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불후의 광복군
—글. 이은영(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불후를 직역하면 썩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불후는 너무 훌륭해서 영원토록 명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후의 명곡, 불후의 명작, 불후의 명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토록 명성이 사라지지 않을 불후의 인물이 있다. 바로 광복군 김우전이다.
김우전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김우전金祐銓(1922~2019)은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에 진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은 ‘학도특별지원병’이라며 조선 유학생들을 강제 입대시켰다. 1944년 2월 중국 쉬저우徐州로 파견된 그는 3개월 만에 탈영해 조국의 광복 전선을 찾아갔다. 바로 김학규 장군 휘하의 광복군 제3지대이다. 안후이성安徽省 푸양현阜陽縣 린취안臨泉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입교해 그해 11월 졸업한 그는 연락장교로 활약했다. 1945년 1월 미 공군 대위 버치(J. M, Birch)로부터 필리핀 상륙작전과 버마 탈환작전의 성공이 각국의 첩보작전 지원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곧 있을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에 앞서 첩보작전에 필요한 무전 기술을 광복군에게 전수해 줄 것을 청했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그런데 중국군의 승인 없이는 미군이 중국 내의 한국광복군을 훈련을 시킬 수 없다는 제약에 걸리자, 김학규 장군은 김구 주석을 통해서, 버치 대위는 쿤밍昆明의 미 제14항공대 센놀트 사령관을 통해서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승인을 받아냈다. 마침내 김우전은 1945년 2월 18일 미 제14항공대의 O.S.S.(전략첩보국)로 파견을 나갔다. 그해 4월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辦公室 기요비서機要秘書’에 임명되었다. 그 후 한글 무전 암호를 완성하고 국내 진공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했다. 해방 후 귀국해 중앙대학교(전 조선신문학원)를 졸업하고, 광복회 이사와 감사, 한국광복군동지회 부회장, 광복회 부회장, 제16대 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9년 2월 서거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김우전은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약하는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것은 1945년 2월 15일부터 5월 2일까지 작은 수첩에 기록한 짧은 일기가 전부이다. 이 일기는 그가 임천의 광복 전선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비록 77일간의 일기지만 김우전 개인의 독립운동 투신 경위는 물론 광복군 제3지대의 일부 활약상을 엿볼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김우전의 수첩 일기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1945년 2월 18일 쿤밍의 O.S.S.로 가기 위해 임천을 출발한 그는 3월 9일 벌치 대위와 함께 미군 수송기를 타고 라오허커우老河口에 내렸다가 12일 다시 비행기를 타고 쿤밍으로 갔다. 14일 그는 미군 측 장교들과 함께 조선상륙작전 등의 문제를 토의했는데 미국 측이 우리 측 요구를 모두 수용해 주었다. 당시 그는 조국의 독립 전에 자신의 육신은 독립의 기초가 될 제물로 행복하게 바쳐질 것이라며 기뻐했다. 16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주석을 만났다. 4월 6일 그는 김구 주석으로부터 비밀기관인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 기요비서’ 임명장을 받았다. 사정상 즉시 떠나지 못하고 25일에서야 쿤밍으로 향한 그는 28일에는 일본 군대에 있는 한국인 장병들에게 탈영을 권유하는 선전문 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5월 2일 제3지대의 김학규 장군 등에게 편지를 쓴 후 동지와 함께 한국 남아가 택할 길에 대해 토론을 벌인 것으로 수첩 일기는 끝이 난다.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직전까지 꾸준히 한글 암호를 진화시켜 사용했고, 그중 마지막으로 완성된 한글 암호가 바로 김우전의 한글 무전 암호이다.
미국은 1945년 한반도 상륙작전을 위한 한글 암호가 필요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일본과의 최후 결전을 위한 국내 진입 작전에 사용할 한글 무전 암호가 필요했다. 이러한 가운데 특수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우전이다. 한·미 군사합동작전을 위해 체결한 양측의 합의 사항에 따라 그는 미군 측으로부터 무전 통신 기술 등을 전수받았다.
① 김우전 한글 암호표(A)
② 김우전 한글 암호표(B)
김우전 한글 암호표 (A)와 (B)
김우전, 「한국광복군 O.S.S. 특공작전용 한글암호표 W-K KOREAN COD TABLE (A)(B)」,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9집, 1995, 391-392쪽.
김우전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24자이기 때문에 2단위(두 자리 수)로 숫자화하면 충분할 것이고, 숫자 10자(0~9)의 전신부호만 익히면 되므로 기술을 빨리 습득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때 받침 자음은 4단위(네 자릿수)로 만들되 앞에 두 자리는 ‘00’으로 하여 받침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원안을 도출해낸 지 한 달여 만인 1945년 6월 12일 숫자, 구두점, 영문자 등까지 포함된 완벽한 한글 무전 암호표를 완성했다. 한 단계 발전된 암호표까지 탄생시키면서 암호표는 (A), (B) 두 개가 되었다. 이 암호는 암호 제작에 도움을 준 미 공군 대위 ‘윔스(Weems)’의 ‘W’와 김우전의 ‘K’를 붙여 ‘W-K 한글 무전 암호표’로 명명되었다.
두 표를 보면 암호표 ‘(B)’는 ‘(A)’에 비해 매우 간략하다. 중요한 것은 암호표 ‘(A)’를 적용하든 ‘(B)’를 적용하든 모두 동일한 암호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암호표(B)’를 펼쳐보면 다음과 같다.
김우전의 암호표를 기준으로 ‘가’는 ‘1130’으로, ‘강’은 ‘11300018’ 로 표기된다. 암호표에 따라 작성된 숫자는 모두 이어서 쓴다. 이를 기저로 ‘대한독립만세’를 표기하면 ‘134024300012133400111 4390016153000121741’이 된다. 모든 숫자가 연이어 있어 암호 해독이 어려워 보이지만 헷갈릴 염려는 전혀 없다. 암호 해독은 암호 표기 방법과 역으로 하면 된다.
1개월 만에 한국광복군의 O.S.S. 무전 훈련에 쓰일 교재와 한글 무전 암호를 만든 김우전은 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사실이 없다. 그는 독학으로 한글을 익혔고, 지대본부 동지들에게 한글 맞춤법을 가르쳤던 경험을 토대로 한글 무전 암호를 완벽하게 구성해 냈던 것이다
한글 무전 암호를 완성한 김우전은 전방으로 가서 김구 주석이 내려준 ‘국내 침투공작’ 사명을 완수하고자 했다. 그런데 연락장교로서의 임무를 다하라는 김학규 장군의 명과 광복군 O.S.S. 무전 훈련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등 임무가 점점 늘어나면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8월 초 O.S.S. 무전 훈련이 마무리되어 가자, 김우전은 ‘국내침투공작’을 위해 전방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8월 9일 ‘일본군 무조건항복’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 그는 김구 주석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지도 못했고, 광복군의 O.S.S. 특공작전을 직접 해보지도 못하게 되자 독립군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가책을 느꼈다.
결국 김우전의 한글 무전 암호 ‘W-K KOREAN CODE TABLE(A)(B)’는 활용될 기회를 상실한 채 ‘비밀’에 붙여져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 소장되었다가 1988년 12월 5일 문서가 비밀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본은 여전히 국립문서보관서에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은 복사본이다.
김우전 『김구 선생의 삶을 따라서』
김우전은 그가 만든 한글 무전 암호를 사용할 기회를 상실하면서 자신이 이룬 업적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높이 평가할 이유를 알고 있다.
첫째, 일본에서 유학 생활은 했지만, 일본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두려워 일본 군대를 탈영했다면, 탈영 후 한걸음에 광복 전선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광복군 지대 본부 동지들에게 대한인의정신적 뿌리인 한글을 잊지 않도록 독학으로 익힌 한글 맞춤법을 교육하는데 힘썼다는 것이다. 셋째, 미군 측의 협조를 이끌어 내 완벽한 한글 무선 암호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넷째, 자신이 만든 한글 무선 암호를 활용하기 위해 국내 진공 작전에 침투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국내 진공 작전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우전, 그를 불후의 광복군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