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중 공동투쟁과 우의의 상징,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 글.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945, 이하 임시정부로 약칭)는 중국에서 27년간 존재하며 상하이上海 · 항저우杭州 · 난징南京(전장鎮江) · 창사長沙 · 광저우廣州 · 류저우柳州 · 치장綦江 · 충칭重慶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사 등 많은 관련 유적을 남겼고, 이 가운데 적지 않은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는 1993년 상하이 시기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청사인 마당로 청사 복원을 필두로 항저우와 충칭 청사의 복원이 진행되었다. 광저우 청사처럼 복원이 논의 중인 경우도 있고, 전장이나 류저우, 창사처럼 임시정부 청사는 아니지만 관련 유적지가 복원되고 전시관이 조성된 곳도 있다.
중국 각지에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는 과거에는 한중 공동투쟁의 증좌이고, 현재와 미래에는 한중 우의의 상징이다. 본고는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 현황을 검토함으로써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독립기념관
상하이 보경리 청사 전시관 입구
상하이 보경리普慶里 4호(마당로馬當路 306농 4호) 청사의 복원
이 청사는 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를 떠나기까지 약 6년 동안 사용했던 상하이 시기의 마지막 건물이다. 마당로 청사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1989년 임시정부 청사가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언론 보도에 따라 독립기념관과 문화공보부에 의해 진행되었다. 당시 청사 주변의 간선도로인 회해중로 일대는 상가 등 고층건물의 건축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 마당로 청사는 회해중로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서 철거의 화는 면했다. 그러나 이 일대도 도시개발의 거센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이전이라 정부가 나설 수 없어 민간외교 차원으로 조사와 협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마당로 청사는 1925년에 건축된 것으로, 3층으로 된 12호 연립주택 중 4호를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임시정부가 떠난 이후에는 중국인 4~5세대 20여 명이 거주하였고, 이 과정에서 각 층에 칸막이를 설치하였고, 여닫이문이 새로 만들어지는 등 내부의 변형이 있었다.
1991년 들어 청사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해 12월 13일, 삼성물산 주식회사 전무를 우리 측 대표로 하여 상하이시 노만구 문물보호소장과 복원 원칙 협정을 체결하였다. 수교 이전이기 때문에 민간을 내세워 진행한 것이었다. 보수에 필요한 경비는 우리 측에서 3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하였는데, 삼성물산에서 성금 형태로 지원하였다. 중국 측은 우리가 제시한 전시와 건물 복원 등에 대한 의견을 존중하기로 동의하였다.
1992년 7월, 우리가 중국에 청사의 보수 및 전시에 관한 지침서를 통보하며 본격적으로 복원공사가 추진되었다. 쌍방의 업무 분담이 있었는데, 우리는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전시하는 자료의 제공과 고증을 맡았고, 중국은 건물 건축과 전시에 필요한 집기류와 가구 수집을 담당키로 하였다. 당초 거주 주민의 이주는 1992년에 끝내고 동년 9월에 복원을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주민 이주가 원만하지 못해 공사도 지연되었다.
1992년 11월 주민 이주를 마치고 보수공사에 착공하여 1993년 3월 25일 보수공사와 전시를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인 4월 13일(2019년부터 4월 11일로 변경) 역사적인 개관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1년 12월, 건축물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전시물도 완전히 교체하여 재개관하였다.
항저우 호변촌湖邊村
청사의 복원1932년 윤봉길 의거로 말미암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8년간 중국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였다. 항저우 시기(1932. 5.~1935. 11.) 임시정부는 청태제이여사淸泰第二旅舍에 잠시 청사를 꾸렸다가 곧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로 옮겨 1935년 11월까지 사용하였다.
청태제이여사의 현주소는 인화로 22호로서, 군영반점群英飯店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항저우시 인민정부가 관할하는 여관 겸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 근래에는 한정연쇄주점漢庭連鎖酒店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익스프레스 여관 영업을 하고 있다. 건물 외부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내부도 개변되었으나 일부 기둥과 벽체 등에서는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인화로의 청태제이여사가 1933년 이전해 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시정부 청사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향후 정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호변촌 청사는 1920년대에 건축한 3층 목조 건물로서, 16호 연립 중 제23호를 사용한 것인데, 원형을 거의 간직한 채 주민이 거주해 왔다. 2007년 항저우시 정부가 이 연립주택 전체를 매입하여 주민들을 이주시킨 뒤 복원공사를 하여 청사를 복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구지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대지면적은 533㎡, 건축면적은 470㎡이다. 뿐만아니라 항저우시는 주변 건물도 매입하여 일대를 1920년대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사의 복원과 전시는 한국의 독립기념관과 중국의 저장대학 한국연구중심이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내부는 관람객을 위한 영상실과 회의실·사무실·침실 등을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저장성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임시정부의 활동을 전시한 전시관도 마련하였다. 호변촌 청사는 2012년 내부 수리 공사와 전시 교체를 하여 재개관하였다. 독립기념관은 2011년과 2012년에 걸쳐 청사 보수비와 전시물 제작 설치, 팸플릿 제작 등을 지원한 바 있다.
전시실은 2개의 전청展廳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청에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상하이 시기의 활동, 항저우로의 이동, 항저우의 관련 유적, 항저우 시기의 활동, 항저우 시기의 국무위원,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 중국 각지에서의 임시정부 활동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청에는 신라방新羅坊과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 등 저장성 내 한국 관련 유적지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김구의 흉상을 전시하고 김구와 임시정부를 도운 추푸청輔成 등 저장성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호변촌 청사는 처음 복원 당시 시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나, 2014년 9월 1일 중국 국무원에서 ‘국가급항전기념시설 및 유적지’ 80개 중 하나로 지정하였다. 현재 중국에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가 구區나 시市 단위의 문화재로 지정된 반면 호변촌 청사는 유일하게 국가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충칭 연화지蓮花池
청사의 복원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마지막 둥지를 틀었다. 충칭 시기 임시정부는 양류가楊柳街-석판가石版街-오사야항吳師爺巷-연화지 청사로 4차례 이전하였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체제가 정비되고 기구가 확장되어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더 큰 청사가 필요하였고, 일본 군용기 공습으로 청사가 파괴되는 등 새 청사를 찾아 이전해야 하는 요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연화지 38호 청사는 임시정부가 27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광복을 맞이한 뜻깊은 곳이다. 이 건물은 1929년에 건축된 호텔인데, 장제스가 통째로 전세 내어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게 해 준 것으로 1945년 1월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환국할 때까지 사용했다.
건물은 회색 벽돌조 기와지붕으로 대지면적은 262.3㎡, 건축면적은 400㎡(보수 이전 518.9㎡)이다. 임시정부가 사용하다가 환국한 후 거의 원형을 유지하다가, 1949년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이후 여러 세대가 입주해 살면서 내부의 변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건물 중앙에 조성된 돌계단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 태극기를 들고 서서 기념촬영을 한 역사적인 현장으로, 원형을 잘 지녀왔다.
1991년 연화지 청사 주변의 개발 계획으로 청사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한국광복군유적지조사단(단장, 조동걸 국민대 교수)이 현지 조사를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충칭시 대외우호협력협회 신옥辛玉 회장을 만나 청사 보존 요청을 하였다. 이후 쌍방간 협의가 진행되어 1992년 3월 19일 충칭시 인민정부에서 ‘충칭시문물보호단위(65-38호)’로 지정하였고, 주민 이주가 끝난 1995년 1월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복원 주체는 한국의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우호협회가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복원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이 해 8월 11일 연화지 청사에서 역사적인 개관식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전람관大韓民國臨時政府史展覽舘’으로 조성된 38-1호의 1층은 원래 서무국․경위대․선전부 집무실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2층은 군무부․문화부․선전부장실이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철거한 후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한국광복군 전시장으로 조성되었다. 38-2호 1층은 임시의정원 회의실로 대형 태극기를 벽면에 게시하고 당시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2층에는 외무부와 외무부장과 차장실이 조성되어 있다. 38-3호 1층은 경위대, 2층은 재무부, 3층은 국무회의실과 주석판공실이 조성되어 있다. 38-4호 1층은 외빈 숙소와 주석 비서실, 2층은 요인 집무실로 조성되었고, 옥상에는 태극기 게양대가 설치되었다. 38-5호 1층은 당시 창고였으나, 현재는 특별전시를 개최하는 곳으로 변화하였고, 2층은 외빈 접대실이었는데, 현재는 청사 직원 사무실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충칭 연화지 청사 전경
마무리 글
1992년 한중수교를 전후하여 진행된 임시정부 청사의 조사와 복원은 매우 신중하게 추진되었다. 중국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인 임시정부 청사를 보존하고 복원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었다. 상하이 마당로 청사는 물론 충칭 연화지 청사 복원은 우리가 중국에 청사 보존을 호소하고 설득하여 성사한 사례이다. 따라서 청사의 복원과 전시 경비를 우리가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전시과정에서 북한을 의식한 중국 측의 간섭과 제재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충칭 청사의 복원 경비는 한국과 중국이 절반씩 분담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의 임시정부 청사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항전시기 유적지라는 공통의 역사 유적이라는 인식이 작동한 것이다.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 복원과 전시관 조성은 모두 한중 공동사업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한중 공동투쟁의 역사와 우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업은 한국과 중국이 과거의 역사적 산물을 현재에 복원하여 미래의 우의를 다지는 증좌로 삼았다는 데에서 그 의미는 크다. 중국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서 임시정부 관련 유적의 보존과 복원에 공동 주체로 나선 것은 정치적 함의도 크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대한민국 법통의 실체가 중국에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국독립운동의 차원을 넘어 세계사적 의미도 지닌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한중 양국은 공동의 적인 일제를 상대로 연대하여 공동투쟁을 펼쳤다. 그것은 일방적인 지원과 시혜가 아닌 쌍방적 호혜였다. 이를 입증하는 역사적 유적이 중국에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이다. 상하이·항저우·충칭, 그 어느 곳이라도 설명문에는 어김없이 ‘한중 공동투쟁과 우의의 증좌’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현재 양국 관계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관계 개선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그럴수록 양국은 공동투쟁의 역사를 회고하고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을 마실 때 수원(水源)을 생각한다는 것으로 근본을 잊지 않음을 이르는 말.