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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생활탐색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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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식생활

“사실 배추로 만드는 반찬이 값이 제일 쌌기 때문에 늘 소금에 고춧가루하고 범벅을 해서 절여놨다가 꺼내 먹곤 했다.” — 정정화 『장강일기』 中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가 만들었던 배추김치

— 글. 주영하(장서각 관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김구金九(1876~1949)는 1919년 상하이에 가서 임시정부의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김구의 상하이에서의 망명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더욱이 1924년 김구는 상하이에서 부인 최준례崔遵禮(1889~1924)를 잃었다. 이후 김구는 임시정부 청사에 살면서 상하이에 와 있던 독립투사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끼니를 해결했다. 그중 한 사람이 정정화鄭靖和(1900~1991)였다. 당시 정정화에게는 ‘후동’이란 아들이 있었다. 김구는 후동이를 봐 주기도 하면서 정정화가 차려준 식탁에 자주 앉았다.

정정화는 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만 10세 때 동갑 김의한金毅漢(1900~1964)과 혼례를 치렀다. 김의한의 아버지는 대한제국 때 공조판서 ·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김가진金嘉鎭(1846~1922)의 아들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대단한 집안 출신인 두 사람이 조혼早婚을 했던 것이다. 정정화의 시아버지인 김가진은 1919년 3 · 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정정화 남편과 함께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정정화는 그 다음해 1월 남편과 시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정정화는 자신의 망명생활 경험을 담은 『장강일기』라는 책을 썼다. 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1923년 7월 나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2년) 시아버님 상을 당할 당시에도 그랬지만 상하이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저 하루 먹고 하루 먹고 하면서 간신히 꾸려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식생활이라고 해야 가까스로 주먹덩이 밥을 면할 정도였고, 반찬은 그저 밥 넘어가게끔 최소한 종류 한 두 가지뿐이었다.”
1920년대 상하이에는 쌀이 부족하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에서 유통되었던 쌀은 인디카(indica) 계통이었다. 쌀은 품종에 따라 크게 자포니카(Japonica)와 인디카 계통의 것으로 나뉜다. 자포니카 계통의 쌀은 주로 일본열도를 비롯하여 한반도와 중국 북부 지방에서 재배된다. 이 자포니카 계통의 쌀은 둥글고 굵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서 인디카 계통의 쌀은 주로 인도아대륙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 지방에서 재배된다. 인디카 계통의 쌀은 자포니카 계통의 쌀에 비해서 긴 모양이고, 자포니카 계통의 쌀에 비해 차진 성분이 적다.
아마도 정정화를 비롯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인디카 계통의 쌀로 지은 밥을 주로 먹었을 것이다. 정정화는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상하이에는 잡곡밥이 없고 대부분 쌀밥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고, 부자도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상하이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라고 『장강일기』에 적었다. 간신히 끼니를 해결했던 정정화 입장에서 상하이의 쌀밥이 조국에서 먹었던 자포니카 계통의 쌀로 지은 것이 아니라도 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쌀밥은 해결되었지만 문제는 반찬이었다. 다행히 다양한 채소가 시장에 많이 나왔다. 정정화는 “상하이에는 국내보다 푸성귀가 풍부했다. 미역이나 김 따위는 드물었으나 배추 종류는 다양해서 여러 가지 반찬을 해먹을 수 있었다.”라고도 썼다.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챙겼던 정정화는 상하이의 시장에서 다양한 배추를 싼값으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00년 전 한국인은 쌀밥에 배추로 만든 김치만 있으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배추의 원산지는 중국의 양쯔강 유역으로 알려진다. 초기 배추의 모양은 오늘날 한국의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배추와 달랐다. 길쭉한 푸른 잎이 있지만 속은 거의 비어 있는 배추였다. 이런 배추를 ‘비결구非結球 배추’라고 부른다. ‘비결구’는 속이 꽉 차 있지 않다는 뜻이다. 조선 초기만 해도 지금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 일대의 농민들은 비결구배추를 재배하여 사대문 안의 가정에 판매했다. 하지만 무보다 양도 적고 맛도 좋지 않아 비결구배추의 소비량은 많지 않았다.
14세기경 상하이를 품고 있던 저장성浙江省 일대의 농민들은 속이 반쯤 찬 배추 품종을 개발했다. 이 배추는 속이 반쯤 차서 ‘반결구半結球 배추’라고 불린다. 이 반결구배추가 중국의 화북지역과 동북지역으로 전해져 널리 재배되었다. 반결구배추는 비결구배추에 비해 수확량도 많고 맛도 좋았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관리와 선비 중에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중국 동북 지역의 농촌에서 반결구배추 밭을 보고 감탄했다. 그들 중 반결구배추의 종자를 조선으로 가져오려고 노력했고 결국 가지고 왔다.
네 번이나 베이징을 다녀온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당시 서울 농촌의 반결구배추 재배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배추를 들어 말해보면, 서울 사람들은 해마다 연경에서 배추씨를 수입하여 쓰는데, 그래야만 배추가 맛이 좋다.” 19세기 이후 서울과 개성의 농부들은 반결구배추를 주로 재배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아들 정학유丁學游(1786~1855)는 1819년경에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음력 10월 편에서 무와 배추를 캐서 김장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추를 냇물에 깨끗이 씻어 짜고 싱겁고를 맞게 하고 고추 · 마늘 · 생강 · 파에 젓국을 넣어 김치를 담근다고 썼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여사,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
임시정부 요인들인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서울 출신 정정화는 상하이로 망명을 하기 전에 반결구배추만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상하이에 와서 여러 가지 종류의 배추를 시장에서 발견했다. 정정화는 상하이에서 비결구배추와 반결구배추뿐만 아니라, 속이 꽉 찬 결구結球 배추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하이에 배추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장강일기』에 써놓았다.
결구배추는 19세기 중반 산둥성山東省의 농민들이 반결구배추를 개량하여 만든 품종이다. 1882년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온 산둥성 농민들은 결구배추 종자를 가지고 와서 인천과 서울 교외의 농촌에 재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결구배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우선 개성의 보쌈김치를 만들 수 있는 반결구배추의 푸른 잎이 결구배추에 부족했다. 맛도 반결구배추만큼 고소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 화교 농부들은 서울과 경기도, 심지어 황해도의 농촌에서 결구배추를 재배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결구배추에 오랑캐를 뜻하는 ‘호胡’ 자를 붙여 ‘호배추’라고 부르면서 기왕의 반결구배추와 구분했다.
1923년 이후 1946년까지 조국을 찾지 못했던 정정화는 상하이에서 결구배추도 보았을 것이다. 정정화는 『장강일기』에서 “사실 배추로 만드는 반찬이 제일 값이 쌌기 때문에 늘 소금에 고춧가루하고 범벅을 해서 절여 놨다가 꺼내 먹곤 했다.”라고 썼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소금에 절여서 고춧가루로 양념을 한 배추김치를 밥반찬으로 요리했다. 이 배추김치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인들 식탁에 올랐다. 김구를 비롯하여 독신으로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국의 쌀밥과 달리 바람에 날릴 듯 가벼운 맛의 인디카 벼로 지은 쌀밥에 배추김치를 먹으면서 잠시나마 망명 생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정화가 직접 만든 배추김치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독립을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이어간 촉매제가 아니었을까?

아래 왼쪽부터 화심(花心)배추(비결구), 경성배추,
개성배추, 반결구배추. 위쪽은 모두 결구배추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25주년 기념지』 상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