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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온 소식

백암과 동오 선생 추도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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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과 동오 선생 추도문의 의미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열혈이 서린 추도문이 발견된다. … 임시정부 『독립신문』에 소재한 독립투사들의 추도문은 그 자체로서 우리 대한민국의 피 끓는 역사이다.

— 글. 김경남(부경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열혈이 서린 추도문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백암白巖 박은식 선생 추도문과 동오東吾 안태국 선생 조문을 살피고자 한다.

먼저 제189호(1925.11.11.)에는 백암 선생에 대한 추도문과 함께 ‘호상위원회護喪委員會의 의결’, ‘임시정부 공보’, ‘만장과 제문’ 등 11월 1일 서거하신 백암 선생의 장례 관련 다수의 기사를 포함하여 ‘백암 선생의 유촉遺囑’이 실려 있다. 이 유촉은 선생이 우리 민족, 특히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동포들에게 남긴 당부의 말로, 그 당시 독립운동의 어려움과 선생이 평생 지켜온 삶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나의 병세가 오늘에 이르러 심상치 않게 느껴집니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해 주오.”라고 시작하는 이 유촉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민족이 통일되어야 하고, 어떠한 수단과 방략이라도 다 쓸 수 있어야 하며, 운동하는 동지 사이에 애증과 친소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셨다. 당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北京促成會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안공근安恭根이 받아 적은 이 유촉은 “내가 말한 몇 가지 일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하고자 하면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며, “금일까지 무엇이 안 되니, 무엇이 어쩌니” 하면서 하지 않는 것은 “성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마지막 절규로 끝맺는다. 국권 침탈기로부터 일제강점기 서거하실 때까지 집필한 백암의 역사서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서명書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백암 박은식 선생은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제65호(1920.4.15.)에 보도된 ‘조동오선생문弔東吾先生文’은 동오 안태국 선생에 대한 조문弔文이다. 『한국독립운동사략』, 『독립혈사』를 통해 일제에 저항했고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윤석 김병조允錫 金秉祚’가 쓴 이 글은, 민족 최대의 가치로서 분열과 당파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또 하나의 추도문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동오 선생이 서거하기 직전 임시정부를 방문했을 때이다. 김병조는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분으로 조문 속에는 기독교적 사유 방식이 짙게 드러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동오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애국 열성을 부르짖는 추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오 안태국 선생은 1907년 양기탁, 안창호 등이 창립한 신민회 평남 총감總監으로 1910년 이후 만주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 창건 사업에 종사했던 열사이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 안창호의 초청으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하였다가 병사한 분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에 따르면, 동오 선생 장례식에는 삼백 명의 인원이 참석하였으며, 이동휘의 ‘추도사’, 여운형의 ‘생전사生前事’, 도산島山과 백범白凡의 ‘추도사’가 차례로 이어졌음이 확인된다.

동오 선생의 평생 소망은 독립 그 자체에 있었으며, 임시정부 수립은 동오 선생에게 크나큰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신민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동지가 소중함을 깨닫고, 105인 사건의 투옥 경험과 3 · 1운동의 한계를 절감했던 동오 선생은 이미 ‘민족자결주의’, ‘만국총회’ 등이 제국주의 침략국의 불의를 해결하는 장치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해외에서 고혼孤魂이 될지언정 독립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으며, 죽음으로써 공도公道를 실천하고자 하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죽음에 김병조 선생은, 높고 높은 절개가 만고 백두산에 보존되고, 그 시신이 독립군의 개선가와 함께 반장返葬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백암 선생 추도문과 동오 선생 조문! 임시정부 『독립신문』에 소재한 독립투사들의 추도문은 그 자체로서 우리 대한민국의 피 끓는 역사이다. 이 신문 제 160호(1923.5.2.)에는 ‘밝참’이 상강湘江 언덕에서 썼다고 밝힌 ‘내 너를 위하여’라는 시가 실려 있다. 두 분을 포함하여 독립투사의 삶을 다시 추도하는 마음으로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해 영전에 바치고자 한다.

이천만의 생존 위해/반만년의 영예 위해/아, 돌아가신 위장한 혼이여!/뼈에 새기노이다/당신의 붉은 뜻을/피에 심노이다/당신의 자유정신!/살아 남의 종됨보다 차라리 죽어 자유혼을-

백암 선생의 유촉
제189호(1925.11.11.)

조동오선생문
제65호(1920.4.15.)

내 너를 위하여
제160호(1923.5.2.)

오호 백암선생!
제189호(1925.11.11.)

오호 백암선생!

이역한천에 추풍은 소소하고 신강(상해 황포강) 저문 날에 백운은 유유한데, 아! 우리 국노國老, 우리 영수領袖, 우리 지도자, 우리 본보기가 되는 어른 백암 박은식 선생은 멀리 또 멀리 저 하늘 높은 곳으로 돌아가시도다. 다시는 못 오시도다! 한번 가고 한번 오는 것은 우주의 큰 도리요, 태어나 죽는 것은 인간사의 마땅한 도리라. 예부터 지금까지 무릇 억조경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그 누가 고고의 소리를 내며 태어난 날만 있고, 아득히 먼 곳으로 돌아갈 때가 없겠는가. 물은 흐르고 잎은 지도다.
명이 그뿐이요, 수명이 다한지라. 이제 선생이 나서 자라시어 할 일 하고 갈 데 가셨으니 굳이 통석할 것이 무엇이며 애도할 것 무엇이 있겠는가마는, 그 열렬한 지성, 오직 하나의 정력으로 더욱 그 춘호 같은 심정, 추월 같은 절의로 백귀가 난무하는 세상을 깨끗이 하지 못하시고, 독한 불길이 난만한 산하를 거듭 정리하지 못하시고 엎어진 조국을 그대로 두고, 쓰러지는 동족을 어쩔 수 없이 버리고, 아!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그 길이 이 웬 말인가? 하늘이 우리 백성을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다행히 선생 일인을 한말에 보내시어, 그 피가 마르도록 그 눈물이 다 하도록 최후의 분각까지, 이천만 민족의 선두에 서서, 민족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민족의 아픔을 먼저 아파하며 한 손으로는 독립기를 받쳐 들고 한 손으로는 자유종을 울리어 흉폭이 혹심한 왜적을 꾸짖어 물리치는 동시에, 춘몽이 방만한 형제를 불러일으켜 산을 무너뜨려 바다를 메우는 힘을 만들고 천일天日을 만회하는 투호를 던지는데 무정한 세월이 선생을 국사 이전에 가시게 하니 가는 그를 위하여 울며 추도함보다, 우리의 앞날 대업을 위하여 통렬함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아! 우리나라에 어찌 애국자가 없으리오. 그러나 앉으나 서나, 오직 국시國是만을 생각하고, 한마디의 말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참된 애국자로 선생만한 분이 없으며, 우리 민족 가운데 어찌 문학의 재사가 없으리오. 그러나 붓을 들면 세상을 깨우치는 잠언이 되고 먹통이 떨어지면 정의의 광망光芒이 되어 의부열사로 하여금 기운을 왕성하게 하고 피가 끓게 하며, 사악하고 패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전율하여 떨게 함으로써 춘추의 대의를 밝게 함이 선생만한 분이 없으며, 우리 사회에 어찌 큰 덕을 가진 선비가 없으리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한 점 더러움이 없고 평생 살아오심에 추호도 하자가 없이 청강의 선학같이 형산의 백옥같이 때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일생을 지낸 분으로 선생만한 분이 없으니, 선생은 실로 오천 년 역사의 정화로써 살아오셨고 삼천리 국토의 영령한 기운으로써 뛰어나신 한국의 총경아寵磬兒이시다. 이제 선생을 영결하매 강도가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상하가 뒤바뀐 혼탁한 세도에서 선생께서 돌아가심을 통곡하며, 색상色相이 현혹하고 관현管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착란한 사회로 인해 선생께서 돌아가심을 통곡하며, 이욕利慾에 몰두하고 더러운 행실이 낭자한 부패한 민덕으로 인해 선생께서 돌아가심을 통곡하며, 더욱이 우마처럼 몰림에 눈물짓고 노예의 고초에 목을 움츠리는 민족의 모습으로 인해 선생께서 떠나심을 통곡하며, 모든 방책과 힘으로써 정의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약하는 금일 오인의 운동을 뒤돌아보니 선생께서 돌아가심에 통곡하노라.
인생 칠십이 예로부터 드물다 하니 육십칠세의 선생 수명이 길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도리를 바로 잡고의 구하며, 사회의 통일을 위하여, 민덕을 배로 높임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부활을 위하여, 대업을 성취함을 위하여서는 오히려 선생이 한창 때 돌아가신 것임을 통곡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 그러나 선생은 이미 가셨도다.

아! 다행이냐 불행이냐. 선생이 세상에 나신 당시는 국운이 어려운 시기라. 도탄에 빠진 민중을 눈물로 조상하며, 불의를 공격하며, 압박에 반항하여 칠십평생에 하루라도 편한 잠을 자지 못하고 역경, 험난, 황야 폐허에서 갖가지로 당하던 고통, 간난, 비애, 참담함 등, 모든 괴로운 얽매임과 세상의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먼저 민족 전체의 통일을 힘쓰라」,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모든 수단과 방략을 가리지 말라」,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을 하는 동지 간에는 애증과 친소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는 간절하고 굳건한 유언을 남기셔서, 우리가 취할 바, 반드시 가야 할 길을 명백히 가르쳐주시고 훨훨 날아 천사와 짝이 되어 저 영광스럽고 거침없는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셨도다. 본래의 길로 돌아가셨도다.
아! 선생이시여! 오직 선생의 정신을 발휘하며 선생의 사상을 계승하여 우리 운동의 최고 운동인 독립운동으로써 선명한 기치를 세우고 이천만 대중이 진심으로 마음을 합하여 통일적 조직 아래에서 국가의 독립을 완성하고 민족의 활로를 열어젖혀 선생의 유지를 관철하려는 남아 있는 우리는 성의가 희박한 자이외다. 힘이 약한 자이외다. 지혜가 부족한 자이외다. 그리하여 선생의 유지를 곁에서 받들지 못할까 그것을 두려워하니 선생의 영령이 매양 우리의 머리 위에 비추시어 어두운 중에 남몰래 깨우침을 내리시어 우리가 갈 바를 지도하시고 우리의 정신을 격려하시고, 더욱이 대한의 왜적 풍운이 급할 때마다 필승의 기치와 북소리에 맞추어 높이 고함을 쳐 주십시오. 아! 선생의 영혼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