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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한국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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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한국애국가

우리나라의 국가는 ‘애국가’이고, 국기는 ‘태극기’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국가와 국기는 우리 민족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한 나라의 ‘국가’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한 독립투쟁에서 불렸던
가사와 곡조가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가 되었다.

─ 글. 김도형(문화재전문위원)

우리나라의 국가는 ‘애국가’이고, 국기는 ‘태극기’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국가와 국기는 우리 민족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한 나라의 ‘국가’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한 독립투쟁에서 불렸던 가사와 곡조가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가 되었다. ‘애국가’가 현행 ‘국가’로 자리잡기까지 아주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이를 ‘국가’처럼 불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1930년 9월 3일 미국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바로 그날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연주를 하기 전에 태극기가 걸린 강당에서 동포들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당시 미주 한인들이 불렀던 애국가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이었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1935년 12월 28일 시카고 한인교회에서 그가 직접 연주하였다. 당시 『신한민보』의 기사에 의하면, “안익태 씨가 수삼 년간 심혈을 경주하여 창작한 애국가의 신곡조를 친히 연주하였는데, 그 활발하고 웅장함이 재래의 곡조에 비하여 매우 우승하다”고 하였다.1) 이 신문 기사에 의하면, 안익태는 애국가를 3년간 고심하여 창작하여 1935년 말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안익태의 신곡조 애국가는 1936년 시카고지방 3 · 1절 기념식에서 모두가 합창하였다.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도 안익태가 새로 작곡한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Ai Kook Ka)]’의 악보를 제작하여 20센트에 한인동포에게 판매하였다. 그리고, 1942년 대한인국민회 상무부에서는 ‘한인청년연합승리창가대(the Koren Victory Chorus)’가 부른 안익태의 애국가와 바리톤 이용준(Frank Lee)이 부른 ‘구애국가’를 함께 수록한 음반을 만들어 1달러에 판매하였다.2)
해방이 된 이후 1945년 11월 12일 「한국애국가」의 악보가 중국 충칭重慶에서 출판되었다. 「한국애국가」 악보는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에서 출판되었고, 인쇄비용은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에서 기부하였다. 「한국애국가」 악보의 편찬자는 호연胡然과 이사소李士釗 두 사람이 주편主編을 맡았다. 작사자는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명佚名이라고 하였고, 작곡자는 안익태安益泰라고 하였다. 악보 표지의 오른쪽에 ‘한중영문韓中英文 중문판中文版’이라고 하여, 한국어 · 중국어 · 영어로 번역된 가사를 실었다는 것과 설명은 중국어로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악보의 중국어 번역자中譯는 민석린閔石麟(민필호), 영어 번역자英譯는 정환범鄭桓範이라는 것을 밝혔다.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한국애국가」 악보는 8절지를 2단으로 접어 양면에 모두 4면으로 되었다. 악보의 표지에는 가운데 세로로 ‘한국애국가’라고 제자題字를 김구 주석이 ‘1945년 10월 18일’에 썼다고 ‘김구지인金九之印’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한중영문韓中英文 중국판中國版’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밑 아래에 ‘중화민국 34년 11월 12일 중경 초판’이라고 하였다. 표지의 바탕은 연한 하늘색에 흰색으로 된 여러 겹의 동심원과 그 위에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중앙에는 붉은 색의 백두산 천지를 넣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대한민족大韓民族 발상지發祥地 백두산상白頭山上 천지天池’라고 설명을 붙였다.
「한국애국가」 악보의 뒷면 표지에는 중산장中山裝을 입은 김구 주석의 사진을 크게 넣었고, 그 위에 붉은 글씨로 “한국 독립운동에 40여 년 종사하신 혁명영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 최근 사진”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사진 아래에 또 붉은 글씨로 ‘한국애국가의 고사故事’를 적었다. 그리고 아래에 출판사, 편집자, 발간 일자 등 오늘날의 ‘판권’에 해당하는 사항을 적었다. ‘한국애국가의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애국가 레코드판 광고 (『신한민보』, 1942.12.3.)

이 애국가는 50년 전 한국의 어느 애국지사의 손에 의해 쓰여졌으나, 그 이름을 이미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서양의 명곡을 가져다 가사를 붙여 노래하였으나, 그 후 한국 인사들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여겼다. 이에 10년 전 한 한국 청년 음악가가 이 새 곡을 만든 것이 곧 한국의 광복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중략)… 중문번역자 민석린 군은 원래 한국임시정부 주석판공청主席辦公廳 주임으로서, 현재 한국의 주화대표駐華代表이다. 영문번역자 정환범 군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박사이다.3)

「한국애국가」 속지에는 악보와 가사가 실려 있다. 속지 왼쪽에는 애국가 악보가 실려 있고 그 아래에 한국어 · 중국어 · 영어의 1절 가사를 수록하였다. 악보 위에서는 ‘한국애국가’라는 제목과 함께 왼쪽에 작사자, 작곡자, 중문 · 영문 번역자가 기입되어 있다. 그리고, 속지 오른쪽에는 애국가 2절부터 4절까지 한국어 가사, 중국어 번역, 영어 번역을 실었다. 한국어 가사는 현재와 한글 맞춤법에 차이가 있으며, 가사도 약간 다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성립 이후 모든 공식적인 행사에서 국민의례가 정례화되어 있었고, 태극기에 경례를 하고 동시에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의 ‘애국가’는 올드랭사인의 곡조에 맞추어 ‘국가’처럼 불렀다. 그러나 외국 곡조를 차용하여 불렀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안익태가 작곡한 신곡조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임시정부에 요청하였다.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선 1940년 12월 20일 안익태가 작곡한 신곡조 ‘애국가’ 사용을 허가하였고, 다음해 2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에 신곡조 애국가 사용을 허가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대외적으로 알렸다.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신곡보新曲譜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음으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4)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1941.2.1.)

임시정부에서는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요청한 신곡조 애국가의 사용을 승인하였고, 임시정부의 공식 행사 때도 ‘국가’를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임시정부에서 ‘애국가’를 공식적인 ‘국가’라고 결의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처럼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이 되고 임시정부가 환국을 할 시기에, 한국어 · 중국어 · 영어로 된 「한국애국가」 악보를 발간한 것이다. 「한국애국가」악보가 발행된 이유는, 대외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와 김구 주석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애국가」 악보를 다시금 음미하면서,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국가와 국기로 합의되고 결정되어 사용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명심해야만 한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국애국가」 악보

1) 『신한민보』 1936년 1월 16일자, 「안씨의 신작 애국가」.
2) 『신한민보』 1942년 12월 3일자, 「한국애국가 유성기판 사시오」.
3) 번역문은 박원호, 「1945년 중경임시정부 발행 「한국애국가」의 현대적 의미」,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4, 2016, 46-47쪽에서 재인용하였음.
4)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1941년 2월 1일),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