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유해 봉환
— 글.김광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는 국내외로부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에게는 멀지않은 장래에 독립을 쟁취하고 국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어느 사회든 구성원들의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다. 망명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질병이나 고령으로 순국하여 상하이 현지의 묘지에 묻히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이역 땅에 묻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와 상하이 한인사회는 독립운동가가 타계할 경우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면서 고인을 기억하고 그를 통해
내부 결속과 애국심, 독립의지를 고취하였다. 장의 과정에서 잠시나마 독립운동의 노선대립, 정쟁과 갈등을 내려놓고 한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상하이에서 순국한 첫 주요 인사이자 성대한 장례가 치러진 경우는 독립운동가 안태국安泰國이다. 1920년 노령과 상하이의 임시정부 통합을 위해 상하이로 온 안태국은 한 달도 안된 4월 11일 홍십자의원 16호 병실에서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신민회 및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안태국은 사후 ‘유일국사惟一國士’로 칭송될 정도로 걸출했던 민족 지도자였다. 임시정부 수립 후 첫 번째 주요 지도자에 대한 장례였기에 그만큼 감회가 컸을 것이고 국장에 준하는 규모로 장례가 치러지게 되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안태국과 생사를 같이했던 안창호는 동지들과 함께 장의 절차를 의논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는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의 생전의 독립운동과 인격을 감안하여 국장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 사업이 많으므로 국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대신 임시정부에서는 일부 장례비용을 지원하였다.
장례 호상소는 프랑스조계 개자이로愷自邇路 268호 서강리瑞康里 안창호 자택으로 결정되었다. 호상소가 차려진 대청 중앙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으며 아래에는 화륜으로 덮인 영구가 안치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명정銘旌이 세워져 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명정에는 ‘동오안태국선생東吾安泰國先生’, 좌우에는 ‘충의과감忠義果敢 유일국사惟一國士’라 쓰여져 있다.
발인은 4월 14일 오후 1시 30분이었다. 슬픔에 잠긴 장의 행렬은 상하이의 외국인 묘지인 정안사공묘靜安寺公墓로 출발하였다. 호상소를 출발한 장의 행렬은 전도前導와 30여 개의 만장이 앞장섰다. 특히 회장인 300명은 왼팔에 검은 베로 만든 상장喪章을 둘렀다. 영구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집불執紼을 좌우로 길게 늘이어 각각 50여 명씩의 회장인會葬人들이 늘어섰다.
오후 3시 장의행렬은 정안사공묘에 도착하였다. 일동은 묘지 내 예식당에서 영구를 앞에 놓고 김병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예식이 끝난 후 영구를 묘지로 옮겼다. 참석한 이들은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기도와 찬송으로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의 무덤 앞에는 “유일국사惟一國士 동오안태국선생지묘東吾安泰國先生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장례 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고인을 잊지 않고 추모하였다. 장례 몇 달 후에는 백일제가 있었다. 독립신문은 안태국 사후 1921년 4월에 제1주기 추도식이 거행된 사실을 보도하였다. 제1주기 추도식은 1921년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정안사공묘 내 복음당福音堂에서 거행되었다. 독립신문은 안태국의 기일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날인 4월 11일이었던 사실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동녕의 사회로 시작된 추도회는 찬송가 252장을 합창하고 김병조 목사의 기도가 있었다.
추도문을 낭독한 박은식은 마땅히 독립을 쟁취하여 선생의 ‘충골忠骨’을 국내에 모셔야 했거늘 해가 바뀐 오늘에도 또다시 이역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으니 눈물이 비처럼 흐를 뿐이라고 하였다. 이어진 추도사에서 여운형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1년이나 지나고 국내에서는 많은 동포들이 선생의 뒤를 이어 희생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들은 ‘유유’히 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안창호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자신은 안태국 선생이라 하겠다고 하며 안태국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하였다. 특히 선생이 신민회를 발기한 일을 거론하면서 그가 더 생존하여 민족의 진로를 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저녁 9시 일동이 기립하여 애국가를 부르면서 추도회는 끝났다.
©독립기념관
몇 해 후 안태국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얘기가 있었다. 1925년 안태국에 대한 기념비 건립과 더불어 노령 우스리스크에서 별세한 이갑李甲의 분묘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논의였다. 안태국 서거 5주기에 맞추어 기념비 설립 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은 사람들은 그 후에도 해마다 기일이 오면 묘소를 참배하고 관리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상하이에 묻힌 선열들의 유해를 봉환할 때가 되었다. 우선 귀국이 급하였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의 유해를 바로 국내로 모시지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과의 왕래가 비교적 용이하였기에 이장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1948년 동북과 화북이 중국공산당에 의해 점령되는 등 중국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어 갔다. 김구는 아들 김신에게 어머니 곽낙원,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차리석, 상하이의 최준례 유해를 모셔오도록 하였다.
홍콩을 통해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간 김신은 기강현綦江縣의 이동녕 유골을 수습하고 다시 화상산和尙山에 있던 할머니 곽낙원과 형 김인, 그리고 차리석의 유골을 수습해서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김신은 팔선교공묘八仙橋公墓에 있던 어머니의 유골을 수습했다. 천신만고 끝에 다섯 분의 유골을 수습해 귀국했다.
다른 사람들의 유해는 속절없이 남게 되었다.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당국은 도시개발을 위해 정안사공묘를 교외로 이전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박은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가 무연고묘가 될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상하이에 살고 있던 선우혁, 김시문은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 끝에 요인들의 유해를 대장진공묘大場鎭公墓로 이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주인 없는 묘가 될 뻔했던 안태국, 박은식 등의 유해는 최종적으로는 서가회 송경령능원宋慶齡陵園 내의 만국공묘로 이장되었다. 이들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가 역사의 격동 속에서 훼손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된 데는 상하이에 남아 이들 묘소를 관리했던 상하이 한인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냉전 시기 한국에서는 상하이에서 진행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소 이장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정안사공묘의 임시정부 요인들 유해가 만국공묘로 옮겨진 사실은 1970년대에 가서야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고국을 방문한 김시문은 박시창과 최윤신을 만난 자리에서 박은식, 안태국 묘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이 광복회 회장 재임시절이던 1983년부터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을 통해 만국공묘에 묻혀있는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다시금 확인하였다.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상하이에 묻혀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 봉환은 1992년 한중수교를 기다려야 했다. 수교 이후 한중 당국 간에 교섭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다음 해인 1993년 8월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가 70여 년 만에, 광복된지 4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숨진 선열 5위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자 온 국민은 옷깃을 여미고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행적을 기렸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70여 년만의 환국, 이것은 어린 세대에게는 낯선 역사를 생생히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기성 세대에게는 잊고 있던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여전히 많은 유해가 외국에 남아 있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유해 봉환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