쪽에는 ‘獨立新聞漢字報第三十七號附贈’, 『독립신문』 한자보 제37호 부록 증정품이라는 뜻이다. 인쇄소는 ‘三一印書館印刷’라고 괄호로 표기하였다. 오른쪽 바깥에는 ‘紀元四千二百五十七年’, ‘西曆一千九百二十四年’, 단기와 서기로 달력의 사용 연도를 표기하였다. 바깥쪽 아래에는 세로로 ‘朔日’이라는 제목으로 ‘正月小 甲寅’처럼 매월 초하루를 오른쪽에서 왼쪽 쓰기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1월을 작은 달로 표기한 6년력과 1월을 큰달로 표기한 만세력이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 책력에 맞추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중선 안쪽 좌측에 큰 글씨로 쓰인 ‘五洋咸熙賀獨立新聞之五週’는, ‘오대양에서 함께 『독립신문』 창간 5주년을 축하한다.’라는 뜻으로 1919년 8월 창간한 『독립신문』이 5주년을 맞았음을 축하하는 글이다. 그 아래로 가는 선으로 칸을 나누어 ‘國恥日八月廿九日’, 8월 29일 국치일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御天節三月十五日’, 대종교의 어천절인 3월 15일을 표기하였다.
오른쪽에도 ‘六洲同春迎大韓民國之六年’, 6대 주에서 같은 봄에 대한민국 6년을 환영한다는 축하 글을 넣었다. 그 아래에는 역시 칸을 나누어 ‘獨立宣言 三月一日’, ‘開天節 十月三日’을 독립선언일과 개천절을 국경일로 표기하였다.
그 안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12월을 나누고, 오른쪽 시작 부분에 ‘一月’, ‘二月’ 등 월별을 한자로 표기하였다. 각 월 1일부터 말일까지 양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표기하고, 그 아래에는 음력을 표기하였다. 양력과 음력 날짜 아래는 일요일 표인 ‘○’, 절기인 ‘立春’, ‘日蝕’과 ‘月蝕’ 등을 한자로 표기하였다. 7월 20일, 30일, 8월 9일에 ‘△’ 복날을 표기하였다. 1924년은 입추 다음 날에 말복이 왔는데, 월복이었다.
6년력의 달력 내용은 ‘대한민력’에 비해 정보가 소략하다. 주간과 야간 시간, 상현과 하현, 날짜별 간지 등의 정보를 표기하지 않았다. 혼란에도 불구하고 6년간 존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6년력의 디자인 요소는 청색으로 인쇄하고, 태극기와 새해 인사말을 적색으로 인쇄한 것 정도이다. 독립신문은 매년 1월 1일과 3월 1일은 적색(119호, 1922.1.1.; 150호, 1923.1.1.; 156호, 1923.3.1.; 169호, 1924.1.1.; 172호, 1924.3.1.; 190호, 1926.1.1.)이나, 청색(180호, 1925.1.1.; 182호, 1925.3.1.)으로 인쇄하였다. 그래서 부록으로 증정한 달력 역시 청색이나 적색이었다.

대한민국 6년력 (『독립신문』 중문판 제37호 부록, 1924. 1. 1.)

1대한민국 6년 갑자 음양 합력 표
2정월은 음력을 시작으로 한다.
31월은 양력의 시작이다.
4독립신문 5년 축하
5대한민국 6년 환영 축하
67국치일·국경일 등 표기

대한민국 8년력

1926년 1월 1일 『독립신문』 ‘신년 특간호’를 발간하면서 1면에는 사설, 2면에는 달력을 실었는데, 그것이 대한민국 8년력이다. 크기는 타블로이드판이고, 적색으로 인쇄하였다. 사설에서는 ‘3·1운동 후 임정의 독립운동이 성과도 있었지만, 계파 간의 파벌이 심해 전선이 분열되어 독립운동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 신년에는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이해하는 태도로 손을 잡고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여 대동 전선을 이루고, 나아가 세계의 우호국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자’고 호소하였다.
신문의 구성은 전체를 굵은 선과 얇은 이중선으로 둘렀다. 그 안쪽 가장 위쪽에 선 없이 구성한 아치형으로 ‘恭賀新年’을 큰 글씨 워드 아트로 배치하고 그 가운데에 교차한 태극기를 그렸다. 그 아래로 가운데에 ‘大韓民國八年曆’이라고 큰 글씨로 쓰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오른쪽에는 ‘紀元四千二百五十九年’, 왼쪽에는 음력 간지인 ‘丙寅’을 표기하였다. 그 아래로 오른쪽에는 ‘西曆一千九百二十六年’, 왼쪽에는 윤년이 아니라는 의미로 ‘平年三百六十五日’을 표기하였다. 연도는 양력과 음력, 단기와 서기 등 네 가지로 표기하였다.
제목 오른쪽에는 1월부터 6월까지, 왼쪽에는 7월부터 12월까지 달력을 배치하였는데, 현대의 달력처럼 위쪽에 요일을 표시하고, 요일에 맞춰 날짜를 배치하였다. 월 표시에는 음력의 대소를 구분하였다. 제목 아래로는 음력 달의 대소, 간지를 표기하고 그 아래에 24절기의 날짜를 표기하였다. 절기 표기가 끝나면 칸을 달리하여 ‘國慶日’을 표기하였는데 ‘獨立宣言日 三月一日’과 ‘建國紀元節 十一月七日 陰十月初三日’이다. 그 왼쪽에 칸을 구분하여 ‘國恥日 八月二十九日’을 표기하고 그 옆으로 ‘三伏’, ‘初伏 六月十五日’, ‘中伏 六月廿一日’, ‘末伏 七月初二日’을 표기하였다. 다시 왼쪽에는 ‘寒食 二月二十四日’, ‘臘日 十二月初五日’, ‘日蝕 一月十四日, 七月十日’을 표기하였다.
이 달력의 특징은 6년력보다 많은 음력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지만, 좌우 아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강조하는 표어를 크게 붙인 점이다. 가운데 아래쪽에는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자는 의미의 ‘統一集中’을 큰 글씨로 표기하였다. 신문의 오른쪽에는 세로로 ‘獨立運動을 하로밧비 成就하랴거든 獨立戰線을 하로밧비 統一하여라’라는 표어를 길게 표기하였다. 왼쪽에는 세로로 ‘獨立戰線을 하로밧비 통일하랴거든 臨時政府로 하로밧비 集中하여라’라는 표어를 걸었다. 신문의 하단에는 ‘社章’을 실어 『독립신문』의 운영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연해주, 만주, 미주 등 흩어져서 각자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감은 매우 약했다. 만주에서는 봉오동과 청량리 전투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경신참변, 자유시 참변 등으로 독립운동 계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위기와 계파 간의 분열,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통치하지 않은 이유 등으로 흩어져 있었던 독립운동의 전선을 통일하고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음에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분열로 성과가 없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야말로 위기였다.
8년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독립신문』이 독립운동의 전선을 통합하려는 목적에서 발간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이 할 수 있는 일은 신문 지상에서 독립운동의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을 글로 홍보하거나 일깨우는 정도였다. 그래서 독립 전선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일원화할 것을 일깨울 목적으로 1926년 1월 1일 사설과 달력으로 구성된 ‘신년 특간호’를 발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1926년 이후 1927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도 안정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8년력 (『독립신문』 신년 특간호 1926. 1. 1.)

1국경일 표기
2삼복, 한식 등 정보 소개
345독립전선 통일 촉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