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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자료

여성 독립운동가, 이은숙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속 항일독립운동과 글쓰기의 가치

임시정부의 자료

여성 독립운동가, 이은숙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속 항일독립운동과 글쓰기의 가치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여성 독립운동가가 바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이회영 선생(1867~1932)의 부인인 이은숙 선생(1889~1979)이다.

— 글. 김귀옥(한성대학교 소양·핵심교양학부 교수)

정정화 『녹두꽃』

2000년대 들어, 한국 학계에서나 사회적으로 여성주의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혀 있다. 2019년 3 ·1운동 100주년 기념 당시에도 여성 항일독립운동가가 주목을 받아, 추모사업, 영화, 연극, 강연, 토론회 등의 문화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꾸준히 발굴되었고, 종래 여성 독립운동가 200여 명에서 3 ·1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전후하여 600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래도 전체 독립운동가 1만 7천여 명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3%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여성 독립운동가가 바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이회영 선생(1867~1932)의 부인인 이은숙 선생(1889~1979)이다.
2014년, 글쓴이는 이은숙의 회고록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시종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지점들에 시선을 두었다.
첫째, 회고록이 완성되었던 1966년1 이나 출간되었던 1975년만 해도 한국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는 말할 것도 없고, 남성 독립운동가의 회고록도 몇 편 되지 않았다. 여성 독립유공자인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이 발간되었던 것은 1987년 민주화운동이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던 시기였다.2 1960년대에는 여성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은커녕 ‘여성적 글쓰기’3 에 대한 고민조차 없었다. 21세기 관점에서 봐도 이은숙의 『서간도시종기』는 남성적 독립운동사와는 전혀 다른결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1990년대부터 차츰 자리잡혀 나갔던 여성적 글쓰기는 주로 유럽이나 미국으로부터 여성학 이론과 여성적 글쓰기가 도입되면서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성차별을 둘러싼 두터운 구조적, 문화적 모순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주의에 대한 성찰을 여성적 글쓰기에 담아내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은숙의 회고록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이은숙 회고록은 남편인 이회영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헌신을 곳곳에 담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일체화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 모습이 가부장주의의 신봉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은숙의 글에서 여성으로서 순종적이거나 남존여비적인 태도는 거의 읽히지 않는다. 최고 명문가 출신임에도 감리교파인 상동교회에서 재혼남 이회영과 신식 결혼을 할 만큼 개방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회고록의

©이회영기념관

이은숙 『서간도시종기』 육필원고

1. 이은숙이 회고록 집필을 마친 것은 1966년 3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 집필 후 우여곡절을 겪어 1975년 1월 말 초판이 나오기까지 거의 9년이 걸렸다. 또한 2017년 일조각에서 『서간도시종기』를 다시 펴냈는데, 각주가 많이 달려 대중적으로 읽기가 수월해졌다.

2. 글쓴이는 이은숙 선생과 정정화 선생의 기록을 중심으로 연구하여 2014년 한국이민학회에서 발표했고(11월 28일), 이를 다시 정리하여 2015년 “식민적 디아스포라와 저항하는 여성-이은숙과 정정화를 중심으로”(『통일인문학』 62호, 2015)를 발표했다.

3. ‘여성적 글쓰기’란, 생물학적 여성이 글 쓰는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남성 혹은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억압된 여성성 혹은 여성의 자기 긍정성을 드러내고, 남성 중심적 논리와 세계를 해체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한국에 도입된 것이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였다. 한국여성연구소가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앤 로잘리드 존스의 “몸으로 글쓰기: 여성적 글쓰기의 이해를 위하여”(1990)를 번역한 바 있다.

©이회영기념관

원고지와 펜을 들고 앉아 있는 이은숙 선생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1975)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몇 부분 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지사 중 지사로 꼽히는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김창숙 앞에서 이은숙이 칼을 꺼내든 장면이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밀정으로 알려진 김달하 조문 사건으로 이회영이 동지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던 복잡한 상황에서 분노한 이은숙이 죽기 살기로 이회영의 명예를 지키려 했다. 그 사건에서 남편을 신봉하는 가부장주의적 태도와 함께 남성 중심적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이중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중층적·맥락적으로 사고할 때만이 한 사람의 진정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 같다.
셋째, 최근에야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의 한국인은 ‘난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한 사람들은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의 의미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항일운동을 지역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부로 중국 상하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반면 북한에서는 항일운동의 주 무대로 만주 지역을 언급해왔다. 그런데 요즘엔 아마도 영화 『암살』 덕분에 만주 지역이 새롭게 관심을 끌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중에 이은숙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신흥무관학교가 소재한 만주 지역(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은 외벽 진 곳이지만 난민의 각도에서 보면 전혀 다른 문제가 보인다.
이은숙의 회고록을 읽기 전에는 그러한 외벽 진 곳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고, 독립운동가들이 집결된다는 사실을 그곳 지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또는 조선인들을 어떻게 취급했을지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은숙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추가鄒家네 어른인 순경 라오예가 유하현에 고발하기를, “이왕에는 조선인이 왔어도 남부여대로 산전박토나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하며 근근이 부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오는 조선인은 살림차가 수십 대씩 짐차로 군기軍器를 얼마씩 실어오니, 필경 일본과 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려고 온 게 분명하니, 빨리 꺼우리高麗人를 몰아내 주시오.”(이은숙, 73쪽).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지역민의 고발로 인해 중국 군인과 순경 삼백 명이 와서 이들의 신분을 조사했다고 한다. 서간도 또는 간도가 빈 땅도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국가를 잃은 난민으로서 중국에 체류한다는 것, 특히 독립운동의 터전을 삼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왜 중국 국민당 정부를 쫓아서 계속 이주를 하였는가를 한국 사람들은 제대로 모르고 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만이 아니라, 상하이가 일제에 점령된 후, 1938년 후난성의 창사를 거쳐 광둥성의 광저우, 여러 곳을 경유하여 1940년에야 충칭에 터를 잡게 되는 경위를 두고 정정화 선생은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신세(정정화, 158)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회영 선생과 그 가족들 역시 중국이나 한반도를 떠돌 수밖에 없던 난민이었다.
넷째, 이회영 선생 집안은 이항복의 후손으로서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뽑힌다.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되자, 명문가 집안에서는 드물게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 가족 60명과 함께 만주로 건너간 것은 한국에서 전설처럼 얘기되고 있다. 이회영 형제들이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 방매하여 모은 돈 40만 여 원은 현 시세로 환산하면 1천억(한홍구 등은 현시세로 볼 때, 수천억 원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이 넘는 엄청난 자금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경유한 교사와 학생이 3천여 명이 된다고 한다. 대부분 돈벌이는 없고, 조국 광복을 찾는다는 일념으로 항일을 위한연마와 투쟁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큰돈일지라도 10년도 못가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 집안 자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굶거나 아파서 죽었다고 알려져있다. 심지어 둘째 형인 이석영 선생이 “중국인 공동묘지에 갖다 버리듯이 묻혀” 이은숙은 원통함을 금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이은숙의 자식인 이현숙이나 이규오도 그러한 상황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잃고 말았다.
그때 이은숙은 명문가 자제이자 대갓집 며느리라고 안방 차지만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족 부양과 함께 이회영과 동지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1925년에 만삭의 몸으로 홀로 서울로 왔다. 이은숙은 막내아들 규동 씨를 홀로 낳아 힘들게 길렀고, 규동은 한동안 민적民籍에도 누락되기도 했다. 친척 집의 대소사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삯바느질 일하여 베이징과 텐진에 생활비나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친척으로부터 받은 남편의 독립운동 자금, 금화 백 원이 문제 되어 이은숙은 동대문서로 끌려가 취조를 당하면서도 지혜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회고록에서 이은숙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기도 한 보랏빛 머릿수건의 어머니 효시를 보인다. 아들 이규창(1913~2005)은 부친 이회영의 영향으로 일찍이 항일운동에 눈을 떠 흑색공포단 활동을 했다. 그는 이회영 체포에 협력했던 독립운동의 배신자들이자 일제의 밀정들을 처단하는 과정에 1935년 일경에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되어 11년간 옥고를 치르고 해방되어 석방되었다. 이은숙은 감금된 아들을 위해 눈물겨운 옥바라지를 했다.
이은숙은 회고록을 맺으며, 가족의 안녕, 만수무강과 함께 조국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축원하고 있다. 당시 자신의 80 가까운 인생을 회고할 때 개인의 안녕과 집단의 안녕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일제 강점기를 돌아볼 때, 가부장주의나 보수주의적 여성, 특히 엘리트 출신의 여성 중에서 이렇게 산 여성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늦었지만, 독립운동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 남자현이나 안경신, 김정숙, 김효숙, 민영주, 신순호, 오항선, 윤희순 선생처럼 무력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많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신여성으로서 근우회 등과 같은 여성단체 활동을 했으나 태평양전쟁기, 여성이나 민중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친일 협력을 했던 적지 않은 한 때는 진보주의적 여성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이은숙 선생처럼 남편 이회영과 그 동지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여성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은숙 선생처럼 회고록을 남김으로써 자기 인정을 받게 된 사람은 드물다. 1961년, 55세 이상의 여성 중 80% 내외의 문맹률(『조선일보』 1961.03.12, 7면)을 생각하면 여성 중에 회고록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전후 여성적 글쓰기가 시선을 끌면서 구술사(Oral history) 방법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성과 중 하나가 허은 구술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민족문제연구소, 2010)를 들 수 있다.
이제 독립운동사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가 새롭게 집필되어야 한다. 남성의 역사로서의 히스토리(His-story)가 아닌, 모두의 역사(All-story)가 되기 위해서는 부재되어 온 허스토리(Her-story)가 밝혀져야 한다. 이은숙은 허스토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barometer)로서 역할하고 있다. 때마침 올 8월, 이은숙 선생이 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참 반가운 소식이다.

〈참고문헌〉
김귀옥, 「식민적 디아스포라와 저항하는 여성 - 이은숙과 정정화를 중심으로」, 『통일인문학』 62호, 2015, 79-112쪽.김귀옥, 『구술사연구 : 방법과 실천』, 한울, 2014.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 시종기 -』, 정음사, 1979(1975).
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인물연구소, 2017.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허은 구술·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민족문제연구소, 2010.
Jones, Ann Rosalind·김효 옮김, 「몸으로 글쓰기 : 여성적 글쓰기의 이해를 위하여」, 『세계문학비교연구』 제1호, 1990, 171-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