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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주변인으로 살아남기 : 회고록에 담긴 미주지역 한인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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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으로 살아남기 : 회고록에 담긴 미주지역 한인들의 삶

— 글. 연효진(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연구교육과 학예연구원)

최봉윤 『Koreans in America』

1902년 노동 이민을 시작으로 한인들은 미국으로 향했다. 한인들은 미국에 도착하면 무료로 교육받고, 보다 나은 생활 여건에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이유로 미주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은 일찍부터 한인사회를 형성했다.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동지회 등 각종 단체들을 조직하며 결집했고, 독립의연금, 애국금, 국민부담금 등을 모금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미주지역 회고록은 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발간되었다. 회고록에는 그들이 미국에 가게 된 경위, 도미 과정, 정착 생활, 학업, 한인단체 및 사회와 관련한 일화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낯선 타지에서 주변인으로서 어떻게 살아남고자 했는지에 대한 고민도 묻어나며, 더불어 미주지역 한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재미한인들은 동양인 차별, 언어의 어려움, 경제 곤란 등 제한적인 현실 속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 헤맸다. 한인들은 정착한 지역에 직업소개소를 설치했다. 직업소개소는 지역 한인여관으로, 한인들이 도착하자마자 숙식을 해결함과 동시에 생계유지를 위한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한인들은 농장에서 과일을 수확하거나, 철도, 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리고 세탁소, 잡화점, 여관, 음식점 등 소규모 사업을 운영했다. 유학생들은 학교 재학 기록이 없다면 바로 귀국을 해야 한다는 이민국 법에 제약을 받았고,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했다. 방학 중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대도시로 이동했고, 평소엔 스쿨보이로 일했다. 스쿨보이는 미국 중류층 집에 들어가 숙식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려주고, 빨래, 설거지 등 온갖 잡일을 맡아하는 일이었다. 스쿨보이는 고된 일이었지만,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인들의 회고록에는 스쿨보이와 관련한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차의석은 안창호의 소개로 일을 얻었지만, 실수를 하고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집주인에게 “Yes, ma’m”이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가 난 집주인은 차의석을 해고했다. 차경신은 집주인 아이와 다투고 쫓겨나 다른 집에서 아이를 돌봤지만, 식사를 따로 주지 않고 아이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등 서러움을 당했다. 스쿨보이로 일했던 한인들은 요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요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 생소한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것에 서툴러 잘못된 요리법으로 요리하기도 했다. 최봉윤은 한국 여학생의 스쿨걸 경험담을 전했는데, 아보카도를 태어나서 처음 본 여학생이 샐러드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어찌할 줄 몰라 씨만 섞어서 요리로 내놓자 바로 해고당했다는 이야기다.
한인들은 스쿨보이 외에도 직접 사업을 운영하거나, 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일했다. 송철은 학비를 벌기 위해 과일 위탁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공부를 돈 없다고 중도에 끝내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어쩔 수 없었던 몸부림”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다니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을 운영했다.

차의석 『The Golden Mountain』

 

사업 경험이 쌓이면서 돈을 벌어 승용차를 구매해 방학마다 샌프란시스코부터 로스앤젤레스까지 편도 10시간 동안 운전하며 다녔다. 학업과 사업을 병행하며 먼 길을 다녔지만, 송철은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며 기뻐했다.
최봉윤은 돈이 없어 맨밥에 간장만으로 끼니를 때우다 미국인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에서 채소 씻는 일을 구했다. 채소를 씻으며 몸이 물에 흠뻑 젖어 돌아가는 길에 전차를 탈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두 시간 이상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최봉윤의 모습을 보고 놀란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고, 최봉윤은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한인들은 백인들이 하지 않는 고된 일을 맡아 했다. 한승인은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며 하루에 다섯 시간씩 노동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과, 국비유학생으로 뽑혀온 중국, 일본 유학생들이 좋은 여건 속에서 유학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비교하며 그들을 부러워했다. 한승인의 『미국 유학 시절의 회고』 제14장은 ‘유학생들의 고학체험기’로, 당시 유학생들이 스쿨보이, 포도 농장, 중국 차, 향을 파는 행상 등 일하면서 겪었던 곤란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재미한인들에게 차별은 일상이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여행 중에 호텔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지도, 이발소에서 이발할 수도 없었다. 차의석의 『The Golden Mountain』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청년이 현실에서 느꼈던 괴리감이 드러난다. 차의석에 따르면, 미국인은 동양인을 ‘Jap’ 또는 ‘Scaby’라고 불렀으며, 잡놈, 딱지,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같은 일을 하는 더러운 사람이라는 뜻의 ‘Scab’라는 인신공격성 모욕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동양인 정서로 인해 교회 창문에 돌이 날아왔고, 거리에서 폭도들의 위협을 받거나, 동양인과 서양인의 학교 분리 제안 등 모욕과 차별을 받았다.
차의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의무대로 지원하여 위생병으로 복무했다. 그는 미군복을 입고 장교들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 큰 영광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미군이 되어 미국인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는 큰 자부심을 갖게 했다. 하지만 그가 미군복을 입고 길을 지나갈 때 그를 본 미국인 소년이 같이 걷던 아버지에게 “중국인 군인을 봤어요?”라고 말하는 등 미국인의 눈에는 그가 그저 미군복을 입은 중국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하지만 1882년 제정된 중국인 배제법으로 인해 동양인은 해당되지 않았으며, 규정 또한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차의석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 중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법안이 의회에 통과되어 3번의 도전 끝에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한인들은 교회, 유학생회, 국민회, 동지회 등 한인 단체에서 정을 나누며 타국에서의 설움을 달랬다. 교회는 한인들의 구심점이자 친정과 같은 곳이었다. 주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난 뒤엔 함께 식사를 하거나, 종종 피크닉을 가서 한국 음식을 해 먹었다. 교회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고, 한승인은 태극기를 볼 때마다 “겉으로는 죽었지마는 속으로는 살아 있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한인들은 모임을 할 때마다 반드시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인들끼리 모임을 갖는 것은 힘든 생활 중 낙이었다. 김도연은 오하이오 대학 2,000명의 학생 중 한인들은 극소수였기에 자신의 하숙집에 한국인들끼리 모여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고, 미국 친구들 또한 초대하여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대학 생활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24년도 재정상황 보고(1942. 10. 25.)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7권, 내무부·교통부·재무부·문화부, 165-166쪽.)

©국사편찬위원회

재미 한인국방경비l대의 LA 시가행진(1942. 4. 26.)

한인들은 민족의식 고취와 2세들의 국어교육을 위해 국어학교를 설립했다. 한인 2세들은 미국 학교 진학 후 영어만을 사용하여 1세들과의 대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최봉윤은 국어학교에서 2세들에게 국어, 동요,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당시 한인들이 자녀들에게 조국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1세들과는 다른 2세들에게 놀라기도 했다. 휴식시간에 쉬고 있던 최봉윤에게 한 여학생이 영어로 왜 기운이 없냐고 묻자, 최봉윤은 피곤하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여학생은 피곤하더라도 대신 돈을 받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최봉윤은 미국에서 자란 아이의 생각이 본국에서 자라는 어린이들과 대조적인 것에 놀랐다. 국어학교의 학기가 끝나는 날에는 학예발표회를 열어 그동안 배운 동요, 무용, 연극, 연설 등을 학부모와 일반 한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행사에는 2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였고,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조국의 노래, 춤, 연극 등을 즐기며 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미주지역 한인들은 독립운동 지원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미주지역에 재무위원을 선임하여 인구세와 애국금을 걷었다. 김원용은 재미한인들이 원동과 구미 각지에 외교 선전, 임시정부 유지와 군사 활동에 조달한 재정은 해방될 때까지 300만 달러를 초과하였다고 회고했다. 1929년에는 임시정부가 재정 곤란으로 청사 집세를 밀리자 시카고 한인들은 임시재정후원회를 조직하여 200달러를 임시정부에 보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애국심 하나로 이와 같이 한 것”이라며 지원해준 한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1942년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 명의로 보고된 ‘재무부 24년도 재정상황(1942. 10. 25.) 보고’에는 “임시정부 성립 이래 임시정부가 명의를 유지하여 온 것은 재미동포들의 지원 덕분”이라고 하여 미주 한인들의 재정지원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미한인들은 태평양전쟁기에도 활약했다. 유학생들이 일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한국 유학생들을 각 기관으로 파견하여 통역을 맡겼다. 그리고 한인들은 한인 경위대인 맹호군을 조직하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맹호군 정식 인정수여식이 거행되는 날 맹호군의 관병식이 이루어졌다. 이는 나라를 잃고 30여 년 만에 처음 행해진 것으로, 최봉윤은 가슴이 찌르르하니 떨려 왔고, 300여 명의 한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의 한때를 보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한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선우학원은 회고록에서 안창호 사촌 동생 안영호가 전쟁 중에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안영호는 백인 노동자와 함께 식당에 들어갔지만, 웨이터는 안영호의 주문을 받지 않으며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이에 안영호는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왜놈과 싸워온 지 수십 년이 됐다. 우리는 미국과 함께 일본과 싸운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내게 커피 한 잔 안 팔고 모욕되는 이야기를 하니 분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신 같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이처럼 미주지역 회고록을 통해 신문, 문서 등 1차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상황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주지역 회고록과 관련한 연구는 대부분 인물 생애 연구에서 개인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본격적인 연구는 미진한 상황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재미한인들의 역할은 재정지원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재미한인들이 재정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는 식의 결과만을 강조하고, 그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떻게’ 돈을 벌어 지원할 수 있었는지의 고달픈 과정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역할을 독립운동 지원만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회고록을 활용하여 이민사, 생활사 측면으로 확장하여 조명할 필요가있다. 이를 통해 한인들의 경제, 사회적 생활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미주지역 회고록을 중심으로 한인디아스포라 전반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