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삼일절
— 글. 김광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으로 나타난 독립국가·민주공화국가 수립의 민족적 의지를 수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일대 사건이 3·1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3·1운동의 역사적 소산이자 3·1운동의 계승체로 자임하였다.
그런 만큼 임시정부와 한인들에게 삼일절 기념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날이었다. 임시정부는 삼일절 기념일을 ‘독립선언일’이라는 국경일로 제정하고 성대한 기념활동을 거행하여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서러움을 위로하고 결사항전을 다짐하였다. 동시에 삼일절 기념행사는 한민족이 서로 화합하는 자리이자 민족 모두의 축제의 장이자 명절이었다.
삼일절 기념활동은 국외 한인사회의 통합과 결속, 애국심의 고취 및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나아가 독립운동을 촉진하고 심화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운동이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삼일절을 국경절로 지정하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했다. 특히 처음 맞이하는 1920년의 삼일절은 대단히 뜻깊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던 『독립신문』은 3월 1일 자 제49호 신문을 발행하여 삼일절을 기념하였다. 특히 이날 신문에는 삼일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수록하였다. 선언서 위에는 태극기를 교차하였으며 태극기 양쪽에는 ‘독립만세獨立萬歲’라는 글자를 넣었다.
상하이에서의 삼일절 기념활동은 3월 1일 당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6시부터 샤페이로霞飛路 바오캉리寶康里 일대 등 한인이 많이 사는 곳에는 가가호호 태극기가 게양되어 바람에 휘날렸다. 이날 오전 10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요인들과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한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은 애국가를 합창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시작으로 이동휘 국무총리, 손정도 임시의정원 의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계속하여 학생들의 ‘독립군가’ 합창이 있은 다음에 국무총리의 만세삼창을 끝으로 폐회되었다.
「선언서」, 『독립신문』 제49호(1920. 3. 1.)
삼일절 기념활동의 메인 이벤트는 이날 오후에 있었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상하이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거의 대부분의 한인들이 집결한 성대한 삼일절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기념식 장소는 공공조계 징안스로靜安寺路의 올림픽극장夏令配克大戱院이었다. 1914년 개관한 올림픽극장은 당시 공공조계에서 가장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던 대형극장이었다.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를 벗어나 공공조계의 대형극장에서 행사를 거행한 데는 대외적인 선전효과가 컸기 때문이었다.
기념식장에는 만국기와 태극기가 바다를 이루어 분위기는 더없이 고조되었다. 주석단에는 두 면의 큰 태극기를 교차하였다. 주석단 양쪽에는 한자로 ‘독립만세獨立萬歲’라는 표어를 걸었으며 장내에는 만국기를 게양하였다. 교민단 단장 여운형이 기념식 개최를 선언하였다. 다음 군악대가 연주하는 반주에 맞춰 전체가 기립하여 애국가를 고창한 후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하고 삼일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었다. 이날 안창호는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고 잊지 말자 함이요”라고 역설하면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각오를 다짐하였다.
올림픽극장에서 열렸던 첫 번째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하였던 중국 문인 캉바이청康白淸은 후에 “올림픽극장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시로 당시의 감동을 묘사하였다.
「상하이의 삼일절」, 『독립신문』 제50호(1920. 3. 4.)
“오늘은 대한민국 독립선언 기념일이다.
오늘 올림픽극장에 신사 숙녀 삼사백 명이 왔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엄숙한 선언을 하자
일제히 국기의 게양을 바라보며 경례했다.
4천 년의 문명을 한껏 품은 어젯밤 그 아리따운 여가수들이
그들의 처연하고 한 맺힌 노래를 또 한 번 부르고
청수淸秀한 대한민국 국가가 이어지면서
청중 모두는 얼굴을 감싼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비장하다!
주최측과 귀빈들이 침통한 연설을 이어가는 동안
모두가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는데
침울하고 애달픈 피아노 소리와 함께
내 손수건은 눈물로 젖어버리고 말았다. .....
오오! 잊지 마십시오.
오늘 1920년 3월 1일 상하이 올림픽극장의 비극을
당신은 잊지 마십시오!”
독립기념관, 『중국문인의 한국독립운동 시가집: 백화시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61집, 2022.
삼일절 기념식의 장엄했던 광경은 당시 독립신문의 보도와 기념사진 등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참석한 이들 가운데 기념식 광경을 본 후 감격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족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상하이에 사는 교민들도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홍커우虹口에서 일본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출석할 정도였다.
삼일절 기념식에는 한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참석했다. 특히 1924년과 1925년에 열린 기념식에는 역시 열강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와 필리핀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여 의미를 더했다. 충칭시기 삼일절 기념식에는 중국인, 서방인과 대륙보, 구국일보 등 중국 신문기자들도 초청을 받고 참가하였다.
1921년 3월 1일 상하이 올림픽극장에서 개최된 삼일절 기념식 광경
올림픽극장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끝난 후 청년들은 자동차 시위를 감행하였다. 청년들은 몇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가두행진을 벌이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의 구호를 높이 외쳤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쳐다보면서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자동차 시위대는 프랑스 조계 샤페이로를 가로질러 공공조계 시장로西藏路를 거슬러 올라가 공공조계의 중심인 난징로南京路에서 태극기 시위를 하고 더 나아가 홍커우지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앞에까지 가서 시위를 하였다. 독립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홍커우지역 일본영사관 앞에 나타난 자동차 시위대는 일본 관헌들을 경악게 하였다고 한다. 차량 시위대가 홍커우지역 일본영사관 앞에 가서 만세시위를 하고 돌아오면서 삼일절 날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자동차 시위는 다음 해인 1921년 삼일절 때도 재연되었다. 자동차 시위는 “倭에게 對하여서는 우리를 보아라 하는 듯하고 다른 外國사람에게 對하여는 우리는 異族의 嵌制를 밧지 안을 大韓人이다”(『獨立新聞』 1921년 3월 5일)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1923년 삼일절에도 자동차 시위가 있었다. 이때 자동차 시위에 참여했던 김명수는 청년들의 자동차 시위대가 가든브리지를 넘어 홍커우지역의 일본영사관 앞에서 만세를 고창하고 일본인 거주지역 일대를 거쳐 돌아오는 통쾌한 경험을 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22년 이후 삼일절 기념식은 상하이 공공조계 시장로의 닝보寧波 동향회관에서 개최되다가 나중에는 프랑스 조계 침례당, 삼일당에서 개최되었다. 임시정부는 삼일절 기념식을 더 이상 공공조계의 올림픽극장 같은 큰 장소에서 열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영사관의 압력 외에도 임시정부의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의거로 인해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9년 충칭에 도착하는 이동시기 동안 몇 차례 삼일절 기념선언을 발표하는 외에는 기념행사를 거행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한 직후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까지 규모있는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충칭시기 삼일절 기념식에는 중국을 비롯한 외국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39년 3월 1일 중국국민당 충칭시당부 강당에서 개최된 3·1운동 기념식에는 200여 명의 한인 및 국민당정부 인사가 참석하였다. 이날 행사는 김구의 기념사, 김두봉의 3·1운동 약사보고 그리고 국민당정부와 중공팔로군·동북구망총회 대표의 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3·1운동 기념행사는 한인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다짐하는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중 양 민족 국제적 연대의 주요한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국독립선언 24주년 기념식 내빈 서명부(1943.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