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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독립운동

서울 중심부에서 만나는 독립운동 사적지, 탑골공원에서 경교장까지

세계의 독립운동

서울 중심부에서 만나는 독립운동 사적지, 탑골공원에서 경교장까지

지난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 글. 인지민(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서울역사박물관

3·1독립선언서(1919)

지난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처럼 잘 알려진 기념일은 아니지만, 독립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일제 치하 36년 동안 손꼽힐만한 의미 있는 날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시정부의 탄생에는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목놓아 독립을 외친 3 ·1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3 ·1운동의 중심지인 북촌과 탑골공원, 우리 민족의 아픔을 담은 서대문형무소,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경교장을 살펴보며 그날의 함성을 떠올려보자.

3 ·1운동의 숨은 시작점 - 북촌

일반적으로 3 ·1운동 하면 단번에 탑골공원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곳이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3 ·1운동의 숨은 시작점은 종로구 북촌 일대이다.
1919년 1월 말,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송계백宋繼白(1896~1920)은 종로구 계동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의 교장 송진우宋鎭禹(1890~1945), 교사 현상윤玄相允(1893~1950)을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며 2· 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전달했다. 그 후 이 소식을 들은 최린崔麟(1878~1958),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여러 번의 회동을 가지며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족대표를 교섭하는 등 3 ·1운동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계동에 있던 김성수金性洙(1891~1955)의 집에서 천도교계 최린, 기독교계 이승훈李昇薰(1864~1930)이 독립운동을 위한 연대를 합의하고, 마지막으로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거처였던 ‘유심사惟心社’를 찾아 불교계의 참여를 이끔으로써 민족대표의 골격을 완성할 수 있었다.
2월 27일 밤, 최남선이 기초하고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작성된 독립선언서 2만여 매가 수송동에 위치했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되었고, 다음 날 밤 한용운이 ‘유심사’에서 독립선언서의 배포를 지시하면서 전국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2월 28일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집에서 회합을 가진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식의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泰和館으로 변경했고, 다음 날인 3월 1일 오후 2시 이곳에서 한용운의 선창으로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후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 현장 속으로 - 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과 약속한 대로 서울지역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를 기다렸다. 하지만 민족대표의 불참으로 동요하던 중, 군중 속 한 사람이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사람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거리로 쏟아져나가 서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탑골공원을 출발한 학생과 민중들로 가득 찬 곳은 종로거리였다. 종로는 1919년 3월, 만세 시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 장소이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 경찰들이 가장 경계하던 지역이었다.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거리를 삼엄하게 지키면서 만세운동이 제한되자, 종로의 상점가들은 철시에 돌입해 4월 초순 일제에 의해 개점이 강제되는 시점까지 투쟁을 이어나갔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도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이틀 뒤인 3월 3일에 예정되어 있던 고종 장례식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20만 명의 사람들(당시 경성부의 인구가 약 25만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합세하면서 만세 시위 인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진압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친 함성은 서울을 뒤흔들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탑골공원의 팔각정 사진 엽서(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고난과 슬픔의 상징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

독립만세운동으로 붙잡힌 수많은 사람들은 서대문감옥(오늘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 ·1운동이라는 평화적인 만세운동에도 일제는 폭압적으로 대응하면서 서대문감옥의 당시 수감 인원이 매우 큰 폭으로 증가해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인원이 투옥되었다. 당시 서대문감옥 소장이었던 가키하라 다쿠로柿原塚郞의 회고 중 “재감자 중에는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에 동조하는 자가 있어 그 소란은 도저히 비할 바 없는 상태였고, 게다가 감옥 전방과 배후의 높은 곳에 독립운동원이 기어 올라와 낮에는 태극기를 휘두르고 밤에는 봉화를 올리므로…”를 통해 감옥 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수감자들의 열망이 끊임없이 분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관순柳寬順(1902~1920)이 이곳 지하 독방에 갇혔다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였고, 이후에도 윤봉길尹奉吉(1908~1932), 김구金九(1876~1949), 강우규姜宇奎(1855~1920)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다.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좁은 옥사부터 잔혹한 고문이 이뤄진 고문실, 사형장을 보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임이 느껴진다.
이러한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가 침략에 저항한 의병세력부터 독립운동가 등 애국지사들을 감금하여 민족적 저항 의지를 꺾겠다는 명백한 목표로 만든 곳이다.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마포형무소가 들어서면서 서대문감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광복 이후에는 서울형무소,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한 후 이곳은 폐쇄되었고,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철거되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들은 1988년 사적으로 지정된 것들이고, 이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오늘날의 탑골공원 팔각정

서대문형무소 전경(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감방(1924, 『조선형무소사진첩』)

오늘날의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 전경

오늘날 서대문형무소 건너편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눈길을 끄는 작은 벽돌집이 서 있다. 2019년 개관한 전시관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다. 재개발되기 전 이곳 무악동 골목은 오래된 한옥과 낡은 여관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1908년 경성감옥이 들어서면서 길 건너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이사를 왔거나 장기적으로 머물던 여관들이 빼곡이 들어서면서 ‘옥바라지 골목’으로 불렸다. 이곳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은 일제강점기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와 옥바라지하던 가족들의 애달픈 삶의 흔적을 담은 공간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전국적으로 확산된 3 ·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반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구심점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에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최초의 민주공화제를 도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27년간 정부의 조직을 유지하면서 민족의 대표기구로서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하였다.
임시정부 27년은 상하이 시기(1919~1932년), 이동 시기(1932~1940년), 충칭 시기(1940~1945년)로 나눌 수 있다.
상하이 시기에는 외교활동을 중시하면서 만주에서 활약하는 무장독립군부대를 통합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이후 내부적인 갈등으로 논란이 계속되며 임시정부가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李奉昌(1901~1932)과 윤봉길의 의열투쟁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의 감시와 수색, 재정적 어려움으로 자싱, 항저우, 난징 등으로 10여 차례 청사를 옮겨 다녔다. 이 시기가 바로 이동 시기이다. 마침내 충칭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한국독립군 창설 및 국내진공작전 추진 등 빼앗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을 접하고 김구, 김규식金奎植(1881~1950), 이시영李始榮(1869~1953)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1~12월에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게 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 경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는 서울의 ‘경교장京橋莊’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였던 최창학崔昌學(1891~1959)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며 1938년 지은 저택 ‘죽첨장竹添莊’을 환국한 임시정부에게 제공하였다. 김구는 이곳의 이름을 근처에 있던 ‘경교京橋’를 따 경교장으로 바꾸고 임시정부 청사로 삼았다.
이곳에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후 1949년까지 거주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무위원회가 1945년 12월 3일을 시작으로 1946년 1월 18일까지 총 9차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반대운동, 남북협상 등 해방 후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2층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하였고, 김구의 유족과 임시정부 요인들도 그해 8월 최창학의 요구로 경교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경교장은 1949년 11월부터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에 고려흥진주식회사에 매각되어 고려병원(오늘날 강북삼성병원)으로 사용되었다. 40년 가까이 병원 시설로 이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경교장을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2009~2012년에 응접실, 귀빈식당, 김구 집무실, 임시정부 요인 숙소 등의 복원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3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김구의 생애를 다루는 전시관으로 개관해 우리나라 현대사의 대표적인 역사 현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구와 피치부부 경교장(1947.7.24)

경교장에서의 신탁통치 반대 집회(1946, 『LIFE』)

오늘날의 경교장

경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