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광복군의 기억: 나는 이렇게 광복군이 되었다
— 글. 손염홍(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수도였던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 관련 연구에서 활용되고 있는 자료 중의 하나는 바로 수기·자서전·회고록 등 회고 기록이다. 광복군 출신 인사가 남긴 회고 기록은 광복군 창설 과정부터 참여하거나 간부급으로 합류한 인사,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 출신자, 포로수용소 출신자, 그리고 여성 대원의 기억 등 종류가 다양하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간부로서 참모장 및 2지대장을 역임한 이범석, 3지대장 김학규의 기억은 비교적 상세하다. 이범석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권유로 1915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신규식의 주선으로 군벌 탕지야오唐繼堯가 설립한 윈난강무당에 입학하여 독립군 장교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 3 ·1운동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사단연성소 교수부장 등을 지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제2대대 지휘관, 1923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으로 활약했다. 만주사변 이후 관내로 이동하여 김구가 주도하는 낙양군관학교의 군관대장을 지냈다.
©독립기념관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1940년 중국군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맡고 있을 때 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범석은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참모장 자리를 내놓고 자원하여 제2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서 이범석은 최정예군을 만들기 위해 교육 훈련에 힘쓰는 한편,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할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을 추진하였다.
해방 이후 이범석은 그의 광복군 활동에 관한 기억을 『신동아』(15권 56호, 1969)에 실었다.
그의 회고에 본인의 중국 군대 경력, 낙양군관학교 및 광복군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본인 및 제2지대의 활약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보이고 오류도 없지 않지만, 광복군에서 이범석 및 제2지대의 역할이 가장 컸던 점을 감안하면 이범석의 회고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
김학규는 무장항쟁 노선을 견지한 독립운동가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 만주와 관내 지역을 오가며 조선혁명당을 대표하여 한국독립당 대표와 협의, 당 통합을 추진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참모로 취임하였다.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전선에 비교적 근접한 시안西安으로 옮겼는데 이때 참모장 대리로 임명되어 적 후방 공작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취임한 뒤, 항일 최전선인 안후이성安徽省의 푸양阜陽에 광복군 징모 제6분처를 두고 일본군 탈출 학병과 지원병을 포섭·훈련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김학규는 자신의 이러한 항일투쟁의 경험을 『백파 자서전』을 통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자서전에는 광복군 초기 지대편성 및 지대장에 대한 기억에 혼돈이 있다. 하지만 5년 동안 제3지대의 본부인 푸양에서의 초모, 훈련 활동 및 미국 O.S.S.와의 연합 훈련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여 광복군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임은 틀림없다.
일제 말기 국내와 일본에서 재학하고 있던 전문학교와 대학의 많은 한국 청년들이 학병이란 이름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내몰렸다. 이들 중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소식을 듣고는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한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경우가 있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장준하의 『돌베개』와 김준엽의 『장정』이 그것이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대학 재학 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모병되어 중국 쉬저우徐州전선에 배속되었다. 거기서 3월 29일 김준엽이, 7월 7일 장준하가 각각 탈출했다. 그리고 탈출 후 중국 국민정부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곧이어 김학규가 이끌고 있던 광복군 징모 제6분처가 있는 안후이성 린취안臨泉에 도착하였다. 당시 징모 제6분처는 일본군 점령지역 안에 들어가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곳의 한국광복군 훈련반(한광반)에 입소하여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잡지 『등불』을 발행했다. 그리고 장준하·김준엽 등 일행 60여 명은 6천 리 길을 걸어서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들은 임정 건물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감격에 휩싸였지만, 임정에 도착한 장준하는 곧 실망했다. 나이 든 정치인들이 서로 당을 나누어 파벌 다툼을 하고 있었던 현실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이어 그는 임정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며 임정 요인들의 분열상을 규탄했다. 장준하가 스스로 충칭 교포들의 회의에서 “임시정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라고 한 폭언을 회고했다. 그만큼 임시정부를 사랑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준하와 달리 김준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임정 옹호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준엽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병 출신 광복군들에게 임정이란 실질적 내용이나 영향력보다는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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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O.S.S. 특수 훈련 당시
임시정부와의 갈등은 장준하·김준엽 등의 학병 출신 중심인물이 시안으로 떠나면서 종식되었다. 이들은 이범석의 제안으로 시안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된 것이다. 김준엽은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어 광복군에서 활약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미국 첩보국(O.S.S.)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훈련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그들의 회고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을 찾아간 경우는 김문택이 유일하다. 김문택은 학병에 징집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큐우슈우九州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4년 9월 그는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를 지나 만주를 거쳐 중국 내륙으로 갔다. 중국으로 가고자 한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1945년 1월 일본군을 탈출한지 106일 만에 온갖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푸양에 도착하였다.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며칠 만에 광복군을 찾아가는 경우와는 비교가 안 된다. 거리상으로 2만여 리가 넘는 역정으로 탈출 경로와 고난의 정도가 남다르다.
그는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 입대했다. 장준하·김준엽 등 일행이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 떠난 뒤였다. 김문택은 남아 있는 학병들과 함께 제3지대에 잔류해 활동했다. 그가 맡았던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비밀 지하공작을 통해 초모해 온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훈련을 위한 교본을 직접 작성하여 마련하였다. 군대 훈련에서 ‘차렷’, ‘앞으로 가’ 등의 용어를 우리말로 만든 것도 그였다. 대원들이 증가하면서 징모 제6분처는 정식으로 제3지대로 편제되었다. 김문택은 지대 창설요원과 제1구대 제1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문택은 자신의 탈출기와 광복군 활동을 세세하게 수기 『광복군 김문택 수기』(상 탈출기·하 광복군)로 기록하였다. 그의 수기에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들이 많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비밀 지하공작을 위주로 하는 제3지대의 활동상 및 지대 편제 등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어, 광복군 제3지대의 역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광복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의 딸이며 창설될 당시 여성 광복군이 된 지복영은 그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을 통해 독립투사의 딸로 태어난 운명을 안고 ‘독립군’으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겪었던 역경과 삶을 기록했다. 지복영은 1924년 여름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오빠를 따라 아버지가 망명해 있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사변 후 1933년 지복영의 가족들은 낙양 군관학교 입학생들과 중국 관내로 이주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피난길에 동행하면서 항일 선전 연극, 벽보 부착, 전단 제작 등 한국광복군진선청년공작대 활동을 하였다. 청년공작대는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높이기 위해 거리 선전, 연예와 항일 연극, 대규모 공연, 합창 등 선전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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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영 등 여성 광복군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에 자원입대하여 오광선 등 여성 대원들과 함께 사령부의 선전조에서 선전활동과 비서 사무를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잡지 『광복』이 발간되어 적 후방에 있는 교포들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지복영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광복군 입대 당시 최전선에 지원하였다. 지복영은 평소 아버지인 지청천으로부터 “너는 대한의 잔다르크가 되어라.”라고 들어왔기에 최전선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 부딪치게 되자 지복영은 밤새도록 자신의 뜻을 편지로 써서 아버지에게 보냈다. 지청천 장군은 “좋다. 잘 생각했다. 내가 남의 자식도 보내는데 내 자식이라고 금지해서 못 보내겠느냐. 잘 생각했다.”고 답장했다. 아버지의 답장을 받고 지복영은 안후이성 푸양으로 떠나 김학규의 광복군 제3지대로 배속되었다. 지복영은 오광심·오희영 등과 함께 남자 광복군 대원들과 똑같은 임무를 받고 활동을 했다. 그들은 낮에는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고, 밤에는 광복군을 모았다고 한다.
지복영 선생의 회고를 통해 당시 함께 군 생활을 하던 여성대원들과 남성 대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동지로 생각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복영은 어떤 광복군 남성 대원이 자신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고백하자 “우리가 뭐 이런 시절에 그야말로 내일 죽느냐 모레 죽느냐도 모르는 판에 무슨 결혼이겠느냐. 다 같은 동지로서 손잡고서 조국 광복에나 그냥 힘쓰자.”고 거절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