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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백범일지』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이승만과 옥중 도서, 이상룡과 살부회

특집

『백범일지』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이승만과 옥중 도서, 이상룡과 살부회

— 글.도진순(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미국 콜롬비아대학

그림 1~2. 1929년 등사본 표지의 제호(좌)와 1947년 국사원본 표지의 제호(우)

『백범일지』에 대한 기초적 이해

『백범일지』는 가히 ‘국민 도서’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책이지만, 아직까지 기초적인 사실에도 여러 가지 곡해가 남아 있다. 먼저, ‘일지逸志’ 는 매일매일 기록하는 일기日記가 아니다. 상권은 1928~29년(만52~53세), 하권은 1941~42년(만65~66세) 경에 집중적으로 집필된 ‘회고록’이다. 따라서 수십 년이 지난 사실을 기록한 것도 있어 사실 관계의 착오가 적지 않게 있을 수 있다.
다음, ‘일지逸志’를 사전적 의미인 ‘세속을 초월한 숭고한 뜻’ 으로 해석하여 백범은 과연 그러하다고 찬양하기도 하고, 거꾸로 ‘범인의 자서전’을 자처한 취지와 어긋난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백범일지』의 ‘일지’는 ‘숭고한 뜻’과는 관계없다. ‘일지’ 의 지志는 ‘뜻’이 아니라 ‘기록한다’는 지誌와 같은 것으로, 삼국지三國志 가 ‘삼국의 뜻[志]’이 아니라 ‘삼국에 대한 기록[誌]’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백범일지’라는 서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9년 7월 친필 원본을 등사하여 미국에 보낸 〈등사본〉의 표지인데, 여기에는 서명이 ‘白凡逸誌’로 되어 있다. 1947년 『백범일지』를 국사원에서 출간될 때 김구 친필의 ‘白凡逸志’로 바뀌었다[그림 1~2]. 요컨대 ‘志’는 ‘誌’와 같은 것이다.
‘逸’은 앞서 언급한 ‘뛰어나다’는 의미도 있지만, ‘숨은’ ‘알려지지 않은’이란 의미로도 흔히 사용된다. 예컨대 ‘일화逸話’는 ‘뛰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말한다. 이 ‘일화逸話’를 기록한 것이 바로 ‘일지逸志’이다. 실제로 『백범일지』에는 다른 자료에서 잘 나오지 않는 백범의 여러 일화들이 흥미진진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기’가 아닌 회고록인 ‘일지’ 에는 백범이 어린 두 아들에게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도 많고, 착오도 적지 않다. 따라서 『백범일지』와 같은 중요한 회고록일수록, 또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수록 세심한 ‘조직검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 각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뜻밖의 실수가 반복되거나 널리 유포될 수 있다. 여기서는 백범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수였던 이승만과 이상룡과 관련되는 구절들을 대표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백범일지』 상권: 옥중 도서를 통한 이승만과의 만남

『백범일지』 상권은 백범이 황해도의 궁벽한 시골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영수로 비약하는, 평범에서 비범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상권의 마지막 부분에 서대문감옥과 이승만에 대한 별도의 쪽지글[그림 3]을 특별히 삽입하였다.

©김구재단

그림 3. 백범일지
상권:이승만 관련 추가된 쪽지글.

① 서대문감옥에는 역대적歷代的 진귀한 보물이 있으니,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동지들과 같이 투옥되었을때,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 6년간 긴 세월 투옥된 죄수들에게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키는 방도를 강연하였던 그것이다. ② 노역을 쉬는 날 서적고書籍庫에 쌓인 각종 책자를 각 방에 들여보내 주는데, 그중에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 흔적으로 얼룩진, 감옥서監獄署라는 도장이 찍힌 『광학유편廣學類編』, 『태서신사泰西新史』 등의 서적을 보았다. ③ 나는 그러한 책자를 볼 때 그 내용보다는 배알치 못한 이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일었다.[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254쪽; 『백범일지』 (친필원본), 집문당, 1994, 157쪽. 번호는 필자]

이 흥미로운 쪽지글에 대해서는 세심한 독서가 필요하다. ①을 보면 이승만이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것처럼 서술되어 있고, 이것을 근거로 이승만과 김구의 ‘역사적’ ‘첫’ ‘정서적’ ‘대면’이 서대문감옥에서 책을 통해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투옥되어 무기징역형으로 5년 7개월 간 수감생활 이후,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이승만은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독립정신』을 서술하였으니, 수감생활은 이승만의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서대문감옥은 이승만 석방 4년 2개월 이후인 1908년 10월 문을 열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여기에 수감될 수는 없다. 서대문감옥이 건설되던 1907년,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그림 4. 1903~04년 한성감옥 옥중도서관의 도서대출 장부. 푸른색 표시는 이상재가 빌린 도서(태서신사 등). 붉은색 표시는 이승만이 빌린 도서(천로역정 등).

이승만이 투옥되어 도서실을 연 곳은 ‘서대문감옥’이 아니라 ‘한성감옥’이다. 한성감옥은 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의 후신으로 이승만이 투옥되던 1899년에는 서소문 안에 있었지만, 1902년 4월 종로의 원위치로 돌아와 ‘종로감옥’으로도 불리었다. 신기하게도 1903~04년 한성감옥에서 이승만과 이상재 등이 도서를 대출한 기록이 남아 있다[그림 4]. 현재 종로구 서린동 한성감옥터 표지석 옆에는 전봉준 동상과 영풍문고가 있어, 감옥과 도서圖書의 흥미로운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서대문감옥 개관 이후 ‘한성감옥’은 서대문감옥 ‘종로구치감’이 되었고, 한성감옥에 소장했던 책들은 서대문감옥으로 이관되었다. 백범은 1911년 1월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7월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판결을 받았고, 이후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죄수번호 56호). 이승만 석방 7년 이후이다. 이 서대문감옥에서 백범이,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보았던 책을 보았던것이다(②).
이승만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1920년 12월 5일 미국에서 상하이에 밀입국, 12월 13일 경무국장 김구와 첫 대면하였다. 백범이 서대문감옥에서 투옥된 지 9년 4개월 이후이다. 1921년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이후 상하이에서는 국민대표회가 개최되어 임정은 일대 혼란에 빠졌고,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난 이후에도,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될 때에도 경무국장 김구는 줄곧 이승만을 절대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③을 보면 1928~29년 상권 집필 당시, 즉 백범이 임시정부의 영수(국무령)가 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이승만을 극히 존숭했음을 알 수 있다.

『백범일지』 하권: 석주 이상룡과 살부회

『백범일지』 상권과 비교하여 하권 집필 당시의 사정은 상당히 변하였다. 임정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주석인 백범도 매우 분주하였다. 하권은 백범이 매우 분망한 와중이라 분량도 상권의 1/3 정도이다. 상권이 주로 백범 개인의 성장과정과 다양한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면, 하권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저변의 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상권에 이승만 초대 임정 대통령과 관련되는 극히 호의적인 일화가 쪽지글로 삽입되어 있다면, 하권에는 반공의 입장에서 임정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일가에 매우 비판적인 일화가 본문 중에 기록되어 있다.

©김구재단

그림 5. 백범일지 하권: 이상룡과 ‘살부회’에 대한 본문 기록.

공산당들은 상하이 민족운동가들이 자기의 수단에 농락되지 않음을 깨닫고 남북 만주로 진출해서, 상하이에서보다 십 백 배 더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이상룡李尙[相]龍의 자손은 살부회殺父會까지 조직하였다. 살부회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회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아비를 죽이고 나는 네 아비를 죽이는 것이 규칙이라 하였다.(『백범일지』, 돌베개, 314쪽; 『백범일지』 (친필원본) , 185쪽)[그림 5]

이상룡 가문은 그의 부인 김우락金宇洛, 아들 이준형李濬衡, 손자 이병화李秉華, 손부 허은許銀 등 3대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명문이며, 경북 안동의 종택 임청각臨淸閣도 저명하다.
이상룡은 1911년 아들 이준형과 함께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상하이에서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곧 사퇴하였고, 1925년 9월 이상룡이 임정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이상룡이 국무령으로부임하고 난 이후에도 임정에서 격심한 갈등이 계속되어 내각조차 조직하지 못하자, 1926년 1월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1932년 이상룡이 서거하자 아들 이준형은 망자의 혼을 집으로 모시는 반혼제返魂祭를 드리기 위해 임청각으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42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이 요원함을 비관하며 선친의 『석주유고』를 정리한 후, 9월 2일 생일날 선친의 묘소를 잘 봉영하라는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만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아들 이병화가 귀국하였고, 이후 이병화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되어 안동형무소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즉 이상룡의 자손인 이준형과 이병화 모두 ‘살부회’와의 관련은 찾을 수 없다.
이병화는 해방 이후 출간된 『백범일지』(국사원, 1947, 286쪽)에서 ‘살부회’와 관련 기록을 보고,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을 찾아가서 송사訟事까지 하겠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이시영은 1911년 이상룡과 같이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고, 이후 임정에서 활동하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와 같이 귀국하였으니, 적절한 중재자라 할 수 있다. 이병화의 항의에, 이시영은 당시 중차대한 “새 나라 건설의 복잡한” 문제가 일단락되고 난 이후 살부회 건을 해결하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암살되어 이 일은 무산되었다. 석주 이상룡의 손부 허은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정우사, 1995, 139~141쪽)에서 남편 이병화가 좌익 활동으로 집나간 일은 많아도, “전통 유가의 유일한 종손”으로 “부조父祖에 대한 효성심 만은세상의 누구 못지않음을 내가 가장 잘 알지”라면서, 『백범일지』의 살부회 기록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는 한”이 되어 있다고 토로하였다.
필자가 과문해서인지 모르지만, 이제까지 어떠한 자료에서도 ‘살부회’와 관련되는 내용을 접한 적이 없으며, 이상룡 자손들과의 연관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살부회’는 2015년 ‘살부계’로 다시 등장하였다. 1,200만 이상이 관람한 인기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에서 ‘하와이피스톨(하정우 역)’은 과거 ‘살부계殺父契’에 소속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백범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이시영의 중재로 살부회 관련 서술은 『백범일지』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인가? ‘칼보다 강한 펜’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