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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임시정부 국무령의 가족이 되다

특집

임시정부 국무령의 가족이 되다

— 글. 한준호(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초대 국무령 이상룡의 고향 임청각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우리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새 나라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정부로서 조직을 유지·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표 지도기관으로서 조국 광복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다양한 지도체제를 선택하였다.
수립 당시에는 대통령이 없고 국무총리가 가장 높은 직책이었으나, 1919년 9월 통합정부를 이루어내면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 내각 책임제로 변화하여 국무령제를 택하였다가, 1927년에는 다시 국무위원제라는 집단 지도체제를 선택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 자리를 잡으면서 주석제로, 1944년에는 주석·부주석제로 변화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여기에서 1925년 등장하는 ‘국무령國務領’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당시 독립신문에 ‘나라의 종’ 또는 나라의 일을 맡는 최고 자리라는 뜻으로 국무령이 좋을 것이라는 보도기사도 있었다. 이때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했던 인물이 바로 이상룡이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은 경북 안동시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법흥法興마을 출신이다. 고성이씨가 500년 동안 삶을 이어 오면서 안동에서 명문가로 성장하였는데, 특히 이상룡이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에서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자와 ‘청’자를 취하여 당호堂號를 지었다. 또 정자 군자정君子亭은 목조 건물로는 드물게 임진왜란을 겪었다. 현재 이 마을의 나라사랑 정신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임청각 역사문화공유관 건립 및 정비사업이 2025년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독립기념관

법흥마을 전경

석주 이상룡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 광복을 이끌다

그러면 왜 임청각 복원사업과 역사문화공유관 건립이 추진되었을까? 먼저 나라가 무너지고 겨레가 노예로 전락한 상황에서 시대적 책임과 그 의무를 다하려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그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간 마을 사람들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이상룡이라는 것이다. 이상룡은 당시 대부분의 유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만들어 백성을 시민으로 변화시키는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나라가 무너지자, 1911년 초 안동 내앞마을의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과 함께 청장년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 등 서간도 독립군 최고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 소과전자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 되니, 이곳에 묻어 두고 기다리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이상룡의 삶과 독립의지는 가족·친척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동생 이상동李相東·이봉희李鳳羲, 아들 이준형李濬衡, 손자 이병화李炳華, 조카 이형국李衡國· 이운형李運衡·이광민李光民, 당숙 이승화李承和 등이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또한 종부 김우락金宇洛(이상룡의 아내)·이중숙李中淑(이준형의 아내)·허은許銀(이병화의 아내) 등의 여성들도 그 길을 뒤따랐다. 이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이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 책은 손자며느리 허은許銀(1907~1997)의 구술 회고록이다. 제1장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다, 제2장 항일투쟁과 이민생활, 제3장 환국과 해방 그리고…, 회고의말·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왕산旺山 허위許蔿 집안의 의병항쟁과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재종조부 허위의 순국 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망명하는 과정을 담았다. 눈에 띄는 것은 신의주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간도로 망명하였다는 점이다. 1911년 안동의 이상룡·김대락 등이 중국 단동에서 육로를 이용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후 그들이 정착하는 험난한 모습을 그렸으며,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와 한인 자치단체 부민단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2장의 주요 내용은 결혼과 시집살이, 그리고 시할아버지 이상룡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과 순국이다. 먼저 시집가는 모습이 나온다. 허은은 하얼빈·장춘을 거쳐 시댁인 길림성 화전까지 2천 8백 리 길을 이동하였다. 그때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중략) 이천팔백 리 먼 길은 내 시집가는 길이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되었겠는가?

즉 조국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시댁에 도착한 허은이 이상룡·이준형·이병화 등 시댁 가족은 물론 만주지역 항일투사들의 그림자가 되어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는 모습을 그렸다. 서로군정서 회의와 같은 각종 회의가 시집에서 열리다 보니 대접할 끼니를 마련하는 일, 감기가 들었는데도 쉴 수가 없어 부뚜막에 쓰러진 일, 그녀의 손으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과 같은 독립운동가에게 옷을 만들어 드렸던 일, 허은은 이 모든 것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 여겼다.
그리고 1925년 9월 시할아버지 이상룡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났다가, 이듬해 돌아온 후 1932년 5월 12일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허은은 이상룡의 국무령 사임에 대해 만주권 인사들과 다른 계파 사이의 의견 충돌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편 동지 여준·이장녕이 총살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이상룡이 상심 끝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까지 있다. 동생 이상동 등 가족들이 귀국을 권했지만, 이상룡은 동지들을 버려두고 혼자 고국 땅을 밟을 수 없다고 한 일, 또 이상룡이 임종할 때 대성통곡하는 이진산 어른을 보면서, 그녀는 애국심 하나만 가지고 망명의 길로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시할아버지의 한을 대신해 울어 드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도 기억하였다. 그 가운데 임시정부 국무령과 관련한 회상은 다음과 같다.

을축년(1925년) 여름 칠월 석주 어른께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중략) 취임식이 구월 며칠인지는 몰라도 상해로 떠나시기는 구월 구일에 떠나셨다. (중략) 상해에서도 만주권 독립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석주 어른은 그 이듬해 음력 삼월에 국무령을 사임하고 나오셨다.

손부 허은과 구술 회고록 표지

©독립기념관

「국무령 선거」, 『독립신문』, 1925년 10월 21일자.

제3장은 남겨진 가족들이 고향 안동 임청각으로 돌아가는 모습부터 시작된다. 5월 18일 유해를 모신 관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중국 퇴병退兵의 횡포로 이상룡의 유해는 끝내 모셔올 수 없었다. 허은은 시아버지 이준형이 시할아버지의 글 『석주유고石洲遺稿』 원고를 가슴에 품고 가져온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회고하였다. 그 뒤로는 그녀가 남겨진 가족들을 보살피며 임청각의 종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할머니 김우락의 죽음과 시아버지의 자결, 그리고 시어머니 이중숙이 중풍으로, 남편 이병화가 한국전쟁의 피난살이 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 등이다. 허은은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견뎌냈다. 이 외에도 해방 후 들은 만주 소식이 담겨 있는데, 이육사李陸史의 순국과 남겨진 집안 분들, 그리고 허위 후손 등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구술을 마치면서 끝에 허은은 “좋은 세상 만나 이제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상룡과 그 가족들의 삶은 ‘역사 앞에 떳떳한 인간의 참다운 의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더 바른길을 고민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굳센 의지와 희망으로 나아갔던 이들의 발자취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사적에서 만나는 안동독립운동』(강윤정, 2013)과 『조국광복을 이끈 안동 법흥마을사람들』(안동청년유도회, 2015), 그리고 『만주로 간 경북 여성들』(강윤정, 2018)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