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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온 소식

사선을 넘은 학병들, 독립의 길로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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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은 학병들, 독립의 길로 나아가다!!

1945년 1월 충칭에 도착해서 느꼈던 ‘흥분과 격동의 감정’은 ‘죽음의 전장’을 뛰어 넘어 드디어 조국 독립의 현장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기쁨이 표출된 것이었다.

— 글. 조 건(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충칭 임시정부의 품에 안긴 청년들

1945년 1월 말 35명의 한인 청년들이 충칭에 도착했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이하 한광반)을 마치고 충칭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지난해 11월 산둥성山東省을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어야 하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출발한 지 2개월여가 지나서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품에 안착할 수 있었다.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金九 주석과 홍진洪震 임시의정원 의장을 만난 한인 청년들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45년 3월 1일자로 발행된 『독립신문(중경판)』 제6호에는 당시의 장면이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작년 11월 20일 산둥성 남부 모처에서 출발하였으나 적의 봉쇄를 뚫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겼었다고 한다. … 충칭에 도착한 날 저녁에 한국 임시정부가 성대한 환영회를 거행하고 김주석金主席, 홍의장洪議長, 각 국무위원, 각 부장이 열렬한 환영사를 하였다. … 그들은 모두 극단적 흥분과 격동된 감정으로 답사를 하였다. 그들은 국내에 있을 때 모두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들었고, 기회가 있으면 곧 달려오고 싶었는데, 지금 목적을 달성한 셈이라고들 말하였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환영회를 준비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참석해서 환영사를 했다. 한인 청년들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환영회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독립을 향한 의지 역시 높이 치솟았다.

한광반 ‘학생’들의 충칭 도착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중경판)』 기사(제6호,1945.3.1.)

『독립신문』은 환영회의 주인공들을 ‘한광반 학생’이라고 지칭했다. 이들이 ‘학생’인 까닭은 한광반에 들어오기 전 신분이 모두 대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사에는 이들의 신분과 나이, 그리고 그동안의 이력이 간략하게나마 기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쉬저우徐州 및 그 부근의 적진 속에서 자진하여 탈출해 온 학병들로서, 모두 전문대학專門大學 정도 학력 소유자들이고, 평균연령은 25세 가량이다. 신체는 모두 매우 건강하고 정신력이 넘치는 한국의 우수한 지식 분자들이다.

임정에 안착한 청년들은 모두 ‘전문대학’에 다니던 ‘학병’들이었다. 여기서 ‘전문대학’은 전문학교를 포함한 대학교 정도의 학력을 의미했다.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 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일본 내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 일본인 대학생들의 경우는 전시 징병제에도 불구하고 징집이 유예되는 혜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전쟁은 점차 이들 지식인 계층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일본군에 끌려 간 대학생들

일제는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인 대학생들에게 내려져있던 징집 유예 조치를 폐기했다. 이와 함께 한인 대학생들 역시 천황을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단, 당시 조선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는 부득이 ‘임시특별지원병제도’라는 허울 좋은 정책을 만들었다.

이른바 학도지원병제도였다. 공식적인 징집이 불가능했던 한인 대학생들을 “임시로 특별히 지원 신청을 받아” 군대에 갈수 있는 ‘혜택’을 주겠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지원’은 술책에 불과했다. 일제가 생산한 통계에 따르면 대상이 된 대학생 중 대다수가 일본군에 동원되었다. 일제가 인정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강제적 지원’을 피해갈 도리는 사실상 없었다. 지원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지원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어차피 ‘응징사應徵士’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 될 운명이었다.
학도지원병제도의 시행은 1943년 10월 결정되었다. 이후 기만적인 지원 절차를 통과한 학병들은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 부대에 입대했다. 학병들은 훗날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1·20학병동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일제는 입대하는 학병들을 위해서 성대한 장행회壯行會를 열었다. 이른바 “장한 행보를 축하하는 행사”라는 뜻으로 학병 동원을 포장하려는 식민 정책의일환이었다.
일본군에 동원된 대학생, 학병들은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해 저항을 시도했다. 예컨대 평양의 일본군 부대에 입대했던 학병들 중 일부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획한 바 있다. 이 사건은 훗날 ‘평양학병의거’로 널리 알려졌다.
대다수의 학병들은 강제 동원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했다. 특히 전선 부대로 배치된 이후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일본군을 탈출한 뒤 광복군 등에 합류할 계획을 세운 경우가 많았다. 사학자이자 교육자로 명망이 높았던 김준엽 선생이 대표적이다.

©한국연구원

신문에 보도된 학병 장행회 모습(『매일신보』 1944.1.19.)

사선을 넘어 조국 독립의 길로

김준엽 선생은 이미 일본군 입대 전부터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일본군 전선부대에 배치되면 기회를 틈타 광복군에 투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1944년 2월 25일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 근방의 다슈자大許家라는 곳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날부터 호시탐탐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고 한다.
그러던 3월 29일, 부대가 행군 훈련을 실시하기로 한 새벽, 담당 교관과 내무반장에게 복통을 호소하며 주의를 흐트러뜨린 다음 깊은 밤을 달려 탈출을 감행했다. 꾀병을 부려 행군 전날 훈련을 열외하고 휴식을 취해 체력을 비축할 요량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대 경계를 넘게 된 선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끝없이 달렸다. 언제 어디에서 총탄이 날아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부대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이역만리에서 방향을 잃거나 길을 잘못 들게 되면 수색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이미 온 몸이 땀으로 젖고 군화는 질척거려 발바닥 곳곳이 문드러지듯 찢겼을 터였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동이 트고 한참을 더 달린 뒤에야 선생은 일본군의 추격에서 멀어졌음을 깨달았다.

김준엽 선생이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린 것은 탈출 직전에 발휘한기지機智 덕분이었다. 훗날 발굴된 선생의 일본군 명부에는 선생을 뒤쫓았던 수색대의 추격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명부에 일본군의 수색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수색 방향이 유독 부대 주둔지에서 왼편에 위치한 쉬저우 방면에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이 탈출하기 직전, 배탈 때문에 부대원들과 함께 행군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해서 홀로 쉬저우 방향으로 행군을 하겠다는 편지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수색대는 김준엽 선생의 편지 내용을 믿을 수도 아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은 편지 내용과는 달리 오른편으로 달렸다. 만일 수색대가 선생이 달려 간 오른편에 수색을 집중했다면 탈출 성공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잊혀진 학병과 항일독립운동

김준엽 선생은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린취안臨泉의 황포군관학교와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쉬저우 일대에 주둔했던 여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동지들과 함께였다. 한광반 학병들은 모두 일본군의 총구를 구사일생으로 벗어나 항일독립운동의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처 일본군 부대를 벗어나지 못한 학병들이 있었다.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사선을 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일본군 명부에 ‘도망’이라고 기재되었으나 광복군 명단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경로를 통해 항일독립운동에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험난한 중국 대륙의 한 켠에서 이름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학병들의 항일독립운동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탈출에 성공하고 한광반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충칭에 합류한 날의 영광은 역시 살아남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탈출의 한 가닥 희망도 살리지 못하고 쓰러진 수많은 학병들은 기록에도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국가기록원

김준엽 선생의 병적전시명부. 네모 표시된 부분에 “대허가에서 도망하여 생사 불명이 됨” 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일본군의 김준엽 선생 수색요도. 김준엽 선생이 탈출한 방향과 반대인 왼편으로 수색이 강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신문』 제6호에는 학병으로 동원되었다가 탈출한 이종무李鐘鵡의 수기가 수록되었다. 그는 학도지원병제도를 “한국의 지식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끌어가기 위한 제도라고 평했다. 그리고 학병들은 일제의 패망을 직감했으며 전쟁터의 제물로 희생될 참담한 앞날을 생각하고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이 때문에 학병들은 기회만 있으면 ‘왜놈’의 쇠사슬에서 도망쳐 독립운동에 투신할 상태였다고 한다. 요컨대 학병들의 탈출은 그 자체로 일제에 대항해 조국의 독립을 지향하려는 의지의 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1월 충칭에 도착해서 느꼈던 ‘흥분과 격동의 감정’은 ‘죽음의 전장’을 뛰어 넘어 드디어 조국 독립의 현장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기쁨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탈출 중에 쓰러진 동지들에 대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