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임시정부에 참여한 의사들
— 글. 박윤재(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시의사회의 전신인 한성의사회는 1933년 자신의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서두에 의사의 지위와 학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의술은 학문이 고상하고 그 사업이 아름다워 마땅히 세상의 존경과 숭배를 받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최고 전문적 학문을 공부한 지식계급으로, 그와 같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의술을 직업으로 하는 의사들로써 사회의 일선에 나서서 민족의 선구자가 되어 난국을 타개하지는 못할지라도 의료와 위생의 개량 발전과 서양의학의 보급에 노력하여 민족문화 향상의 책임을 부분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중요하다.”
의학은 식민지시기 최고의 학문이었다. 의사가 펼치는 의료는 아름다웠다. 의사는 지식계급이었고, 민족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독립투쟁은 선구자가 되는 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길도 제시하였다. 의료와 위생을 개량 발전시키고 서양의학의 보급에 노력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계몽에 나서는 것이었다.
계몽은 중요했다. 독립을 쟁취하고 나아가 유지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교육적 계몽의 역할은 컸다. 치료도 중요했다. 시골에 가면 의사가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의사들의 계몽적 역할, 치료의 확대는 필요했고, 중요했다.
의사 중에는 계몽적 역할, 치료의 확대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립투쟁에 참여한 의사들이었다. 그중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한 의사들이 있었다. 국내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망명한 의사들이 한 그룹이라면, 해외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룹도 있었다. 3 · 1운동 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의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경성의학전문학교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다. 그들 중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현측, 김창세, 신현창, 나창헌, 신영삼 등이었다. 이희경, 신건식, 임의탁 등은 미국이나 중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주현측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상하이로 망명한 주현측은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에 노력하는 한편 평북 연통제 참사, 재무부 참사를 맡았다. 대한적십자회에서 상의원으로 활동하던 주현측은 귀국 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김창세는 임시정부 수립 이전인 1918년부터 상하이 중국홍십자회총의원에서 근무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후 임시정부의 중추였던 안창호를 도왔다. 김창세는 안창호의 동서이기도 했다. 그는 대한적십자회 창설에 관여했고 적십자회 간호원 양성소 교수로도 활동했다.
신현창은 3 · 1운동 직후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상하이로 온 후에는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병원을 개원하고 동포들을 돌보는 역할도 하였다. 개원한 병원의 이름은 삼일의원이었고, 자신의 학교 선배인 주현측이 함께했다.
나창헌은 3 · 1운동 참가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후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상하이로 온 후에는 철혈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약하였고 한국노병회 결성에도 참가하였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과 내무부 차장을 역임한 나창헌은 1926년 결성된 병인의용대에 참여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신영삼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3 · 1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만주의 무장투쟁 계열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신영삼은 1928년 즈음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남경국민정부의 군의관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30년대에 접어들어 조선혁명당과 의열단에 참가하였고, 1942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희경은 미국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했다가 1918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한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대한적십자회 창립에도 참가하였다. 정부 내에서는 외무총장 대리와 외무차장을 맡아 미국 의회 극동지역 시찰단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신건식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역임한 신규식의 동생이다. 중국 항저우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한 신건식은 상하이에서 조직된 동제사에 참가한 뒤 중국군 군의관으로 활동하다가 193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가 맡은 직책은 재무부 차장이었다. 이외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임의탁은 중국 동제의학원 출신으로 1929년 국민부에 가입하여 외무부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친일파 숙청 비밀책임자가 되었다. 한국독립당에도 참가하였다.
©연세의대 동은의학박물관
김창세
임시정부에 참여한 의사들은 자신이 배운 의학을 독립투쟁 과정에서 활용하였다. 병원을 개원하여 투쟁을 위한 재정적 기반으로 삼거나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경우 군의관으로 활동하였다. 병원은 의사뿐 아니라 독립투쟁에 나선 이들이 이용하는 거점의 역할을 하였다. 병원은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전달하는 연락처로서도 의미가 깊었다. 의학은 의사들의 독립투쟁을 가능하게 한 소중한 재산이었다.
나아가 의학을 독립투쟁을 위한 수단을 넘어 독립투쟁 전략, 그 자체로 인식하고 활용한 의사가 있었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상하이로 건너간 김창세였다. 평안남도 용강이 고향인 김창세는 그곳에 파견된 안식교 의료선교사인 러셀(Riley Russell)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의학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 의사가 필요했던 안식교는 김창세를 당시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던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창세는 다재다능했다. 노래실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어학실력은 발군이었다.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할 때는 답사를 영어로 했는데,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청중을 보고 말을 했다.
졸업 후 김창세는 1918년까지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순안교회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그 해 중국 상하이에 있는 안식교 운영 병원인 홍십자병원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안 김창세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가 운영하는 적십자회병원에서 진료활동에 종사하는 동시에 부설 간호원양성소 창립에 참가하였다.
당시 대한적십자회에서 양성하고자 했던 간호사는 의사의 업무를 보조하거나 환자를 간호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간호사가 아니었다.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간호사였다. 전쟁 때 의사가 부족할 경우 간호사들은 부상병 치료를 직접 담당해야 했다. 간호원양성소는 그 상황을 대비하여 교육생들에게 “구급에 필요한 의학의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상하이에서 생활하면서 김창세는 독립과 의학, 독립과 건강의 상관성을 고민하였다. 이미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10년이 되어 있었다. 독립을 추구하되 어떻게 할 것인가가 김창세의 고민이었다. 김창세는 건강에 주목하였다. 그는 건강이 국가흥망과 직접 연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국가의 흥망은 국민의 건강 여하에 달려 있었다.” 건강을 이야기할 때 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예방이었다. 김창세는 건강 예방을 위한 방법으로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공중위생에 대한 관심은 1920년 김창세가 미국으로 떠난 계기였다. 1923년 김창세는 공중위생학 연구를 위해 존스 홉킨스 보건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에게 공중위생학은 “내 민족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봉사”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1925년 김창세는 「녹두콩에 대한 화학적, 생물학적 연구로 위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보건학 박사의 탄생이었다. 위생의 증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식생활 개선이 필요했고, 녹두콩은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원이었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미도 충분했다.
김창세는 박사학위 취득 후 조국으로 돌아왔다. 모교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세균학 및 위생학 조교수로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교에서 그동안 경험과 연구를 통해 정립한 자신의 공중위생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장은 ‘육체적 민족개조론’으로 요약되었다. 민족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즉 민족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육체를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창세에 따르면, 역사상 위대한 민족은 모두 체력이 건장한 민족이었다. 몽고족, 만주족, 로마인들이 그랬다.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는 다른 민족에 비해 건강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이 쇠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건강 부족에 있었다. 민족이 쇠퇴한 이유는, 즉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이유는 바로 건강에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했다. 한민족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김창세는 말했다. “나는 조선의 운명이 건강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민족의 부흥을 위한 다른 방법, 예를 들면, 정치적 해방, 교육의 보급, 경제의 발전, 종교의 보급 역시 건강이 보장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었다. 민족의 건강을 확보하는 일이 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었다. 위생은 특히 중요했다. 위생은 민족의 부흥을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조목이었다.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건강한 이유도 위생적인 생활을 한다는데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중위생의 향상이었다. 그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교육이었다. “우리나라의 건강상태를 진보시킬 그 제일보는 공중위생교육에 있다.” 김창세는 모교에서 자신의 후배를 가르치는 일을 넘어 강연에 나섰고 글을 썼다. 이후 김창세의 공중위생활동은 중국으로, 미국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의사들은 활동과정에서 자신의 전공인 의학을 활용하였다. 병원을 개설하여 동포를 치료하거나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군의관으로 활동하였다. 의사들의 병원은 독립투쟁의 연락처이자 거점이었다. 나아가 김창세가 상징하듯이 의사들은 자신이 배운 학문을 독립투쟁을 위한 전략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 전략은 독립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유효한 것이었다.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