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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터와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하이 프랑스조계

독립의 터와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하이 프랑스조계

1920~30년대의 하비로는 프랑스조계의 중심이면서 상하이의 유행과 패션을 선도하는 명소였다.
…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얼마되지 않아 재정궁핍과 위상 저하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독립의 터와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하이 프랑스조계

─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에서 발행한 최신 상하이지도(1932)
공공 조계지
프랑스 조계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상하이上海프랑스조계에 세워졌을까?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남방의 상하이 프랑스조계(la concession française de Changhaï)에 수립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상하이 조계지는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영토주권이 완전히 외국(영국,․포르투갈)에 넘어갔던 공간과 달리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淸의 계산과 타협을 반영한 국제적 공간이었다는 점. 둘째, 1910년대 상하이 조계지에는 상당수 한인들이 거주하여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임시정부 수립 배경과 과정에서 한인사회가 기여했다는 점. 셋째, 상하이 조계지들은 독립운동에 유리한 근대적 교통 및 통신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 즉 세계 해상교통과 동양무역의 중심지였고, 중국혁명의 핵심거점이었으며, 동아시아 민족주의운동의 중심지 였던 점도 중요하다. 넷째, 프랑스조계는 상하이의 다른 조계, 즉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의 영향력이 강했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공공조계公共租界에 비해 안전했다는 점. 다섯째, 상하이 프랑스조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강하게 주창되었던 외교독립운동 노선에 적합한 곳이었다는 점. 끝으로, 프랑스는 “자유민의 친구이자 자연적 동맹”이라는 프랑스 혁명정신의 수호를 프랑스 국가이익의 일부로 간주했던 프랑스 나름의 외교적 고려가 있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1-상해시기』, 독립기념관, 2008 ; 김명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상해 프랑스조계에 수립되었나?」, 『국제정치논총』 58-4, 한국국제정치학회, 2018).
이처럼 상하이가 갖는 정치·경제·사회적 중심지라는 위상과 장점 외에도 망명객, 혹은 이주자에게 비자(VISA)를 요구하지 않은 사실도 중요하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통적인 ‘톨레랑스(tolérance, 일종의 관용정신)’적 차원에서 일정한 정치적 망명자 보호정책을 편 배경도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당국의 탄압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되었다. 임시정부가 최초로 청사를 마련한 장소는 김신부로金神父路였다. 청사는 임시정부 각료들이 모여 정부의 여러 정책사항 및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지휘부 역할을 맡았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임시정부는 최초 청사를 마련한 이후 재정적 문제와 일제 당국의 압박, 이에 따른 프랑스조계 당국의 폐쇄조치 등의 이유로 소재지를 자주 옮겨야 했다. 특히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등의 이유로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로 청사를 옮겨야 했다.
임시정부가 그나마 안정적 청사를 구한 시점은 1926년 7월 경이었다. 역시 프랑스조계 안의 ‘백래니몽白來尼夢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에 마련된 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서 1932년 5월 항저우杭州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6년 동안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93년 4월 복원 당시 주소는 ‘상하이시 노만구 마당로 306농 4호上海市 盧灣區 馬當路 360弄 4號’였다. 현재 주소는 ‘상하이시 황포구 회해중로 651호上海市 黄浦区 淮海中路 651号’이다. 이 청사 건물은 1990년 6월 5일 상하이시 노만구盧灣區에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1992년 본격적인 복원공사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한중 양국은 1993년 4월 13일 복구공사 완공기념식을 거행하고 임시정부기념관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상하이를 방문한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임시정부 청사 건물이다.

프랑스조계는 어떤 곳인가?

조계租界란 근대 중국의 외국인 거주지를 말하는데, 행정권은 외국이 한 나라 또는 공동으로 갖는다. 상하이의 프랑스조계는 1849년에 설치되었다. 1854년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공동으로 공부국工部局을 세워 조계를 운영했으나, 1862년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된 직후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공동국公董局을 세워 프랑스조계를 관리, 운영하였다. 1863년부터 영국(미국) 운영의 공공조계와 프랑스조계, 그리고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화계華界로 구분되었다.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된 공공조계(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신고전주의식 건축물, 철과 유리·콘크리트로 대표되는 20세기 근대건축 마천루의 형식을 띤 아파트, 은행, 산업문명의 전형을 보여주는 백화점과 같은 고층 건물들이 중요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조계(French Concession)에서는 곧게 뻗은 넓은 도로, 프랑스 오동나무法國梧桐라고 불리는 플라타너스가 심어진 거리, 정원이 딸린 넓고 우아한 유럽풍의 전원주택 등이 조화되어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현재 임시정부 청사가 복원되어 있는 마당로의 풍경과 비슷한 것이었다. 근대 이후 상하이 사람들, 나아가 중국인들이 상하이를 ‘동방의 파리’라 부르기 좋아한 이유를 위와 같은 프랑스조계 이미지와 연결해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최낙민, 「‘동방의 파리’, 근대 해항도시 상해의 도시이미지 - 프랑스조계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75, 부산경남사학회, 2010).

1920~30년대 상하이의 유행과 패션을 선도하는 명소, 하비로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가난과 궁핍에 시달려

1920~30년대의 하비로는 프랑스조계의 중심이면서 상하이의 유행과 패션을 선도하는 명소였다. 약 4㎞에 달하는 이 거리에는 세계 유명브랜드 상점과 명품이 가득했고, 그 중에는 러시아인의 호화상점, 프랑스조계 동일 업종 중 최고의 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식의 상업배치를 통해 유럽과 미주의 선진도시와 동시에 고급 소비생활을 가능케 했다. 양식, 베이커리, 양복점과 일용백화점 들이 즐비했고 영화관, 출판사, 학교와 교회 등 각종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프랑스의 개방적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문인과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 거리를 이미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얼마되지 않아 재정궁핍과 위상 저하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요인들은 가난과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프랑스조계 중심지의 이러한 번성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상하이 황포탄거리

©US Signal Corps

임시정부와 프랑스조계 당국과의 관계는 어땠을까?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최고 권력자, 행정책임자는 상하이 주재 프랑스 총영사였고, 행정기구는 공동국이었다. 공동국 밑에 경찰서가 설치되어 조계 안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경찰서는 조계에서 범인의 체포권이 있었으나, 프랑스 영사가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조계 당국의 한인 독립운동 정책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정책은 매우 복잡했다. 특히 프랑스조계 당국의 임시정부와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정책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를 계기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와 관련 요인, 가족들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난징南京 등을 거쳐 결국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할 때까지 상당기간 유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기前期에는 임시정부와 한인 독립운동에 대해서 대체로 불간섭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후기에는 불간섭정책을 버리고, 일본에 협조하여 한인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다만 전기에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해 불간섭정책을 취했지만, 의열투쟁 등 강력한 수단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단속하여 그들을 체포한 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에 인도하는 방침을 취했다. 특히 프랑스조계 당국은 전 시기에 걸쳐 공산주의 운동은 탄압했는데, 이에 따라 한인은 물론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검거, 탄압하였다.
상하이 프랑스조계는 1840년대 66헥타르(ha)로 출발하여, 1932년에는 약 1,000헥타르(ha)에 이르는 영토와 조계자치 시위원회, 그리고 자체 경찰조직을 갖춘 조계로 발전하였다. 1932년 당시 프랑스조계의 인구는 42만 명의 중국인, 13,000여 명의 외국인, 그리고 1,200여 명의 프랑스인 등 약 43만 명에 달했다. 40여 개 국적의 외국인들 중에 상당수가 중국 정치 망명자,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을 피해온 백계白系 러시아인들, 1919년 3 · 1운동 이후 상하이로 온 한인 독립운동가들, 1,000여 명의 한인들,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온 유대인 등 정치적 망명자들이었다.
이렇게 상하이 프랑스조계가 정치 망명자들에게 피난처로 유명한 것은 입국을 위한 비자(VISA)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 1830년대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에 맺어진 정치망명자 보호협정이 국제사회의 첫 협약이었다는 점, 그리고 상하이 조계가 법적으로 일반 중국인가와 구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 망명자들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조계 당국과 프랑스 정부는 겉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조계 당국은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일반적 민사․형사 사건이나 평상시에는 조계 안의 한인들에 대해 일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보호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내외에 영향력이 큰 사건,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입장을 저해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강력히 통제하는 한편,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일본영사관 당국과 긴밀히 협조하며 한인들을 압박하였다.
보기를 들면 1925년 상하이 총영사에게 보낸 주베이징駐北京 프랑스 공사의 정치 망명자(한인 망명자들)에 대한 지침에서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받는 망명 허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전의 암묵적 지침을 명시화한 이 공문에 따라 프랑스조계 경찰은 공산주의자와 외국인에 대한 ‘첩보’를 작성하여 주週단위와 월 단위로 총영사總領事와 베이징北京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일본 당국이 한국인 체포 요청이 있을 때마다 요약되어 22차례나 총영사와 베이징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는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 임시정부와 관계 요인 등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상당한 제약요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프랑스조계 당국의 보호를 의식하고 상하이 조계지에 모인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사실상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한 조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에 따라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고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당국은 독립운동가들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안정된 정책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1920년대 일본 당국의 잦은 체포 협조 요청에 프랑스 정부는 조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주요 방안은 ‘추방론’과 ‘정보교환론’이었다. 추방론은 조계지에 있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을 프랑스로 추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방론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프랑스조계 당국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당시 여론과 일본 당국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조계지 안에 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데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조계 당국의 한인에 대한 태도는 중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1932년 5월 5일 이후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일본에 협조할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에 조계 관할권을 침범당했을 때 더 이상 그것을 묵인하지 않게 되었다. 두 차례 있었던 김구 체포 시도에 대한 프랑스조계 당국의 대응은 프랑스 측의 태도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도 프랑스 당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1934년 초부터 다시 변하여 더 이상 상하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수 없게 하였다.
191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22년에는 김구, 여운형 등이 프랑스조계에서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가졌다. 또 1932년에는 안창호, 조봉암 등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쉽게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특공작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비교적 안전했던 프랑스조계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해야 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에야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 정착하여 최후까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비좁은 조계지 안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지사들
– 순국선열 ·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참된 가치와 향기, 그 힘을 주목해야

1919년 4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맡았다가 결국에는 최고 영도자인 주석의 직책까지 맡았던 김구. 그는 회고록 『백범일지』에서 프랑스조계지에서의 답답하고 어려웠던 생활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왜倭는 불란서 사람과 나의 관계를 알고 난 후부터는 체포를 요구하지 않고, 정탐꾼으로 하여금 불란서 조계 밖에 있는 영국 조계나 중국지역으로 나를 유인하게 하여, 중․영 당국에 통보하고 잡아갈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안 후 나는 불란서 조계지를 한 걸음도 넘어서지 않았다.”(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04쪽) 위대한 인물이나 순국선열의 생애와 그들의 말‧문장, 위대한 작가나 그의 예술 작품이 주는 보이지 않는 이끌림이나 매력, 선한 영향력 등은 물리적 힘은 아니지만, 분명 우리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 이는 우리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풍요 등과 같은 현상, 물질 지향의 삶이 아니라 ‘가치 지향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비좁은 프랑스조계 안에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끝까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던 김구와 많은 독립운동가들. 김구는 일찍이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갖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지나간 사건이나 순국선열 이야기를 통해 이 ‘보이지 않는 힘’을 감성으로 느끼고, 흔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힘과 상상력을 널리 펼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